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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룸은 성범죄나 화재 예방 안 됩니다.... 19만원 차이

[청년 주거 안전 보고서 1] '안전 빈부격차' 안전도 돈으로 사야 하나요

등록 2020.06.13 11:50수정 2020.06.1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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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 2019년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주거 안전 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올랐다. 위험의 불씨는 지금 가난한 청년들의 방을 향하고 있다. 청년 1인 가구 절반이 21세기형 단칸방인 원룸에 산다. 평균 계약 기간은 1년 반. 방 한 칸에 잠시 머무르는 청년들에게 안전은 사치다. 취재팀은 청년 주거 안전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와 함께 화재·범죄 영역의 안전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예비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의 원룸 수요가 몰리는 2월, 체크리스트를 기준으로 76곳의 원룸을 살폈다.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청년들의 안전에 대한 인식도 들어봤다. 방값이 쌀수록 주거 위험은 커졌지만 청년들은 돈이 없어 안전한 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사각지대에 있는 '청년 주거 안전'을 조명한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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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등급별 평균 월세를 그래프로 시각화했다. 안전지수 상 등급을 받은 원룸들과 하 등급을 받은 원룸들의 평균 월세 격차는 19만7000원으로 나왔다. 월세 평균값은 전세를 제외하고 66곳만 따져 계산했다. ⓒ 서현정

 
"스프링클러? 그런 거 있는 집 가려면 50만 원은 줘야지."

지난 2월 13일 서울 신림역 인근의 B 부동산. 이곳에서 30년간 중개업을 했다는 공인중개사 강모(68)씨는 스프링클러라는 말에 손을 내저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원룸을 구하는 사람에겐 무리란 의미였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대 청년 10명 중 6명은 월세로 산다. 청년들이 살 곳을 마련할 때 가장 흔히 찾는 주거형태가 원룸이지만 지친 몸을 누이고 세간살이를 부려놓을 한 뼘 공간에 안전이라는 옵션을 얹기 위해선 결국 돈이 필요했다.

취재팀은 전문가와 함께 안전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2월 3일부터 3월 6일까지 청년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림동을 비롯해 대학가 원룸 76곳의 안전 설비 실태를 확인했다. 이 중 37곳은 취재팀이 직접 살펴봤고, 39곳은 거주하는 청년들이 직접 안전 정도를 따져봤다.

안전리스트 작성을 위해 소방청에서 관리하는 다중이용업소법 시행규칙 중 '안전시설 등 세부 점검표'와 경찰청에서 발표한 '범죄예방 환경디자인(CPTED) 적용한 원룸 방범 인증제 추진계획'의 평가항목을 참고했다.

안전리스트는 화재예방과 범죄예방 부문으로 나뉘어 총 15개 문항으로 구성돼 있다. 화재예방 부문에서는 스프링클러, 소화기, 단독경보형 감지기 등을, 범죄예방 부문에서는 CCTV, 방범창, 조명 등 안전시설의 유무를 점검하도록 했다. 이 리스트의 화재 영역은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가, 범죄 영역은 박준휘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검수했다.
     
안전한 방 월세 19만 원 더 비싸… 안전지수 만점은 1곳뿐

살펴본 원룸 76곳 중 안전 설비를 모두 갖춘 방은 겨우 한 곳에 불과했다. 전체 15개 평가항목 중 안전시설이 있거나 안전을 해치는 시설이 없다고 답한 항목의 개수를 세고 그 비율을 따져 최종적으로 각 원룸의 안전지수를 계산했다.


조사 대상 원룸의 평균 안전지수는 64점이었다. 안전지수에 따라 80점 이상은 상, 40점 이상~80점 미만은 중, 40점 미만은 하로 안전등급을 나누어 살펴봤다. 전체 76개 원룸의 57.8%(44곳)가 중간 등급의 안전도를 보였고 상 등급의 원룸은 전체의 30.2%(23곳)였다. 안전 낙제점인 하 등급을 받은 곳도 9개(12%)나 됐는데 이 중 최하점(13.33)을 받은 원룸의 경우 필수 안전 설비 15개 가운데 13개가 없었다.

값싼 방일수록 안전등급은 낮았다. 안전지수 상 등급의 평균 월세는 62만7000원, 중 등급은 47만9000원, 하 등급은 43만 원이었다. 형사정책연구원 박준휘 연구위원은 "유전무피 무전유피(有錢無被 無錢有被) 현상"이라고 평했다. 소득이 낮을수록 사건 사고와 그에 따른 피해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박 연구위원은 "안전은 공공재인데 소득에 따라 안전수준이 달라지고 있다. 안전이 일종의 사적 재화가 된 셈이다"라고 말했다.

취재팀은 지난 2월 3일부터 2월 15일까지 2주간 서울 신림역 근방에 있는 원룸 37개를 직접 돌아다니며 화재 및 범죄와 관련한 안전 실태를 확인했다. 신림동이 속한 서울시 관악구는 2030세대 인구 비중이 여성 37.7%, 남성 40.2%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대피로 확보가 안 돼 있고 안전 설비가 갖춰지지 않아 위험에 노출된 신림동 ㄱ원룸 ⓒ 서현정·임민정

 
지난 2월 13일 찾은 신림로68길의 'ㄱ원룸' 공동 현관이 열려 있었다. 계단 폭은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정도. 1평 남짓한 반지하 복도엔 상자 열다섯 개, 비닐우산, 카트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소방청에 따르면 불이 날 때 신속하게 대피하기 위해 평상시 대피로를 비워놔야 한다.

반지하 복도 천장엔 스프링클러와 단독경보형 감지기가 없었다. 공인중개사는 B03호로 안내했다. 방안에 들어서니 복도와 마찬가지로 천장에 소화설비가 없었고 이 방의 유일한 창문은 창살 없이 지면과 맞닿아 있었다. 마른 체격의 성인이라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어 침입의 위험이 있었다.

ㄱ원룸의 안전지수는 35점. 방값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 원, 관리비는 2만 원이었다. 1층 계단 밑에 소화기가 있었지만 생산 연도가 1996년이라 소화기 사용 연한인 10년을 훌쩍 넘겼다. 낡은 소화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폭발 위험이 있다.

지난 2월 3일 남부순환로187길에 있는 'ㄴ원룸'을 찾았다. ㄴ원룸의 방값은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70만 원, 관리비는 12만 원으로 ㄱ원룸의 두 배였고 안전지수도 79점으로 ㄱ원룸의 두 배를 뛰어넘는 수치였다.

ㄴ원룸의 건물 바깥엔 'CCTV 작동 중'이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가스 배관은 창문과 1m 이상 떨어져 있어 외부인이 침입할 수 없는 구조였다. 동행한 공인중개사가 전자키 비밀번호를 누르자 공동 현관이 열렸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엔 4 분할된 CCTV 화면 모니터가 걸려 있었다.

복도 천장에 스프링클러 2개, 301호 현관문 옆에 소화기 1개, 방 안에 단독경보형 감지기 1개, 건물 1층엔 화재 수신기가 설치돼 있었고 수신기 버튼마다 방 호수를 표시하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공인중개사 이모씨는 "(집주인이) 살려고 만든 집이라 공을 많이 들였다. 이런 집이 많지는 않다"고 말했다.

안전 빈부격차 법으로도 좁힐 수 없어… 강제성 없어 제자리걸음
 

주거지의 합법 여부를 따질 수 있도록 안전시설 관련 법률을 모았다. 건축법상 주택 유형과 건축 연도에 따라 법이 적용되는 내용을 설비별로 나눠 정리했다. ⓒ 서현정·임민정

 
원룸에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많지만 안전 설비를 갖추지 않아도 법에 처벌조항이 없거나 법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소방시설법 8조 1항은 아파트와 기숙사를 제외한 공동주택과 단독주택은 단독경보형 감지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없어 설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살펴본 원룸 76곳 중 30곳(39.5%)의 방엔 단독경보형 감지기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모두 불법이지만 법에 강제성이 없는 탓에 세입자는 위험에 노출된 셈이다.

법에 강제성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허점도 많다. 소방시설법에 따르면 바닥면적이 33m²(약 10평) 이하로 구획된 건물은 방마다 소화기를 둬야 하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보통 10평 미만으로 지어지는 원룸에 소화기가 없어도 불법이 아닌 셈이다. 안전리스트로 점검한 76개 원룸 중 53곳(69.8%)엔 방에 소화기가 없었다.

스프링클러 역시 2018년 이후에 지어진 6층 이상 건물에만 설치하면 된다는 규정 탓에 5층 이하 건물과 개정안 시행 전에 지어진 건물은 의무대상에서 제외된다. 76개 원룸 중 복도에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원룸은 42곳(55.3%)이었지만 건축물대장에서 건축 허가일을 기준으로 위법 여부를 따져보니 이 중 단 한 곳만이 불법(2019년 허가)에 해당했다.

범죄예방 건축기준 고시에 따르면 원룸, 오피스텔 등 다세대 주택은 가스 배관을 통해 외부인이 침입할 수 없도록 지어야 한다. 그러나 작년에서야 법이 개정돼 2019년 7월 이후 허가받은 건물에만 이 기준이 적용될 뿐 이전에 지어진 건물엔 안전 설비를 강제할 수 없다.

결국 안전 설비가 없어 위험에 노출돼 있지만 불법은 아닌 셈이다. 관악구 관계자는 "법에 없는 내용을 강제할 순 없다"며 "개별 소유 건물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소유자가 관리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살펴본 76곳 원룸에 설치된 안전 설비별 설치비율. 방화문 항목에선 방화문이 없는 22곳은 개폐 여부를 따질 수 없어 제외했다. ⓒ 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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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주거 안전 보고서 3] 안전은 뒷전인 원룸 시장… '안전 강화=투자'로 인식해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뉴스통신진흥회가 주관한 제2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사업에서 '유전무피 무전유피(有錢無被 無錢有被) 방값이 싸질수록 위험도 커지는 청년 주거안전 빈부격차'라는 제목으로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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