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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 노태우에 '어부지리'를 알려주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41)]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②

등록 2020.06.01 15:29수정 2020.06.0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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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생가 마을에서 바라본 대구 팔공산 ⓒ 박도

  
노태우 생가

원주역 발 부전행 무궁화호 1621 열차는 그날(4월 25일) 낮 12시 37분 정각에 영천역에 닿았다. 하늘은 맑고 봄이 한창 무르익은 아주 좋은 날이었다. 구름다리를 거쳐 텅 빈 영천역 대합실로 갔다. 친구 김병하(대구대 명예교수)가 대합실에서 나를 보고 손을 치켜들고 있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매우 즐겁지 않겠는가?)

우리는 악수만으로도 부족하여 포옹을 한 뒤 주차장에 세워둔 그의 차로 갔다. 그는 수십 년간 대구에 살았기에 그 일대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노태우 생가는 팔공산 밑 산동네다. 그곳으로 가는 도로에 이르자 승용차가 가득했다. 그 무렵엔 코로나19 확진자 수도 줄어든 데다가 모처럼 쾌청한 주말이었다. 집안에서 지내던 대구 시민들이 승용차를 몰고 바람이라도 쐬고자 교외로 나온 듯했다.  
 

바깥에서 본 노태우 생가 ⓒ 박도

   
노태우 생가

팔공산 바로 밑 노태우 생가마을에 이르자 시곗바늘은 낮 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생가 앞 '문화관광 해설사의 집' 유리문에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잠정 휴관합니다"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담장이 돌담으로 둘러싸인 생가 대문은 다행히 없었다. 생가 앞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노태우 생가 안내판 ⓒ 박도

 
"노태우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생가

이곳은 노태우 대통령의 생가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2월 25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였다. 1932년 8월 17일(음력 7월 16일),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맏아들로 이곳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교하이고, 아호는 용당(庸堂)이다.



1945년 공산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공립직업학교(현재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이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섯 살이 채 안 돼 아버지를 여읜 노태우 소년은 일제강점기에 홀어머니 품에서 자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곳 팔공산 자락에서 심신을 단련하며 꿈을 키웠다. 그의 몸에 밴 참고 용서하며 기다리는 참 용기도 그때 배웠다고 한다.

1948년 경북중학교(현재의 경북고등학교) 4학년에 편입했으며,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듬해인 1951년 경북고를 졸업하고 헌병학교에 자원입대해 낙동강 벙어전투 등에 참전했다. 1952년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해 1955년 졸업과 함게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후략)"

  

노태우 생가 안채 ⓒ 박도

 
양지 바른 집

나는 노태우 생가 마당에 잠시 머물며 카메라 셔터를 부지런히 눌렀다. 노태우 생가는 양지 바른 여염집으로 집 뒤는 팔공산이요, 집 앞에도 올망졸망한 산들이 펼쳐졌다. 마당 한 편에는 노태우 동상이 들어서 있었고, 집안 방앗간에는 디딜방아가, 집 어귀 외양간에는 플라스틱 모형의 소가 주인 대신 생가를 지키고 있었다.

사진 촬영을 마치자 친구는 곧장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밥집으로 안내했다. 거기서 우리는 우거지국밥으로 마음의 점을 찍었다. 나는 그날 오후 일정으로 전두환 생가 탐방을 계획한지라 차담은 생략한 채 다시 친구 차에 올랐다. 친구가 작별인사 겸 한마디 했다.

"노태우 재임 중 북방정책만은 높이 평가해야 할 걸세."
"나도 그 점은 동감하네."
"추징금도 거의 완납한 걸로 알고 있네."
"나도 그런 보도를 본 듯하네."


 

노태우, 고르바초프 한러 정상회담(1990. 6. 5.) ⓒ 국가기록원

 
다음 답사지 합천 전두환 생가로 가는 버스는 서부정류장에서 출발했다. 서울도 그렇지만 대구도 시내 교통은 지하철이 더 빠를 것 같아 아양교역 입구에서 내렸다. 친구는 내게 참고하라면서 <신현확의 증언>이라는 책을 건넸다. 신현확은 최규하 정권에서 국무총리를 지냈다.

지하철로 곧장 서부정류장에 갔다. 거기서도 코로나19 사태로 시외버스들은 임시 시간표에 맞춰 운행하고 있었다. 그날 합천으로 가는 차는 오후 5시 20분 막차밖에 없었다.

인터넷으로 조회할 때는 오후 4시 무렵에 있다기에 차담도 생략한 채 부지런히 달려 왔다. 나는 그날 다시 대구로 되돌아와 영천역에서 밤 열차로 원주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낭패감과 함께 그제부터는 시간에 쫓기는 조급증에서 벗어났다. 세상만사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게 마련이고, 명(明)이 있으면 암(暗)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 이제는 무리한 여행은 삼가하라는 계시로 마음을 다독였다.

나는 대합실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을 뽑은 뒤 친구가 준 <신현확의 증언>을 펼쳤다.
 

5공 청문회 증인석에 나온 전 신현확 국무총리 ⓒ 자료사진

  
신현확이 노태우에게 준 '신의 한 수'

전두환 집권 말기 노태우는 신현확을 자주 찾아 자문을 구했다.

노태우 : "총리님, 시국이 험난합니다."
신현확 : "자네가 살아갈 길은 대통령 직선제밖에 없어. 그 길이 우리가 다 같이 살 길이기도 한 거야. 지금 국민이 요구하는 게 그거 아니야? 이 간절한 요구를 총칼로 짓밟는다고 짓밟아지나? … 이제 더 이상 군사정권은 안 돼. 직선제로 개헌을 해서 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돼. 그런 다음에 선거로 이길 생각을 하라고. 그게 지금 시대정신에도 맞는 거야."


     
노태우 : "제가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신현확 : "난 이길 수 있다고 봐. 국민들이 바라는 직선제 개헌을 선언하면, 자네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가 상승할 거고, 3김은 내 예상대로라면 제각기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설 테니 야권 표는 갈라질 게 아닌가. 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네."
노태우 :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신철식 지음 <신현확의 증언> 365쪽


백전노장 신현확이 노태우에게 들려준 이 한 마디는 당시 정국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1노 3김 제13대 대선 벽보(1987.). ⓒ 자료사진

 
#노태우 #신현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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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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