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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땅에 처음으로 영어 알파벳이 전해진 순간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조난당한 미국인의 조선 체험

등록 2020.05.15 18:56수정 2020.05.16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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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편집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조선인 만난 미국인의 궁금증]

1882년 6월 7일 아침 부산 앞 바다를 뒤로 하고 원산으로 향했을 때 나의 가슴 속에는 흥분과 호기심이 꿈틀대고 있었다오. 그도 그럴 것이, 말로만 듣던 조선이라는 은둔 왕국의 제1의 항구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조선 사람들과 그 삶의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조선은 하루 동안의 관찰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겨졌다오.

부산 앞바다를 떠나 북상하는 바닷길에서 나의 두 눈은 동해의 바다와 해안을 탐색하느라 분주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으로 세심히 관찰하였지요.

동해안은 식별이 용이했고 항행 또한 순조로왔습니다. 해류는 북쪽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유속을 측량해 보니 1일당 약 10마일의 속도였습니다. 항행은 동해안의 육지를 시야에 넣은 상태에서 해안으로부터 3 내지 5마일의 거리를 유지한 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적합해 보였습니다.

조선의 동해안은 신비롭고 아름다웠습니다. 해안 전체가 우거진 산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히 인상적이더군요. 척추 산맥(axial range)으로부터 뻗어 나온 산줄기들이 연이어 내달리고 있는 형세였는데 해안을 형성하고 있는 산맥이 먼 해상에서도 눈에 뜨입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해안 산맥의 고도가 점점 높아지는 형세였습니다.

라자레프 항
 

조지 포크의 여지도 19세기 중기 조선지도에 영자 표기 ⓒ 미국 지리협회

 
부산으로부터 70마일쯤 올라왔을 때 우리는 엄청나게 큰 새떼를 목격했습니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는 거였습니다. 아울러 수많은 고래들이 또한 몰려 들어 같은 물고기를 포식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새떼와 고래 떼가 엄청난 물고기 무리를 같이 잡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불현듯 새떼가 우리의 배를 구름장처럼 덮어버리더군요. 하늘을 뒤덮은 새의 무리는 그 폭이 무려 수마일에 이르렀습니다. 새의 머리는 오리 같았고 몸체는 오리보다 작았습니다. 등어리와 날개는 갈색 혹은 검정색이었어요. 가슴팍은 흰색이었고 몸의 길이는 15cm 남짓이었습니다. 해안가에서도 또한 여러 마리의 고래가 보였습니다. 그건 그곳의 수심이 깊다는 뜻이지요.

바다에 어둠이 내렸고 우리는 배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다음날 깨어나 보니 바다에 짙은 안개가 덮혀 있더군요. 우리는 자욱한 해무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어요. 다행히 정오가 되자 안개가 걷히더군요. 여기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톡까지는 짙은 안개가 끼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하더군요. 

정오에 우리는 원산 남쪽 연해의 한 지점에서 섬들로 둘러싸인 만으로 진입했습니다. 만의 초입에 눈에 확 뜨이는 섬이 하나 있었는데 섬의 동쪽 면이 깍아지른 현무암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더군요. 그 섬에는 보트가 통과할 수도 있는 동굴이 하나 나 있다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섬 주변에선 많은 물개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물개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만 안쪽으로 들어가 수심을 측량했는데 약 12미터였습니다. 우리 배는 서쪽 방향으로 빙돌아 영흥만 안으로 진입한 후 닻을 내렸습니다. 원산항의 일본 거류지로부터 4분의 3마일 떨어진 지점이었는데 수심은 약 7여 미터였습니다.

원산항은 진입이 용이했고 영국의 수로국에서 만든 해도에도 뚜렷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우리 같은 서양인들은 영흥만을 브로턴 만(Broughton Bay), 원산항을 라자레프 항(Port Lazareff)이라 불렀지요.

우리는 항구 일대의 지리 형세를 세밀히 관찰·측량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원산항 즉 라자레프 항은 세계적으로 가장 멋진 항구에 속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해안은 들쭉날쭉한 작고 아름다운 만과 곶이 이어져 있고, 가파른 언덕 아래로는 초목이 우거져 있으며 검푸른 바다가 하얀 모래 사장에 넘실대고 있다. 닻을 내려뜨릴 수 있는 영역은 넓고 해저의 지반은 튼튼하다. 조수 간만의 차이는 2피트에 불과하다."

원산 땅을 처음 밟은 네 명의 미국인

1880년 일본에 개항된 원산에는 일본인 마을과 조선인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인구는 약 1000명을 헤아렸습니다. 유럽풍의 목조 건물이 많이 보이더군요. 건축용 목재는 일본에서 온 것도 있고, 조선의 섬 마쓰시마(울릉도를 지칭)에서도 옵니다. 마쓰시마 섬은 원산에서 동쪽으로 50마일가량 떨어져 있습니다. 원산에도 부산에서처럼 미쓰비시 회사가 널찍한 사무실과 창고를 두고 있었습니다. 선착장은 돌을 쌓아 잘 만든 방파제로 둘러싸여 있었구요.

매번 증기선이 입항할 때는 많은 일인 이주민들이 들어옵니다. 새 건물들도 신축되고 있었고 교역도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원산항의 수출입 물량은 부산항보다 많다고 하더군요. 부산보다 원산 지역의 가옥이 월등이 나은 점, 교역이 보다 활발한 점 등으로 보아 이곳 주민들의 수준이 부산보다 나아 보였습니다.

교역 품목은 부산의 경우와 엇비슷했지만 호랑이 가죽을 비롯한 동물 가죽이 풍부했습니다. 호랑이는 한반도 전체에 많이 살지만 동해안의 험산준령에 특히 많다고 합니다. 호랑이는 종종 마을에 내려와 인명을 해치곤 합니다. 호랑이를 격파할 무기가 없기 때문에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호피는 귀하여 상당히 비쌉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고급 호피는 25달러 이하로는 구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우리 배가 원산에 정박했을 때 많은 조선인들이 몰려왔습니다. 더러는 일본말을 했지만 부산에서만큼은 일반적이거나 유창하지는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일은 그들은 이미 조선과 미국간에 우호 조약이 체결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정부가 공표한 소식이 원산항에 닿았던 모양입니다. 여기에서도 호기심에 사로잡힌 조선인들이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지더군요. 언제쯤 미국 군함이 들어올 거냐, 언제쯤 미국인들이 여기 들어와 살 거냐...

이번엔 상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원산 땅을 처음 밟은 미국인은 누구였으며 무슨 목적이었을까요? 그건 1854년 6월 26일, 그러니까 우리가 원산 앞바다에 나타나기 무려 28년전의 일이었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래 4명의 10대 후반 20대 초반 나이의 청년들이었다오.

멜빌 켈시 Melville Kelsey (23세, 뉴욕시 출신)
토마스 맥과이어 Thomas McGuire (20세, 필라델피아 출신)
데이비드 반즈 David Barnes (20세, 오하이오 출신)
에드워드 브레일리 Edward Brailey (18세, 메사추세츠 출신)

이들 네 명의 선원은 1854년 6월 13일 코네티컷의 뉴 베드포드 New Bedford 항에서 고래잡이배(포경선) '투 브라더스 Two Brothers' 호에 올랐습니다. 당시 고래잡이는 큰 돈을 거머잡을 수 있는 비즈니스였지요. 이 포경선은 출항한 지 1년만에 일본 홋카이도에 도착했고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의 해협을 통과한 후 마침내 조선의 동해로 진입했습니다.

문제는 선장 존 챠일즈 John Childs였습니다. 매우 포악한 선장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그는 선원을 노예나 동물처럼 취급했습니다. 훗날 선원들의 진술에 의하면, 선원들이 급식에 대하여 불평을 하면 선장은 굶어 죽이겠다며 밥그릇을 빼앗기 일수였습니다. 옷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감금과 구타가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학대를 견딜 수 없었던 선원들이 탈출을 감행합니다. 1855년 6월 26일 칠흑같이 깜깜한 밤 12시를 기해 네 명의 선원들은 본선의 보트 하나를 빼내어 탈출에 일단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의 손짓이었습니다. 엿새 동안이나 미지의 바다를 정처없이 떠돈 끝에 돌연 광풍이 불어닥쳤습니다. 풍랑에 휩쓸린 보트는 미지의 해안에 부딛쳐 난파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가까스로 뭍으로 기어올랐습니다. 원산항 인근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을 품어준 조선인들

하늘과 땅이 생긴 이래로 처음으로 미국인이 조선 땅을 밟은 사건은 그렇게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후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해안에 있던 조선인들이 조난당한 이방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이제 조난자들의 운명은 전적으로 조선인들에게 맡겨진 셈입니다.

그런데, 조선인들의 행동은 실로 뜻밖이었습니다. 손짓 발짓을 써가며 이방인들을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옷과 음식을 주며 친절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선원들은 조선 마을에서 한 달 동안이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선뜻 믿어지지 않겠지만 모두 사실입니다. 그들은 훗날 이렇게 진술했으니까요.

"There were natives on the beach. They met us and then took us to their houses and treated us well, gave us clothes and food(해변에 원주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만났고  자기네들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들은 우리를 잘 대접해 주었다. 우리에게 옷과 음식을 주었다)."

"The Coreans treated us like men(한국인들은 우리를 인간답게 대해 주었다)."


자국 선장에게서 동물 취급을 받았던 미국 선원들은 생면부지의 조선인들로부터 형제애적인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무지하고 미개한 이교도로만 여겼던 '토인 土人'들에게서 말입니다.

이 아름답고도 의미심장한 에피소드는 예나 지금이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에도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1855년 12월 22일 상하이 주재 미국 영사 머피(R.C. Murphy)가 마시(William L. Marcy)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를 읽어 보았기 때문이지요. 상하이 주재 영사가 보고서를 쓴 까닭은, 문제의 선원들이 조선과 중국 정부의 공조를 통해 종국엔 상하이의 미국 영사관에 인계됐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체 스토리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기구한 모험은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이를테면, 조선 땅에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알파벳과 단어가 전해진 것도 바로 그 조난 선원들에 의해서였지요. 그때 손글씨로 썼던 기록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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