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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우동국물 들이붓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납북어부 윤질규 간첩조작사건

등록 2020.06.11 07:52수정 2020.06.11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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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어부는 간첩 조작 단골 대상이었다.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인천항에 귀환한 어선 제37, 38 태양호 어부들. 1989.2.12 ⓒ 연합뉴스

 
어부 윤질규(1956년 생)는 지난 1976년 8월 30일 동해상에서 오징어잡이를 나갔다 돌아오던 중 배가 풍랑으로 표류해 북한경비정에 의해 강제로 피랍되었다. 40여 일이 지난 그해 10월 15일 그는 다른 선원 22명과 함께 속초항으로 귀환했다. 귀환 후 그는 박정희 정권의 국가기관에서 합동심문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 다시 생업인 어업에 종사하며 조용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7년의 세월이 흘러 1983년이 되었다. 그동안 박정희는 측근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고 전두환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윤질규는 평소에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삶을 살던 터라 정치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의 삶은 어부로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던 1983년 12월 2일 추운 겨울밤, 잠을 청하고 누워 있던 그의 집에 갑자기 경찰 3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윤질규에게 다짜고짜 수갑을 채운 뒤 거칠게 그를 경찰서로 연행해갔다.

경찰의 고문

윤질규는 지난 2010년 필자가 한 때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당시를 이렇게 진술했다.
 
그물을 담는 큰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는 그 물통 앞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으라고 하더니 내 머리를 뒤에서 누르면서 담갔다가 빼냈다가를 반복하면서 북한을 찬양하고 군사기밀을 탐지·수집했다고 자백을 하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물을 엄청나게 먹었다. 그리고 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때리더니 어쩔 때는 몽둥이를 오금지(오금)에 끼우고 꿇어앉게 한 다음 위에서 허벅지를 밟았다. 그러면 걷지도 못한다.

또 우동을 시켜주고 국물은 남기라고 하더니 나를 벽 쪽에 데리고 가서 서라고 한 다음 두 명의 형사가 나의 팔을 붙들고 한 명은 얼굴에 가제 수건을 씌운 후 그 위에 우동 국물을 붓기도 했다. 코로 우동 국물이 들어오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을 한 번 재우지 않기 시작하면 3~4일 동안 계속 재우지 않았는데 그러면 비몽사몽이 되어 그 사람들이 물으면 무조건 '예' 하고 대답을 하게 된다. 조서에 지장만은 찍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다시 엄청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간첩이 되지 않으려고 버티었지만 경찰관이 내 손을 끌어다 강제로 지장을 찍었다.
 
또한 윤질규는 진실위에서 지난 1976년 납북 귀환 후 국가기관에서 합동심문을 받고나서 그 후 1983년 경찰에서 고문조사 받을 때까지를 이렇게 회상했다.
 
(납북) 귀환 후 합동심문시 나를 수사한 경찰관들은 '석방되어 밖에 나가면 절대로 북한에 대한 말을 하지 말아라, 만약 북한에 대한 말을 하면 구속시킨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석방된 후 누구에게도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궁금하다며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는데 내가 친구들에게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어느 기관에서 잡아갈지 모른다'고 말해주었더니 친구들은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그래서 (1983년 강제연행 되었을 때) 경찰관들에게 (1976년 이후) '친구들에게 북한에 대한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경찰관들은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기도 했으며 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때렸다. 그리고는 내가 친구들에게 북한에 대해 한 말이라며 자기들이 적어온 것을 가져와 그대로 말을 하도록 시키더니 이어서 그것을 외우라고 했다. 외우지 못하면 다시 죽도록 맞았다.
 
윤질규는 또 진실위에서 1983년 경찰에서 조사 받으면서 1976년 납북 귀한 후 또 다른 납북 귀환 어부 "안아무개에게 (북한을 찬양하는)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으나 당시 경찰관들의 구타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그러한 말을 했다고 허위자백 한 것이다. 그리고 안아무개라는 분은 나보다 먼저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납북 귀환 어부이고 그 사람의 사위는 납북되었다가 귀환하지 않은 사람이다. 안 아무개가 나보다 더 오랫동안 북한에 납북되어 있었는데 내가 뭐 하러 그 사람에게 북한이 좋더라는 말을 하겠는가"라고 진술했다.


허위 자백 

윤질규는 자신이 '간첩'이고 '북한을 찬양'했다는 1983년 당시 경찰의 주장은 전부 거짓이라며 진실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모두 (당시) 경찰관들이 조작해 거짓말로 자백하도록 해서 만들어 낸 것이다. 친한 친구들에게도 북한이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북한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경찰에서 주장하는) 조아무개에게 내가 왜 그러한 말을 하겠는가. 다 경찰관들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 한 것이다.

1983년 당시 '윤질규 사건'의 경찰 참고인이자 법정 증인이었던 윤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당시 자신에 대한 고성경찰서의 참고인 진술조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지금 이 내용을 읽어보니 내가 기억하는 사실과 다르고, 당시 경찰에서 내가 진술한 내용의 많은 부분이 내가 진술한 것과 좀 다르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경찰관들이 도장을 달라고 해 주었을 뿐이고 경찰관들이 다 도장을 찍었다.
 
당시 또 다른 경찰 참고인이자 법정 증인이었던 전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당시 경찰이 주장했던 이른바 윤질규의 '간첩 행위'에 대해 이렇게 부인했다.
 
1978년경 윤질규와 강아무개의 벽돌 공장에서 일할 당시 윤질규가 나에게 휴전선 전방의 초소 경비상황을 물어 알려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윤질규는) 벽돌공장에서 일한 사실도 없고, 강아무개라는 이름도 잘 모르는 이름이다. 사실은 그런 사실이 없는데, 당시 경찰에서 그 정도는 별것이 아니라 윤질규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인정하고 법정에서도 그렇게 진술했다. 내가 8번 초소에서 방위병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대해 윤질규가 나에게 해안경비초소의 경비상황을 물은 사실은 없다.
 
1983년 당시 윤질규의 지인 설아무개는 사건 당시 경찰의 요청에 의해 자신이 해 준 거짓 진술의 내용이 모두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자신은 그 후 고향을 떠나 윤질규의 소식을 몰랐는데 (2010년) 진실위의 조사과정에서 그 일(자기의 거짓진술)로 윤질규가 10년의 형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너무 놀랐다고 진술했다.

당시 또 다른 경찰 참고인이자 법정 증인이었던 윤아무개는 2010년 진실위에서 "(1983년 북한을 찬양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 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간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사실 윤질규가 납북되었다 온 후로는 경찰이 늘 윤질규를 따라붙어서 '뭐 문젯거리가 없나' 하고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에 윤질규 본인도 그랬고 우리도 조심했다. 우리도 사실 윤질규와 어울렸다가 혹시 잘못 될까 싶어서 좀 거리를 두었는데, 나는 그래도 같은 종씨고 해서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누구나 다 아는 군사기밀

또 당시 윤질규가 탐지했다는 군사기밀들에 대해 그의 지인 윤아무개와 전아무개는 진실위에서 "(그때 우리 동네) 레이더 기지는 언덕에 있어 다 보이는 것이고, 지뢰밭에서 사람이 죽기도 했기 때문에 늘 조심하라고들 서로 이야기했으며, 김일성 별장에는 소풍도 가고 하는데 중대가 있는 것이 보인다는 등의 사실은 대부분 특별히 탐지해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드나드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라고 진술했다.

윤질규는 경찰에서 위와 같이 가혹한 고문조사를 받은 뒤 1984년 1월 31일 춘천지방검찰청 속초지청으로 송치된 후 2월 25일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에 의해 간첩혐의로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 공소 제기되었다. 그는 진실위에서 당시 검사에게 조사받고 다시 경찰로 끌려와 추가로 고문 조사를 받은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경찰서에서 조사가 끝난 후 속초지청으로 조사를 받으러 갔다. 검사는 경찰에서 가져온 서류를 보면서 읽어주고는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경찰에서 고문을 받아 허위로 자백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검사는 경찰관에게 서류가 맞지 않다며 가지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다시 고성경찰서로 돌아왔다. 고성경찰서에 도착하자 경찰관은 '야 이 새끼야, 네가 다 했다고 인정을 했으면서 왜 검사에게 하지 않았다고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주먹으로 뺨을 때리고 발로 닥치는 대로 찼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경찰관이 서류뭉치를 가져오더니 거기에 지장을 찍으라고 했다. 그리고 고성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이러한 경찰과 검찰의 조사를 거쳐 1984년 10월 17일 서울고등법원 1차 공판에서 윤질규는 당시 자신이 조사받은 과정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권아무개 형사로부터 자백을 강요당해 모든 공소사실에 대해 고문에 의해 허위로 자백을 했다. 검찰에 송치된 후에도 고성경찰서에 수감된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을 검찰에서 번복하면 가족들까지 희생시키겠다고 위협을 해 피고인은 경찰에서 강요하는 대로 검사 앞에서도 허위자백을 했다. 

(참고로 당시 윤질규의 수사검사는 춘천지검강릉지청의 최병국이었다. 최병국은 지난 2000년대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인권위원장, 윤리위원장을 지냈고 그 후 자유한국당의 상임고문을 지냈다.)

윤질규는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도 경찰에서 조사받는 동안 심한 구타와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다며 이렇게 적었다.
 
속초항 출항 당시 통제소에서 제 이름을 윤정(貞)달이라고 잘못 기재한 것입니다. 피고인 역시 윤정달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지도 못한 것입니다. 다만 납치 당시 북괴들의 조서 서류에서 이름이 윤정달이라고 잘못된 것을 알았습니다. 경찰에서는 이북에서 북괴 놈들이 지어준 것이라고 끈질기고 심한 고문에 못이겨 시인하고 말았습니다. 경찰에서는 무조건 고문과 구타를 하기 때문에 시인했습니다... 형사들이 '검사님한테 가서 부인하면 법원에서 고문을 한다'면서 '부인하지 말고 시인하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부인하면 대북공작(간첩으로 만든다는 뜻- 필자 주)을 벌일 것이라면서 혼자 당하지 집안까지 못 살게 할 필요가 없다고, 대북공작을 하면 아예 세상구경을 못한다고 협박까지 하면서 항소를 포기하고 강릉에서 형을 살면 경찰에서 빨리 나오게 힘을 써주겠다고...

이렇게 가혹한 고문 조사를 거친 후 윤질규는 1984년 5월 31일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간첩 등) 및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무 말이 없다

하지만 1심 판결만 끝난 상황에서 지난 1984년 7월 18일 치안본부는 윤질규를 언론에 고정간첩이라고 발표했다. 치안본부는 윤질규가 45일간 북에 납북되어 원산 장덕산초대소에서 북한지도원으로부터 간첩교육을 받고 지령에 따라 전방지역의 군사기밀을 탐지·수집했다고 했다. 당시 신문에 윤질규의 사진과 실명이 그대로 보도되기도 했다.

윤질규는 항소했다. 하지만 1984년 11월 14일 서울고등법원은 윤질규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5년 2월 26일 대법원도 윤질규의 상고를 기각해 10년 형이 확정됐다. 윤질규는 형에 따라 복역하던 중 1991년 5월 25일 7년 만에 가석방되었다.

윤질규 사건을 조사한 진실위는 지난 2010년 사건 발생 27년 만에 이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고성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진실규명대상자 윤질규를 영장 없이 연행해 구금하고 고문, 가혹행위를 가하는 등 불법적으로 수사하고, 이후 윤질규가 장기간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건이다. 고성경찰서 정보과 수사관들이 진실규명대상자 윤질규를 54일간 불법구금 한 상태에서 고문·가혹행위를 가하며 허위자백을 강요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이는 형법 제125조의 폭행, 가혹행위죄에 해당되어 재심사유가 된다.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평생을 살아온 윤질규는 진실위 진실규명 결정을 근거로 곧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하지만 재심 신청을 하고 3개월 만인 지난 2011년 3월 그는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윤질규가 운명하고 1년 반이 지난 2012년 11월 21일 서울고법 춘천형사1부는 마침내 고인이 된 윤질규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20대의 나이에 간첩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 끝에 억울하게 7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납북어부가 29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것이다.

이날 재판부는 "윤씨가 수사관들에 의해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돼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전까지 53일간 영장없이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고 조사 도중 가혹행위가 있어 스스로 자백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부 진술만으로 범죄 사실을 증명하기 부족하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고인이 된 윤질규의 억울함은 29년 만에 풀어졌다. 하지만 당사자인 그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이승에서 함께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통하게 죽은 그는 오늘도 말이 없다. 하지만 순박한 한 젊은 20대 어부에게 가혹한 고문을 자행해 간첩으로 조작하고 인생을 망친 당시의 경찰, 검사, 판사들도 역시 아무 말이 없다.

* 이 기사를 위해 소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전명혁 박사께 감사드린다.
#윤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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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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