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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흑인 시위 보도는 우리에게도 해롭다

[언론개혁 15] 미국 백인 관점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상당수 한국언론

등록 2020.06.02 07:16수정 2020.06.02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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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가혹 행위로 숨진 것을 애도하는 미국 미니애폴리스 주민들이 31일(현지시간) 그가 경찰에 연행됐던 현장에 마련된 임시 추모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미국은 인권을 가장 많이 부르짖는 나라다. 유엔 인권이사회를 앞세워 외국에 대한 압박도 많이 가한다. 또 민주주의가 가장 많이 발달한 나라로도 인식되고 있다. 이런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인권탄압 중 하나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시에서 46세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짓눌려 질식사한 사건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번보다 훨씬 더 참혹한 유형, 이를테면 비무장한 흑인 피의자가 백인 경찰에게 이유도 없이 총을 맞는 장면도 결코 낯설지 않다.

미국은 수사나 체포의 적법절차를 특히 중시하는 나라다. 1963년에 18세 소녀를 납치하고 강간한 혐의로 체포돼 애리조나 주 법원에서 납치죄 20년 및 강간죄 30년형을 선고받은 에르네스토 미란다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미란다가 체포 및 수사 과정에서 변호인 조력권과 진술거부권을 보장받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피해자도 미란다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미란다 자신도 범행을 자백했다. 그런데도 연방대법원은 적법절차 위반을 이유로 자백의 증거능력(증거로서의 자격)을 부인했다. 이로 인해 확립된 미란다 원칙의 영향을 받아, 태평양 건너 대한민국 경찰도 헌법 제12조 제5항에 따라 체포 또는 구속의 사유와 변호인 선임권 등을 체포·구속 현장에서 고지하고 있다.

이처럼 적법절차 원칙을 특히 중시하는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불법·부당한 사법적 처우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이럴 때마다 백인 경찰이 단골 가해자로 등장하고 있다. 적법절차원칙이 백인들에만 '특히 중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남북전쟁(1861~1865)에서 북군이 승리한 게 벌써 155년 전이건만, 미국 흑인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와중인데도 미 전역에서 흑인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이들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를 짐작게 하기에 충분하다.

백인 경찰의 총을 맞고 쓰러진 흑인은 독립운동하던 투사가 아니다. 인권운동이나 반체제운동 투사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반미운동 하던 사람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시민이다. 그런 이들이 전시나 비상시도 아닌 평상시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총을 맞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제국주의 지배자가 식민지 주민을 다루는 모습이 연상되는 게 그리 부자연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일탈에 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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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트윗. "어젯밤 미니애폴리스의 폭도들 중 80%는 주 외부에서 왔다." ⓒ 트위터 갈무리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중학생(고등보통학교생) 박기옥 등에 대한 성추행으로 빚어진 한·일 중학생 집단 싸움을 일본 경찰이 편파적으로 처리한 일로 인해 벌어졌다. 전국적 시위로 확대된 이 운동은 1919년 3·1운동 및 1926년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항쟁으로 기억된다.

이번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규모나 파장 면에서 광주학생운동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3대 항쟁'이 미국에서는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1984년의 이른바 'LA 흑인 폭동'뿐만 아니다. 총기 난사와 더불어 흑인 차별은 오늘날에도 TV 뉴스의 단골 소재다. 미국에서 인권탄압이 얼마나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지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니 흑인들이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며 시위를 벌이는 것은 당연하고도 이해될 만하다. 시위대 일부가 상점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히 나쁜 일이지만, 이런 일부의 일탈로 희석될 수 없을 정도로 이번 시위는 정당성과 명분을 갖고 있다. 불법·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한마디 않고 그저 참는다면 그게 오히려 비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주류 백인과 미국 정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 경찰의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흑인 시위에 대해 몰이해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현지 시각으로 5월 30일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고 연방군 투입을 예고했다. 또 "폭도의 80%는 주 외부에서 왔다"며 시위의 순수성을 폄하했다. 급진 좌파의 조종을 받는 반체제 시위라는 게 그의 인식이다.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이 같은 반응은 트럼프뿐 아니라 연방정부 및 주 정부에서도 큰 차이 없이 나타나고 있다.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는 동시에, 시위대가 외부의 조종을 받는다는 선전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다. 시위의 순수성을 떨어트리고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며 대중과 시위대를 이간하고자 할 때 흔히 구사하는 방식이다.

애석한 것은 상당수 한국 언론이 이런 트럼프식 관점을 국내에 유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흑인 시위가 인종차별에 기인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흑인 시위를 폭력 시위나 폭동으로 규정하는 미국 백인의 시각을 국내에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흑인 시위의 본질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시위대 일부의 일탈에 초점을 맞추고 본질을 호도하는 보도가 최근 한국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희석된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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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자 <조선일보> 기사 ⓒ 조선일보

 
일례로, 5월 31일자 <조선일보> 기사 '구찌 가방·빅시 속옷 약탈까지···미전역으로 번지는 시위' 역시 그런 보도에 속한다. 이 기사 역시 흑인 시위가 백인 경찰의 강압적 체포로 인해 빚어졌으며 폭력 시위가 일부 시위대에 국한됐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사건의 본질을 희석시키며 흑인들에게 불리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위의 기사를 읽는 <조선일보> 독자들은 흑인 시위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제목도 그렇거니와 부제목 역시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3행으로 구성된 부제는 이렇다.
 
흑인 남성 플로이드 사건에
30개 이상의 도시에서 시위
LA 비버리힐즈서도 상점 약탈
 
제목과 부제를 통해 미국 곳곳에서 상점 약탈이 벌어지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 뒤, 백인 경찰의 강압적 체포와 '일부' 시위대의 일탈을 짤막하게 언급한 다음, 시위대의 일탈을 또다시 상세히 보도했다.

독자로서는 '애초에는 백인 경찰의 잘못으로 사건이 발생했지만, 흑인들의 폭력과 부도덕으로 사태가 확산되고 있다'는 인상을 갖기 쉬워진다. 위 기사는 "일각에서는 시위대의 약탈도 벌어졌다"고 한 뒤,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시위대는 로스앤젤레스 베버리힐즈에 있는 노드스트롬 백화점과 구찌·알렉산더맥퀸 등 명품 매장을 털었다.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유리 출입구는 깨졌고, 명품 매장들의 창문에는 '부자들을 없애자(Eat the Rich)', '자본주의 망해라(F*** Capitalism)' 등의 문구가 적혔다. 이밖에 아디다스, 스타벅스, 닥터마틴스, 홀푸즈, CVS 등의 매장도 시위대의 표적이 됐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수십 명의 약탈자들이 아디다스 매장으로 들어가 파란색 신발 상자를 들고 달아났다'며 '빈 신발 상자와 유리 파편들이 상점 앞 보도에 흩뿌려졌다'고 전했다. 로스엔젤레스뿐만 아니라 포틀랜드, 시애틀, 필라델피아 등지에서도 상점 약탈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백인 경찰도 나쁘지만 흑인 시위대는 더 나쁘다'는 인상을 조장하는 이 같은 보도가 <조선일보> 같은 보수 언론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중립적인 YTN 보도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일례로, 5월 31일자 뉴스 '흑인 사망, 미 폭력 시위 나흘째 이어져... 약탈·방화로 피해 눈덩이'는 앵커의 도입부 발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평화적으로 시작된 시위는 어둠이 내리며 다시 방화, 약탈극으로 변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가해 경찰관은 3급 살인과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가해 경찰관이 처벌을 받았는데도 약탈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고 말한 뒤, "여러분의 도시를 불태우거나 약탈하는 것은 명예롭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습니다"라는 제이콥 프레이 미니애폴리스 시장의 인터뷰를 비춰준 다음, "밤사이 폭도로 변한 시위 군중들이 방화, 약탈을 하며 휩쓸고 지나간 현장입니다"라고 말했다.

유해한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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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에 분노한 시위대가 29일(현지시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시위 현장에 배치된 주 방위군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 AP=연합뉴스

 
상당수 한국 언론이 이렇게 보도하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도 문제지만, 폭력 시위를 벌이는 흑인들의 과잉대응도 문제'라는 양비론적 인식을 갖기 쉽다. 이런 인식은 '흑인들이 참고 살아야지 어쩌겠냐'는 현실 인정론으로 이어지기도 어렵지 않다.

이 같은 보도들은 여러모로 유해하다. 우선, 흑인 차별을 비롯한 미국 인권 문제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힘들게 만든다. 횃불을 든 '자유의 여신상'의 나라에서 비인간적이고 전근대적인 인권탄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둔감해지도록 만든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연상케 할 만한 인식 상의 오류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이 백인 경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모습이 TV 화면에 자주 보도되는 데도 상당수 한국인은 이를 인종 문제로만 생각할 뿐 인권 문제로는 인식하지 못한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 주민을 다룰 때나 있었을 법한 인권침해가 21세기 세계 중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다. 미국 백인의 관점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는 상당수 한국언론의 보도 태도가 이런 문제점을 낳은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흑인 차별이 곧 인권 문제라는 너무도 지당한 결론이 곧잘 은폐됨에 따라, 미국의 세계전략 중 하나인 인권외교에 대해서도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권탄압을 방조 혹은 조장하는 미국 정부가 중국·홍콩·북한 등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에 대해 제대로 된 비판의식을 갖기 힘들게 만든다.

약자인 흑인을 도리어 '악자'로 모는 이 같은 보도가 되풀이된다면, 결과적으로 한국의 서민 대중 역시 피해를 피하기 어렵게 된다. 이런 보도는 한국 내 인권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조성하는 데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노동 탄압의 피해자나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이 파업이나 시위를 벌일 때마다 보수 언론이 보여주는 태도 역시 흑인 시위에 대한 언론보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흑인 시위에 대한 잘못된 보도 태도를 방치하는 것은, 우리의 인권 문제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의 인권 의식을 저해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흑인시위에 대해 한국 언론들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유익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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