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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전두환 조상으로 오해받은 '광주의 충신'

고경명·김덕령 장군과 함께 '광주 3충신'으로 기록된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

등록 2020.05.19 17:43수정 2020.05.1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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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에 있는 광주 충민사 전경. ‘광주의 피’를 먹고 탄생한 제5 공화국 시절인 1982년에 착공하여 1985년에 완공되었다 ⓒ 임영열

 
광주광역시에는 '구성로(龜城路)'라는 도로가 있다.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작하여 광주대교를 거쳐 월산 로터리까지 약 1.3km에 이르는 도로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도로명이 왜 구성로인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구성로는 1627년 인조 5년에 발생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의 3만 대군을 평안도 안주성에서 막다가 장렬히 순절한 광주 출신 '구성공(龜城公) 전상의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충민사 사당. 정면 3칸, 측면 두 칸의 팔작 집이다 ⓒ 임영열

   

충민사 사당에 모셔져 있는 전상의(1575~1627) 장군의 영정 ⓒ 임영열

 
오랑캐도 감복한 충신, 전상의 장군


1879년에 간행된 광주 읍지(光州邑誌)의 '충신전(忠臣傳)'에는 광주를 빛낸 의로운 충신 14명이 기록돼 있다.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충렬공 고경명 장군과 충장공 김덕령 장군, 정묘호란 당시 안주성 백상루 전투에서 순절한 구성공 전상의 장군을 '광주의 3충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14명의 충신들 중에서 세 분의 장군이 나라로부터 정려(旌閭)를 하사 받았기에 광주의 3충신이라 부르고 있다. 고경명 장군을 배향하는 '포충사'와 김덕령 장군을 향사하는 '충장사'는 대부분의 광주 사람들이 알고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생들의 봄·가을 소풍 장소로도 인기가 좋은 곳이다. 하지만 충장사 인근에 있는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는 다소 낯설어하는 게 사실이다. 연유가 무엇일까.
 

충민사 내삼문. 수의문 ⓒ 임영열

 
전상의(全尙毅 1575~1627) 장군은 1575년(선조 8년)에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서 전용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당을 다니며 글을 배웠지만 말 타기와 활쏘기 등 병정놀이를 더 좋아했다. 남달리 무예에 뛰어났던 전상의는 29살에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1614년(광해군 6년)에 정 3품의 '내금위 어모장군(內禁衛 禦侮將軍)'에 임명됐다. 어모장군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실장 격이다.
 

외교 능력이 탁월한 전상의 장군은 1617년에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간 우리 동포 150여 명을 귀국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 임영열

 
무술 실력 못지않게 외교 수완도 탁월했다. 광해군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며 왕의 신임을 얻은 그는 1617년에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포로로 끌려간 우리 동포 150여 명을 귀국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1623년, 광해군의 반대세력인 서인 일파들이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전상의 장군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어모장군에서 평안도 개천 군수로 강등됐다가 구성도호부사로 승진했다.
 

숙종 때 광주시 동구 지원동에 장군의 정려각을 세웠으나, 한국전쟁 당시 훼손되자 정려 유허비를 세우고 충민사 내에 정려각을 복원했다 ⓒ 임영열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의 국방 외교 정책 기조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광해의 정책과는 달리, 금나라를 멀리 하고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이른바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폈다. 중화 대륙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는 후금(後金)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일로를 걸으며 조선은 전쟁의 위기로 내몰렸다.

1627년 인조 5년 1월 13일, 후금의 태종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기습 공격한다.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후금의 군대는 일주일 만에 청천강을 건너 안주성에 도달했다.


안주성은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조정에서 평안 감사, 남이홍과 안주목사 김준, 구성도호부사 전상의에게 '안주성을 방어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세 장군은 의기투합하여 후금의 선발대를 막아냈다.
 

충민사 외삼문. 창절문 ⓒ 임영열

 
승리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군의 보급로가 막히고 후금의 군대 본진이 한꺼번에 몰려오자 남이홍과 김준이 지키던 중영(中營)이 먼저 함락됐다. 적들에게 포위된 채 남영(南營)을 지키던 전상의 장군은 중과부적으로 패전을 직감한다. 그는 부하들에게 피신하여 목숨을 부지할 것을 명하며 홀로 백상루에 올라 마지막 남은 화살을 적들에게 퍼부었다.

화살이 떨어지고 포위망이 좁혀오자, 전상의 장군은 임금이 있는 한양을 향해 4배를 올린 후 스스로 자결한다. 전상의 장군의 충의에 감복한 후금의 오랑캐들은 "충신열사의 시체는 일반 병사와 함께 둘 수 없다"며 장군의 시신을 백상루 앞에 묻은 후 묘비를 세워 주며 적장들도 장군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전상의 장군이 전두환의 조상으로 오해받은 연유

안주성 백상루 전투 중 53세로 순절한 전상의 장군은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고, 시신은 고향땅으로 모셔와 광주 화암동 무등산 평두메에 예장하였다. 예장(禮葬)은 국가에서 공신에게 베푸는 장례로 오늘날의 국장과 같은 성격이다.
 

무등산 평두메에 있는 전상의 장군의 예장석묘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예장(禮葬)은 국가에서 공신에게 베푸는 장례로 오늘날의 국장과 같은 성격이다 ⓒ 임영열

 
숙종 때 남이홍, 김준과 함께 평안도 안주의 충민사에 배향되었고 정려를 하사 받았다. 지금은 고향땅 광주의 충민사(忠愍祠)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다. 사당 가까운 곳에 있는 장군의 예장석묘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다.

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광주 3충신' 중의 한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 전상의 장군은 한 때 광주 시민들로부터 외면받았다.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해는 장군의 묘소가 있는 화암마을 입구의 사당 '충민사'의 건립 시기가 '광주의 피'를 먹고 탄생한 제5 공화국 전두환 정권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었다.

1979년에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북구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를 먼저 세우고 1982년에 사당의 착공에 들어갔다. 광주 시민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이가 자기 조상의 사당을 무등산 아래에 짓는다더라"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충민사 유물관. 전경환이 기증한 유물 중 일부가 복제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 임영열

 
설상가상으로, 1985년 사당이 준공되고 충민사 공적비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갔다. 분노한 시민들이 급기야 공적비를 부숴버렸다. 공적비에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간 사연은 이랬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인사동 골동품거리에 전상의 장군의 유품이 매물로 나왔다. 어느 인사가 전상의 장군과 전두환·전경환이 같은 집안인 줄 알고 이 유물을 매입하여 전경환에게 보냈다. 정권 실세에게 잘 보일 목적이었다.

전경환이 이 유물을 확인해 보니 자기 조상의 유물이 아니었다. 전상의 장군은 천안(天安) 전 씨고, 전두환은 완산(完山) 전 씨로 밝혀져서 전경환은 그 유품을 서울 민속박물관에 기증한다. 그때 마침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가 완공되고 유품의 일부가 전경환의 이름으로 충민사 유물관에 기증됐다. 공적비에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간 이유다.
 

1979년 사단법인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가 중심이 되어 북구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다 ⓒ 임영열

 
충민사가 건립되고 35년이 지나는 동안 시민들의 오해는 대부분 풀렸지만, 광주 3충신 중의 한 분인 전상의 장군은 단순히 성이 같다는 이유로 광주를 짓밟고 국가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의 수괴, 전두환의 조상으로 한때 오해받은 적이 있는 비운의 장군이었다. 이래 저래 전두환은 광주에 참회하고 사죄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광주 충민사 #광주 3충신 #전상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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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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