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2 08:20최종 업데이트 20.05.1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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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발생해 클럽과 식당 등이 문을 닫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 한 클럽 입구에 서울시의 '집합금지 명령' 안내문이 붙어 있다. ⓒ 권우성

 
인쇄매체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방송뉴스마저 그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 언론사들이 지닌 사회적 파급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아무리 1인 미디어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기사 쓰기를 업으로 삼고 이를 안정적으로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언론사에 소속된 기자들이다. 취재부터 편집, 보도에 이르는 과정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추고 유지할 수 있는 곳 또한 마찬가지로 언론사들이다. 여기에 아무리 언론의 신뢰도가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실을 확인하는 매체로서 최소한의 권위를 언론에 부여한다. 검증되지 않은 소식이 풍문처럼 돌 때 '일단 기사가 뜰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람이 여전히 많은 이유다.

영향력이 큰 집단일수록 가지게 될 사회적 책임도 거기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이 자신이 가진 마이크를 함부로 사용했을 때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기자협회 등이 제정한 신문윤리강령은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방식을 이렇게 정리한다.


'언론인은 개인의 권리 보호에 최선을 기해야 하며, 건전한 여론형성과 공공복지 향상을 위하여 사회의 중요한 공공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언론이 건전한 여론형성과 공공복지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이를 저해하는 보도를 해선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언론들이 이러한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감이 든다.

지난 7일 이태원의 한 클럽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방문한 이후 보도된 국민일보의 기사를 살펴보자. 현재는 제목이 수정되었지만 처음 이 기사의 제목은 해당 클럽이 '게이 클럽'임을 부각했고 본문에는 확진자의 거주지나 직장과 관련한 상세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누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것이 곧바로 감염인의 신상을 노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해당 기사는 '개인의 권리 보호'라는 의무를 따르지 않았으며, 역시나 신문윤리강령에 함께 정의된 '개인의 명예 존중과 사생활 보호'라는 가치도 철저히 무시했다.

건전한 여론형성에도 실패한 기사
 

누리꾼들이 국민일보 보도에 반발해 제작한 '보이콧 국민' ⓒ SNS 갈무리

 
신문윤리강령을 기준 삼았을 때 '건전한 여론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떨까. 클럽은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밀폐된 곳이며 다수의 사람들이 좁은 거리를 두고 몸을 움직이는 공간이다. 즉 비말과 접촉을 통한 감염 가능성이 비교적 높은 공간인 셈이다.

어쩌면 기자는 사람들이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코로나19 사태가 완전히 소강되기까지 감염의 위험이 있는 장소에 방문을 자제하자는 여론을 만들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전제한다고 해도 66번 확진자가 방문한 곳이 '이태원의 게이 클럽'임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다. 언급한 맥락에 비춰봤을 때 클럽 혹은 그와 유사한 환경의 공간이라면 그곳이 이성애자들이 주로 방문하는 곳이건, 외국인 전용이건,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을 위한 곳이건 간에 모두 방문을 자제해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민일보의 해당 보도는 '건전한 여론형성'의 측면에서 봐도 타당하다 보기 어렵다.

사실 이는 전염병 전파나 범죄 행위를 다룬 보도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내용을 다룬 보도들이 당사자들의 성적지향 혹은 성별정체성, 국적, 출신지 등 불필요한 사회적 신분을 불필요하게 부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양성애자도 트랜스젠더도 모두 병에 걸릴 수 있고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으며 위험한 일을 할 수도 있다.

즉 이 모든 행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한마디로 당사자의 정체성은 알릴 필요조차 없는 정보다. 특정한 행동을 한 동기가 그 사람의 정체성과 강한 연관성이라도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사건도 전혀 아니었다.

언론이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
 

언론이 원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사회는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한다. ⓒ pixabay

 
언론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와 원칙'은 언론사로서 추구해야 할 목표다. 언론사가 지닌 전파력은 이를 실현할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말이 전도되어 언론사가 오로지 주목받는 것을 목표로 하면, 불필요하게 극단적인 논조를 사용하거나 자극적으로 악용될 사실만 지나치게 부각하는 일을 저지를수 밖에 없게 된다.

작금의 상황이 어떠한가. 국민일보의 보도 이후로 '게이 클럽'을 미끼처럼 부각해 조회를 유도한 파생 기사들이 수십 건이나 등장했다. 해당 클럽에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방문했다는 기상천외한 가십성 기사까지 나타났다. 이후에도 국민일보는 코로나19를 막기 위해서는 동성애자들의 활동패턴을 알아야 한다는 둥의 해괴한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이정도면 보도를 하는 게 아니라 가십거리를 생성하는 수준이다.

그리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가뜩이나 사회적 낙인 탓에 성적 지향이 드러날 것을 우려했던 사람들은 이 시국에 검진을 받는 게 곧바로 아웃팅으로 연결될까 공포에 떨고 있다. 같은 시기에 이태원을 방문했던 사람들 중 성소수자가 아닌 이들도 같은 낙인을 얻게 될까 역시 두려움에 빠져있다. 그리고 방역당국은 이런 상황이 감염 가능성이 있는 이들의 검진을 가로막는 게 아닐까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정세균 국무총리 역시도 10일 열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특정 커뮤니티에 대한 비난은 방역의 관점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접촉자가 비난을 두려워해 진단검사를 기피하게 되면 그 피해는 우리 사회 전체가 떠안게 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아수라장을 만든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에는 바이러스도 감염자도 아닌 무책임한 언론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을 얼마나 쉽게 내버렸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일보를 비롯하여 무책임한 행태를 보인 언론들에게 전하고 싶다. 지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원칙, 강령, 합의된 윤리는 그냥 만들어진 입바른 말이 아니다. 이 원칙들이 확립되기까지 언론에 의해 저질러진 피할 수 있었던 사건·사고와 그로인해 치러진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들이 있었다. 원칙은 그게 옳아서도 그렇지만 이를 무시할 경우 발생할 결과가 너무 빤하기 때문에라도 지켜야 한다. 언론이 스스로 마련한 윤리를 저버린다는 것은 이미 지나온 고난과 비극을 재현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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