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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즐기는 보드게임, 이건 좀 씁쓸하네요

모두 은퇴했을 때 가장 부자인 사람이 이기는 룰... 돈이 인생의 목적은 아니었으면

등록 2020.05.21 07:59수정 2020.05.21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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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저녁시간이 되면 우리집 거실에서는 종종 '게임 한판'이 벌어지곤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강제 집콕이 두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데다 날이 궂어 유일한 외출인 산책마저 허락되지 않은 날이면 저녁시간을 왁자지껄 웃음으로 채워주는 '게임 한판'이 더욱 빛을 발하곤 하는 요즘이다.

우리집에 있는 보드게임들 중 '인생게임(The Game of Life)'이라는 것이 있다. 스핀을 돌려 나온 숫자만큼 보드판을 전진해가며(인생 여정을 걸어가며), 학교에 가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집을 구입하는 등 온갖 인생 경험을 한 뒤 마지막에는 은퇴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임이다.
  

'인생게임' 보드판 ⓒ 김수진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던가. 게임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선택의 기회와 마주한다. 대학을 갈 것인가 바로 직업 전선에 뛰어들 것인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딩크족의 길을 갈 것인가, 야간학교에 진학해 직업 전환의 기회를 가질 것인가 현재의 직업을 유지할 것인가, 집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 가진 돈을 잃을 수도 있는 리스크를 무릅쓰고 한 방의 기회를 노릴 것인가 현상 유지라는 안전함을 택할 것인가, 선택에 따라 나아갈 길이 바뀌고 결과가 달라진다.

실제 삶이 그러하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떨어진 식재료가 있는데 당장 마트로 달려갈 것인가 아니면 원래 장보기로 예정돼 있는 며칠 후에 한꺼번에 살 것인가. 후자를 택했으므로 오늘 아침 오렌지주스 대신 물을 마셨고, 점심에는 냉장고 속 재료 탈탈 털어 볶음밥을 해먹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다니던 직장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며 경력을 쌓을 것인가. 전자를 택했으므로 15년 전 캐나다에서의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고 삶의 터전이 바뀌었다.

어른들이 권하는대로 부잣집 남자와 선을 볼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남자와의 만남을 이어갈 것인가. 후자를 택했으므로 부자로 살지는 못할 망정 서로의 부족함 메꿔주는 영혼의 단짝과 함께 죽는 날까지 고고씽 할 예정이다.

당장 장을 봤다면 좀 더 풍성하고 화려한 점심식사를 할 수 있었을까? 대신 냉장고 한구석에서 어떤 재료는 썩어갔을지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 계속 직장 생활을 했더라면 나는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어 승승장구했을까? 만년대리로 남거나 중간에 해고되어 다른 직업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부잣집 남자와 선을 봤더라면 강남 사모님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었을까? 사랑하던 남자를 그리워하며 '뭣이 중헌디' 하고 있었을지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작은 순간의 선택도 있고 인생의 물길을 틀어놓을 만큼 커다란 선택도 있다. 크고 작은 수많은 선택들이 모여 삶을 이루고 그러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수, 꼭 그만큼의 다양한 삶의 면면이 존재한다. 만족할 만한 선택만 이어진다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 그러나 후회스런 선택을 했다고 해서 보드판을 거꾸로 거슬러갈 수 없듯 인생길 역시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

택함을 받지 못한 다른 선택지들이 잃어버린 기회비용을 흔들어보이며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어' 외치는 순간이 있다 해도 그뿐이다. 각각의 선택으로 채워져가는 미완성의 퍼즐판을 안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실패의 경험이 환골탈태하여 남은 여정에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인생게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보드판을 전진하면서 종종 '액션카드'를 뒤집어 다양한 인생사를 경험하게 된다. 회사에서 보너스를 받고 승진을 하거나 혹은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스케이트보딩 대회에 나가 상금을 타는 행운도 있고, 소송을 걸어야 하는 불운도 있다. 가족을 위해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홈시어터로 집을 꾸민다. 가끔은 여유를 부려 값비싼 옷 한 벌쯤 사입기도 하고 파리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갖가지 인생사가 적힌 '액션카드'를 뒤집을 때마다 농담이 오가고 웃음이 번진다.

내 인생도, 내 아이들의 인생도 그랬으면 한다. 살다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거라고, 당연히 받아들이고 농담과 웃음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을 만큼 행복추구는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자 권리이지만, 행복이 그 자체로 목표가 될 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행복만을 바라보는 인생은 필연적으로 찾아드는 불행이란 불청객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라면 빨리 떠나주기를 바라며 쫓는 방법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좋고 나쁜 모든 일들이 그저 살면서 겪게 되는 일이라 여기며, 좋은 일은 온 마음으로 기꺼워하고 고달픈 일은 사랑하는 이들 손잡고 묵묵히 감내하면서 걷다보면 행복이 땀방울처럼 맺히는 그런 삶이면 좋겠다.

'하하호호' 우리 가족에게 웃음을 준 이 게임, 그런데 줄곧 마음 한켠을 불편케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의 정체는 뭐였을까? '인생게임'의 목적, 즉 이 보드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방법이 설명서에 아주 간단히 적혀 있었다.

"모두가 은퇴했을 때, 가장 부자인 사람이 이깁니다!"

아, 가장 돈이 많은 사람! 많은 보드게임들이 마지막에 돈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이기는 포맷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인생'이란 말을 달고 있어서일까? 결국 '인생의 승자란 곧 부자'라는 공식을 당연한 듯 들이미는 것 같아 개운치가 않다.

게임상의 직업을 선택할 때도 목표인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수가 높은 직업을 택해야 한다. 선택지가 주어지지만 직업명 따윈 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숫자로 표시되는 보수 뿐이다.

캠퍼스 커플로 만난 남편과 나는 일명 '굶는 과'를 나왔다. '국문과' 나오면 '굶는다'고 '굶는 과'라고들 불렀다. 하고 많은 전공 중에 왜 하필이면 '굶는 과'를 택했을까.

어려서부터 읽고 쓰는 게 즐거웠다. 어릴 땐 책 속에 꼭 보물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언제나 국어였고 정신없는 고3 수험생일 때도 국어시간에 맘에 드는 시구를 발견하면 적어놓고 보고 또 봤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명예를 동시에 이루며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저런 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내 전공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아마 또다시 '굶는 과'를 지원할 것이다.

대학 생활 내내 배움이 즐거웠고 졸업 후에도 관련된 일을 하며 기억에 남는 직장생활을 했다. 좋은 수저 물고 태어나지 못했고 '굶는 과'를 나온 남편과 나는, 그러나 지금껏 굶은 적 없고 우리 기준으로(남들 기준엔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행복의 기준은 '나'니까) 꽤 행복하다. 그러니 내 아이들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너희는 적어도 백세까진 살 텐데 그 긴 세월을 돈 더 벌자고 하기 싫은 일 하며 살지는 않길 바라. 돈 많이 버는 직업이 바람과도 일치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큰집에 들어앉아 찌푸리며 사느니 작은 집에 살면서 미소짓는 게 낫지 않을까? 돈이 행복의 기준이 되면 돈을 잃을지도 모르는 어느 날(그런 날은 예고없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단다) 행복도 함께 잃겠지만, 진정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행복의 기준이 되면 그 가치로 인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거야."

고작 보드게임 한판으로 생각이 참 많이도 길어졌다. 돈의 가치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니 오히려 반대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돈의 가치를 충분히 깨닫고 현명한 관리자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돈이 목표가 되는, 행복이 목표가 되는 삶을 살지는 않았으면 한다.

순간순간 마주하게 되는 선택지들 앞에서 마음 가운데 굳건히 선 가치를 바탕으로 인생길을 걸어가면 좋겠다. 때론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후회스런 선택을 하게 될 때도 있겠지만, 그 모든 날들을 씨줄과 날줄처럼 곱게 엮어낼 줄 아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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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째 손 맞잡고 함께 걷는 한 남자, 그리고 꽃같고 별같은 세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 런던에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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