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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응징하겠다는 그... 나는 졸장부였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39)]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⑨

등록 2020.05.24 20:06수정 2020.05.2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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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전두환과 노태우 ⓒ 자료사진

 
나의 마지막 소망

4월 25일 밤 9시 30분, 진주에서 출발한 거제도 고현행 버스는 통영대전고속도로를 경유, 통영시외버스정류장에 잠시 머문 뒤 곧 거제로 출발했다. 그러자 잠시 후 신거제대교가 나오고 남해바다가 보였다. 막차 탓인지 버스 안은 승객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 생업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런 때 늙은이가 답사 여행을 한다는 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나는 그동안 세상을 살 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좋다는 두 마음이 공존했다. 톨스토이는 여행 중 어느 시골역 대합실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솔직히 앞날, 특히 죽음에 이르는 내 소망은 원고를 쓰다가 노트북 자판 앞에서 그대로 기진한 채 죽고 싶다.

이런저런 내 생각의 나래는 2004년 3월 초순 어느 날 밤, 미국 메릴랜드 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부근 로얼(Laurel)의 베스트웨스턴 숙소에서 보내던 때가 떠올랐다.
  

고 권중희 선생 ⓒ 박도

 
그때 나는 우국지사 권중희 선생과 백범 김구 암살 배후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보고자 NARA에 갔다. 그때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보내주신 성금 4천여만 원으로 그곳에 갈 수 있었다.

권 선생과 나는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그곳을 찾아갔지만 NARA 아키비스트(Archivist, 문헌리사)로부터 미국은 자기네 국익에 반(反)하는 중요 문서는 9.11. 사건 이후 대부분(97~98%) Destroyed(파괴)되거나 별도로 보관한다는 말을 듣고 절망감에 빠졌다. 그래도 그곳을 드나든 전문가들은 퍼즐을 맞추듯이 북데기 속에서도 알곡을 찾는 열정으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말에 따라 우리는 재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눈에 핏발이 서도록 NARA 소장 서류를 뒤졌다. 하지만 백범 암살 진상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알맹이는 찾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고 돌아왔다.
  

NARA의 아키비스트가 미국 국익에 반하는 문서는 97-98%가 'Destroyed(파괴)되었다'고 기록한 메모장. ⓒ 박도

 
그때 나는 권중희 선생과 한방에서 지냈다. 그러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귀국을 앞둔 어느 날 밤이었다.

"박 선생! 귀국할 염치가 없소. 여기 대서양 바다에 뛰어들고 싶소." 
"독자들도 양해해 주실 겁니다."



그때 성금을 보내주신 독자들은 전문가가 아닌 두 사람이 그 비밀문서를 입수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분들은 우리 겨레의 '민족혼'이 살아있다는 걸 미국을 비롯한 세계만방에 보여주기 위해 성금을 쾌척했을 것이다.
   

한영정상회담(1986. 5. 2.) ⓒ 국가기록원

 
나는 졸장부였다

"그럼, 나 좀 도와주시오."
 
 
권중희 선생은 귀국 후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하고자 그 대안으로 29만 원밖에 없다는 당시 연희동에 사는 전두환을 정의봉으로 흠씬 두들겨 응징하고자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일을 당신과 같이하자는 제안이었다. 당신은 정의봉을 들고 응징할 테니, 나는 거사 자금을 마련한 뒤 그 현장을 지켜보면서 모든 걸 기록으로 남겨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면서 당신은 이전에 연희동 전두환 사저 일대를 몇 차례 답사했다고 했다. 그런데 경비가 워낙 철통같아서 보통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에게 접근, 응징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윤봉길이나 이봉창 의사와 같은 비상한 방법을 쓰겠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귀국 즉시 나는 이전에 이미 계획한 바, 학교에서 퇴임식을 마치고 곧장 강원도 산골로 내려왔다. 나는 인생 이모작으로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면서 텃밭 농사를 짓는 얼치기 농사꾼이 되고자 했다. 그렇게 지내던 몇 해 뒤인 2007년 나는 권중희 선생의 부음을 받았다. 그분은 전두환에게 끝내 정의봉을 휘두르지 못했다. 회고 성찰컨대 나는 '행동하는 양심'이 아닌 졸장부였다.

거제도 고현항에 도착하자 밤 10시 20분 무렵이었다. 버스터미널 언저리에 숙소는 많았다. 하지만 번잡한 도시 분위기로 탐탁지 않아 그 길로 김영삼 생가 마을까지 가고자 그곳 사람에게 현지 사정을 물었다. 

그러자 현지인은 생가 마을에는 마땅한 숙소가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터미널 언저리 숙소에 든 다음 잠을 청했다. 하지만 내 회상의 나래는 1980년대 그때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내가 근무한 학교는 연세대와 이화여대 사이에 소재했기에 그 시절에는 최루탄 가스를 엄청 마셨다. 연세대에서 데모가 심한 날은 단축수업을 할 정도였다. 그 시절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자면 몇 회는 더 늘어질 것 같다. 그래서 그 무렵 주요 사건 나열로, 다사다난했던 그 시대 얘기를 마무리한다.
  

평화의 댐 기공식(1987. 12. 16.) ⓒ 국가기록원

   

고 박종철 범국민추도회(1986. 2. 7.) ⓒ 국가기록원

 
전두환 시대 주요 일지

전두환, 제11대 대통령 취임(80. 9. 1.)
국보위, 군부대 순화교육(삼청교육) 실시(80. 10. 13)
제5공화국 헌법 확정(80. 10. 22.)
전두환, 제12대 대통령 당선(81. 2. 25.)
부산 미문화원 잠입(82. 3. 18.)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83. 10. 9.)
민추협 발족(84. 5. 18.)
민추협 천만인 개헌 서명운동(86. 2. 12.)
부천경찰서 문귀동 성 폭행사건(86. 7. 3.)
26개 대학생 5백여 명 건국대 점거(86. 10. 26.)
금강산 댐 건설(86. 10. 31.)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발생(87. 1. 14.)
6.10 항쟁 시위(87. 6. 10.)
6.29 직선제 선언(87. 6. 29.)
KAL기 폭발사고(87. 11. 29.)
노태우 후보 대통령 당선(87. 12. 16.)

  

육사 시절의 전두환과 노태우 ⓒ 자료사진

  

잠실체육관에서 전두환(오른쪽)이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뒤 손을 치켜들고 있다. ⓒ 국가기록원

  
백담사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권력은 부자간에도 승계가 매끄럽지 않았다. 영조는 자기 아들을 쌀뒤주에 가둬 죽이기도 했다. 전두환은 단임 약속을 지키고 안전장치로 대통령 자리를 스스로 친구인 노태우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권좌에 오르자마자 상왕 노릇을 하려는 전임자에게 반기를 들었다. 전두환은 깊은 배신감 속에 백담사로 유배생활을 떠났다.
 
하루에 세 번 기도드릴 때마다 일백여덟 번 엎드렸다가 일어나야 하는 이 108배의 수행은 큰 고통이었다. 영하 30도 추위 속에서 번뇌 망상에 시달려야 하는 일은 더 큰 고통이었다. 기도를 시작한 지 20일이 지나자 첫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지독한 몸살이 찾아온 게 그랬다. 누우면 땅속으로 가라앉아버릴 듯 꼼짝을 할 수 없는데 하루 세 번 치러야 하는 기도 시간은 어찌나 그리 자주 찾아오는지 … 기도 시간이 겨우 끝났구나 하고 방에 들어와 다리 뻗고 눕는 순간 어느새 다음 기도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입 안이 온통 헐어 물을 마시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 모두가 내 잘못이고 내 탓이라고 생각해 보자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1분도 지나지 않아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이 나를 엄습했다. (중략) 이제는 유폐도 모자라 국회로 불러내 온갖 수모를 주려 하고 있으니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가?

다시 기도로 돌아오면 부처님께서는 누구를 원망하면 또 업(業)을 짓게 된다고 가르치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분한 생각과 배신감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일이 많았다. 나는 그때마다 냉수를 마시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후략)
- <전두환 회고록 3권> 187~188쪽에서
  

백담사에서 전두환 내외 ⓒ 자료사진

 
허물어진 우정과 동지애

후일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의 한 대목이다.
 
노태우 각하
… 어떤 이유로든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지난 4년은 노 대통령이나 내게 있어 똑같이 불행하고 부끄러운 세월이었습니다. 아무리 권력무상이라고 하지만 4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노 대통령과 내가 가졌던 그 뜨거운 우정과 동지애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노라면 새삼 사람의 본성에 대한 회의와 비애가 사무치게 느껴지곤 합니다.

냉혈하리 만큼 비정하다는 정치권력의 세계에서 사람의 의리나 도리를 따지고, 사람 간의 언약을 논하는 것이 어리석고 소용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토록 오랜 세월을 두고 나누어 온 노 대통령과 나 사이의 자랑스럽고 견고했던 우정도 결국 정치권력이라는 현실 앞에선 단 한 계절도 견디지 못한 채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꼈던 통한과 하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 .
1991. 10. 일해

전임 대통령 귀하
주신 글월 착잡한 심중으로 읽었습니다. 지적하셨듯이 우리들의 기구한 운명, 만감이 교차됩니다. 무엇보다 전임 대통령을 명예롭지 못한 고통을 안게 하게 된 일에 대해서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후임자로서 송구스러운 일이요, 누구보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전임 대통령께서 방문하는 많은 자들에게 나를 욕하는 소리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참으려고 노력도 많이 하였습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입니다 … .
대통령 노태우
<전두환 회고록> 261~276에서 발췌
 
이번 회로 전두환 대통령 편을 마치면서 그의 생가를 찾아갈 때 버스 안에서 만난 한 승객의 말과 내 기사에 달린 누리꾼의 한 댓글, 그리고 <전두환 회고록> '후기(제목; 글을 마치며)'의 한 대목을 전재하는 걸로 마침표를 찍는다.

"두환이는 파쇼를 했지만 그 시절은 물가가 안정되고, 경제도 잘 돌아갔다오."
"쿠데타 주범 처벌 없이는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나의 허물은 덮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고, 나는 국민의 채찍을 피할 생각이 없다. 이 땅을 지키고,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느라 피와 땀을 바쳐온 모든 분들에게 이해와 관용을 구하고자 한다."
 
(*다음 회부터는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편입니다.)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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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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