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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자'를 시험에 들게 만든 상황, 그리고 사람

[넘버링 무비 175]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근본주의자>

20.06.02 10:58최종업데이트20.06.0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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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기자말]
*올해 열릴 예정이었던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코로나 19' 사태를 맞아 기존의 운영 방식을 변경했습니다. 이에 5월 28일(목)부터 6월 6일까지 열흘에 걸쳐 영화제 상영 예정이었던 작품들을 온라인 OTT 플랫폼인 'wavve'를 통해 유료 상영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www.jiff.or.kr)을 참고바랍니다.
 

▲ 영화 <근본주의자> 스틸컷 영화 <근본주의자>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1.
승환(백승환 분)은 연예인 민재(신민재 분)의 매니저였다. 집 근처 작은 교회에 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적으로 따르고, 어떤 상황에서도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승환은 이를 대단히 못마땅해 하던 민재와의 충돌,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일을 그만두게 된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의 붕어빵 장사를 물려받게 된다. 원래도 꽤나 잘 팔렸던 탓인지 그의 고집스런 성격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렴 붕어빵은 꽤 괜찮다는 소문이 나고 단골도 생긴다.

진주(이진주 분)는 승환의 붕어빵 트럭 근처의 식당에서 일을 한다. 손님 하나 오지 않는 식당의 주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머리를 조아려야 할 정도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 모두 카드 빚 때문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돈을 구하기는 어려운 상황. 빚을 갚기 위해 지인으로부터 남자 하나를 소개받게 된다. 잘 차려 입은 남자와의 첫 만남. 그 밤의 헤어지던 순간에 진주는 남자로부터 이상한 제안을 받게 된다.

02.
영화 <근본주의자>는 승환이 진주를 마음에 품으면서 일어나는 헤프닝을 그린 작품이다. 두 남녀의 엇갈린 사랑이야기. 가난한 한 남자의 순정과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여자의 시대 착오적인 순애보다. 하지만, 고봉수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관계가 아닌, 그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한 사람의 성향과 그 성향으로 인해 발생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이야기. 바로 이 작품의 타이틀이자 중심 인물인 승환을 묘사할 단어, 근본주의자다.

특정 사회나 문화 속에는 그에 속한 구성원들이 합의한 규칙과 원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에 맞게 자연스럽게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그 경계에 머물며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 대립하는 집단은 보수적 성향을 갖고 변화에 반대하는 쪽과 진보적 성향을 갖고 변화에 찬성하는 쪽으로 나뉘게 된다. 여기에서의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 개념이 아닌,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다. 어떤 선택이 더 나은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자신이 믿고 있는 방향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 중에서도, 교리나 이념의 근본으로 돌아가 처음의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을 우리는 근본주의자라고 부른다.
 

▲ 영화 <근본주의자> 스틸컷 영화 <근본주의자>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3.
지켜야 할 것이 많을 것이므로 아무래도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삶의 모든 순간에 설정해 놓은 규칙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순간에도 넘어가지 않도록 그어놓은 금과도 같다. 영화 속 승환도 마찬가지다. 일단 하느님을 섬기는 이로써 성경과 교리를 통해 배운 것들, 술을 마시지 않고 방탕하게 살지 말라는 것들이 이에 해당된다. 담배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타락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배척하고자 한다. 민재가 승환을 고깝게 생각했던 것 역시 그런 부분들 때문이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나오고, 아무리 급해도 규정 속도를 지키는 일만 고집했으니 말이다. 융통성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그런 그의 삶에 진주가 나타나게 된 것은 그의 입장에서 큰 사건과도 같다.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 외에 그 세상을 품기 위해서는 그동안 자신이 설정해 놓은 금들을 스스로 깨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들을 부여 받게 될 테니 말이다. 아주 가볍게는 이전에 자신이 하지 않았던 일들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도 마주하게 된다. 진주가 일하는 식당에서 그녀의 걸레질을 보고 승환이 자신의 먹은 자리를 깨끗이 치우도록 만드는 것, 그게 사랑이니 말이다. 물론,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전혀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그리고 고봉수 감독은 극 중 승환에게 안타까우면서도 결정적인 딜레마를 하나 던진다. 승환이 진주가 안고 있는 빚의 존재와 그녀의 곁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이상한 남자(고주환 분)의 실체를 알도록 하는 것. 이제 막 붕어빵 장사를 시작한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겨우 소화제 하나를 건네는 것뿐이고, 진주와 만남을 시도하는 남자는 자신과 견줄 수 없을 정도의 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니 그의 내면적인 갈등은 점차 불어날 수밖에 없다.
 

▲ 영화 <근본주의자> 스틸컷 영화 <근본주의자>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04.
근본주의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남자와 그가 마음을 두고 있는 여자. 그 여자는 남자가 신경이 쓰일 법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는 간단한 설정으로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과 이를 어떻게 해소하는가 하는 방식의 문제다.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경계들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들. 소위 상식이라 불리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들을 '근본주의자'라는 다소 극단적일 수 있는 모델을 통해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몇 가지 사례는 다음과 같다.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자 할 때 그 경계를 넘어가는 일의 방식. 합의되어 있는 사회적 규범을 침범하지 않고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때 보이는 개인의 행동.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교환은 어디까지 가능할 수 있는지. 개인의 감정을 외부로 표현하는 일에 적절한 정도와 방식의 문제. 그리고 모든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고 개입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05.
영화 <델타 보이즈>(2016)와 <튼튼이의 모험>(2017), <다영씨>(2018) 등의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주국제영화제와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고봉수 감독. 올해도 신작 <근본주의자>를 통해 관객들에게 깊이 있는 물음을 던진다. 61분의 다소 짧은 길이의 작품이지만 그의 기존 작품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소위 고봉수 사단이라고 불리는 그의 동료들과의 협업은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신만의 원칙과 규칙을 갖고 살아간다. 작게는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습관이나 행동 순서일 수도 있고, 조금 더 크게는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나 특정 상황에 반응하는 방법과 정도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전자의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다. 어떤 원칙의 결과가 개인의 선을 넘지 않는 경우에는 일부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외부적인 충돌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인의 원칙이 타인의 것과 함께 나아가야 할 때 발생한다. 도로 위를 주행하는 자동차처럼 그나마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안정을 이룰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서로 다른 방향성과 이질적인 기질로 인해 균형은 유지될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 승환은 러닝 타임 내내 고민하던 담배 한 갑을 벤치에 두고 어디론가로 향한다. 예전과 달리 말쑥한 차림에 표정도 한껏 고취된 모습이다.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진주와의 관계는 어떻게 발전하게 되는지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지켜봐 온 관객이라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금은 바뀌어 갈 그의 미래를 말이다.
전주국제영화제 영화 근본주의자 고봉수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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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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