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상에 관한 8가지 철학 연습

[독서에세이] 한나 아렌트 지음 '과거와 미래 사이'를 읽고

등록 2020.05.14 11:11수정 2020.05.1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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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 사이>는, 한나 아렌트의 모든 저서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연습'이다. 정치, 사상, 철학, 그런 단어들이 들어있어, 첫인상으론 그다지 쉽지 않아 보인다.
 

<과거와 미래 사이> 책표지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사이>, 서유경 옮김, 푸른숲, 2009. ⓒ 이인미

 
그러나 그리 읽기 어려운 책은 아니다. 하나하나가 우리의 '현대적' 관심사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책들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집중력만 발휘하면 독서하기가 그리 힘겹지 않다. 책의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전통과 근대
2. 역사 개념: 고대와 근대
3. 권위란 무엇인가?
4. 자유란 무엇인가?
5. 교육의 위기
6. 문화의 위기: 그 사회적 정치적 의미
7. 진리와 정치
8. 우주 정복과 인간의 위업에 관한 철학적 성찰

각각의 장들은 독립적이다. 애초에 서로 다른 잡지에 따로따로 게재되었던 글들이었다. 그러니까,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눈을 잡아끄는 주제가 있다면, 그 글부터 읽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 글 한 편만 읽고 이 책을 덮어도 괜찮다(아렌트가 이 책을 펴낼 때는 그런 독자가 많지 않길 바랐겠지만).

1장 '전통과 근대'에서는, 전통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 이야기된다.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전통은 생존하는데, 그중 하나가 전제적(專制的) 즉 포악한(despotic) 방식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잔존하는 전통이 주변에 있다면 상당히 힘들 수 있겠다는 걱정이 올라온다. 예를 들어 웃어른을 공경한다는 좋은 전통이 '경로석 양보를 반강제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든지···.

2장 '역사개념으로서 고대와 근대'에서 아렌트는, 주관성(주체성)을 중시하게 된 계기로 서양철학사를 구분지은 근대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근대는 말하자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관계가 깊다.

이는 객관성, 우연성을 자칫 다 삼켜버릴 수 있는 주관성의 힘을 신뢰하는 명제다. 따라서 이 장을 읽을 때 우리는 인간의 주관성이 얼마나 위대한지, 반대로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아렌트의 상상에 동참할 수 있다.

3장 '권위란 무엇인가?'에서 우리는 권위를 정치에 연결해 생각해볼 수 있다. 아렌트는 이 글에서 "권위는 항상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에 보통 특정형태의 권력이나 폭력으로 오인된다"는 점을 먼저 짚어준다(129쪽). 우리 사회에서 권위는 걸핏하면 '나 때는 말이야(라떼 이즈 홀스)'를 읊는 '꼰대'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권위는, 앞에선 고개를 끄덕여주고 돌아서면 신경쓰지 않는 이중성을 유발한다. 그런데, 아렌트는 공동체 안에서 권위자와 지지자 사이에 건강한 권력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정치영역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권위는 폭력처럼 타도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건강하게 세워야 하는 사안일지 모른다.


다음으로 4장 '자유란 무엇인가?'에서는 흥미로운 단어비교가 나타난다. 프리덤(freedom)과 리버티(liberty)다. 인간이 진정 원하는 것은 프리덤일까? 리버티일까? 자유의 여신상에서 자유는 프리덤일까? 리버티일까?

4장을 읽으며 자유의 의미를 이렇게 분간해서 따져보는 경험은 짤막하지만 재미있을 것이다. 결국 누가 어떤 자유를 주장하는가가 중요한 주제가 된다. 아렌트는 '존재의 표현으로서 정치적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한다. 이때 아렌트는 어떤 단어를 썼을까? 프리덤이다.

이제 아렌트는 5장에선 교육의 위기를, 6장에선 문화의 위기를 순서대로 다룬다. 한때 미국에서 제법 큰 논쟁거리였던 진보교육과 보통교육(평등교육)이라는 주제를 우선 살펴보는데, 그래서 약간 멀게 느껴질 우려가 있다.

하지만, 권위와 책임이라는 주제가 나오면서부터는,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 자주 논란이 되는 교권 논쟁을 연상할 수 있어, 그때부터 지루함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6장이 다루는 '문화의 위기'는, 대중이 문화의 주체가 아니라 '오락'의 주체가 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그런 다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문제에서 동류의식을 발견하면 얼마나 빠르게 서로를 알아보고, 얼마나 확실하게 서로에게 속함을 느낄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취향의 문제로 넘어간다(298쪽).

대중사회 안에서 뭐가 정말 내 취향인지, 혹시 다수의 취향으로 광고된 항목들에 내가 업혀가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가 생길 수 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그 의심을 본격적으로 따져볼 수 있다.

7장에 이르러 우리는 '진리와 정치' 주제를 만난다. 이 장에서는 가짜 뉴스의 진짜 문제점을 성찰할 수 있다. 아렌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부여한다.
 
사실적 진리를 일관성있는 거짓말로 완전히 교체한 결과는 이제 거짓말이 진리로 수용되고 진리는 거짓말로 폄하된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세계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우리의 감각이 파괴되어간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한 처방책은 아무것도 없다. - 345쪽

곱씹어 읽을수록 약간 무섭기까지 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가짜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은 실재세계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감각을 이미 상실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처럼 감각을 다 같이 잃어버리자고, 가짜 뉴스를 전달하며 제안해 온다면 그 제안을 나는 어떻게 할까? 당당히 거부할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거부 안 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8장은 '우주 정복과 인간의 위업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다. 우주과학자가 자기는 직접 달나라나 다른 행성에 가지 않으면서 우주를 탐색하는 실험과 시도를 왜 멈추지 않는지에 대한 아렌트의 견해를 들을 수 있다.

'정치이론가라서 정치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하는 느낌이 들 수 있는데, 아렌트가 인간다운 삶으로서 정치를 파고드는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주에 관한 인간의 관심(집착?)을 '인간다운' 관심의 하나(삶의 공간을 넓히고픈 인간의 심리)로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이 여덟 가지 철학 연습을 다 마치면 '정치적으로 생각하기'에 한두 걸음쯤 가까워졌다고 간주해도 좋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슨 근거로? "음... 실제로 이 책의 안내를 받아 철학 연습에 참여해보면 자연스럽게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단, 문제라면 현재는 책이 절판되었다는 것.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는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책이니, 꼭 한 번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한나 아렌트를 더 읽고 싶은 분은 제 블로그(blog.naver.com/mindfirst)에 들러주세요.
#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 사이 #전통 #자유 #가짜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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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수업], [해나(한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박원순의 죽음과 시민의 침묵], [(2022세종도서) 환경살림 80가지] 출간작가 - She calls herself as a ‘public intellectual(지식소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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