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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인종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근본적 이유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흑인 인권과 경제민주화

등록 2020.06.09 20:19수정 2020.06.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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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얼 레이.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1929~1968년)가 피살된 1968년 4월 4일로부터 두 달이 좀 지난 날이었다. 6월 8일인 이날, 런던 히드로공항에서 암살범이 체포됐다. 범인은 상습 강도범 출신의 탈옥수인 제임스 얼 레이(James Earl Ray, 1928~1998)였다.

레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입대했다가 군대 부적응으로 제대한 뒤, 21세 때인 1949년부터 강도를 비롯한 각종 범죄로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여러 차례 판결을 통해 도합 20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수감중이던 1967년(39세), 교도소의 빵 배달 트럭에 숨어 탈옥하는 데 성공했다.

캐나다와 멕시코까지 달아났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탈옥수답지 않은 행적들을 남겼다. 바텐더 학원도 다니고 댄스 레슨도 받았다. 또 대통령선거운동에도 참여했다. 베트남전쟁중인 1968년, 린든 존슨 행정부 하에서 대선 후보로 출마한 조지 월리스(George Corley Wallace, Jr, 1919~1998)를 돕고자 자원봉사자로 나섰다.

"흑인 차별" 백인 탈옥수 마음을 사로잡은 말

민주당원이었던 월리스는 1968년 대선운동 과정에서 당을 박차고 나갔다. 그런 뒤 극우정당인 미국독립당(American Independent Party)을 창당하고 이 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섰다. 대선에서 그의 득표율은 제3당 후보치고는 꽤 좋았다. 3위에 그치기는 했지만, 46명이나 되는 선거인을 확보했다.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이 확보한 선거인은 301명,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는 191명이었다.

월리스의 미국독립당이 극우정당으로 분류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백인 우월주의 때문이다. 이들은 흑인 차별의 철폐를 반대했다. 탈옥수 신분인 레이가 선거운동에 뛰어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월리스의 주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대선을 7개월 앞둔 1968년 4월 4일, 탈옥수 레이는 킹 목사를 향해 총을 겨눴다. 투숙 중인 모텔 2층 발코니로 킹 목사가 모습을 드러내자, 길 건너편 집을 빌려 쓰던 레이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 다음, 캐나다를 거쳐 유럽으로 달아갔다가 히드로 공항에서 체포된 것이다.


레이는 범행을 자백했다가 3일 뒤 철회했다. 자신은 거대한 음모의 희생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킹 목사 측도 그의 주장에 동조했다. 킹의 변호사는 중앙정보국(CIA)과 군부가 암살 배후일 거라고 주장했다. 킹 목사의 아들인 덱스터도 레이를 면회한 뒤 "범인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덱스터 역시 변호사와 동일한 말을 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들은 사실로 입증되지 못했다. 사법부는 레이를 범인으로 인정하고 99년형을 선고했다. 과거에도 탈옥한 경험이 있는 레이는 그 뒤 또 한번 탈옥했다. 1977년의 일이다. 하지만 다시 붙잡혔고, 1998년 4월 23일 교도소에서 만 70세로 숨을 거두었다.

킹 목사 암살을 계기로 미국 사회는 격랑에 휩싸였다. 분노한 흑인들은 16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46명이 사망하고 2만1000명 정도가 부상을 당했다. 또 2600여 곳에서 불이 타올랐다.

백인들도 애도에 동참했다. 존슨 대통령은 연방정부 청사에 조기를 게양하도록 지시하고,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킹의 장례식은 1억2천만 미국인들이 지켜볼 수 있도록 텔레비전으로 중계됐다. 그런 국가적 추모의 분위기 속에서 암살범 레이가 체포되고,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99년형을 받은 것이다.

52년 전에 이같은 홍역을 치렀지만, 미국 사회는 여전히 흑인 인권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LA 흑인 폭동'으로 불리는 1984년과 1992년의 일이 아직도 생생한데, 금년에는 코로나19 사태 와중에도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고 있다. 1984년·1992년이나 2020년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흑인이 백인 경찰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장면이 잊을 만하면 한번씩 뉴스 화면에 등장해왔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세계적인 상식이다. 미국 백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극우 정치활동을 하는 백인이 아니라면 그것을 당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흑인이 미국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8년 기준으로 13.4%다. 60.4%인 백인에 비해 압도적 열세에 놓여 있다. 이 같은 수적 열세도 흑인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만, 이것이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2%에 불과한 유대인들이 앵글로색슨족과 더불어 미국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1968년의 홍역을 치른 뒤에도 흑인 인권문제가 답보 상태에 머무는 근본 이유는 다른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특히 경제적인 요인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수적 열세보다 심각한 '경제적 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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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사건에 분노한 시위대가 지난 달 29일(현지시각)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시위 현장에 배치된 주 방위군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 AP=연합뉴스

  
헐리우드 영화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도록 만드는 멋진 인물과 삶과 배경이 등장하지만, 이는 적어도 미국 흑인들과는 크게 동떨어진 이야기다. 킹 목사보다 더 급진적이었고 그보다 3년 먼저 암살을 당한 인권운동가 말콤 엑스(맬컴 엑스, 1925~1965년)는 "나는 미국인화(化)로 피해 입은 220만 명의 흑인 중 한 명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처럼 아메리칸 드림은 대부분의 흑인들과는 무관한 이야기다.

세계인들은 남북전쟁이 1865년에 끝났으므로 미국 흑인의 지위가 획기적으로 개선돼 있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미국 흑인은 그때보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본질적 개선이 없는 환경에서 여전히 생활하고 있다. <경제와 사회> 1999년 봄호에 실린 박경태 성공회대 교수의 논문 '소수민과 노동시장: 미국 흑인의 노동시장 지위를 중심으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비록 의도적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소수민으로서의 흑인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갖는 오해는 흑인의 전반적인 지위가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과거에 비해서 나아지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백인과의 격차는 여전히 엄청난 수준에 있으며, 흑인들의 삶은 백인들에 비해 볼 때 상대적으로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이 같은 격차는 이번 시위 직전까지도 확대되고 있었다. 최근의 미국경제 호황으로부터도 흑인들이 배제돼 있었던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발행한 <국제노동브리프> 2019년 5월호는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이 분석하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흑인 노동자들은 미국의 최근 경제호황에서 가장 적은 이익을 얻었다"면서 2007년 4사분기와 2019년 1사분기 사이에 흑인들의 임금 상승률이 여타 소수인종의 상승률보다도 낮았다고 설명한다. 
 
"흑인 노동자들의 경우, 같은 기간 주간 임금의 중앙값이 700달러에서 711달러 수준으로 증가하여 단 1.6%만의 상승분만을 경험하였다. 한편, 히스패닉 노동자들은 같은 기간에 주간 중앙값 임금이 주당 619달러에서 692억 달러로 11.8% 증가하여 최근의 경제호황에서 가장 크게 수혜를 받은 인종집단이 되었다. 아시안은 10.2%(1022달러에서 1126달러), 백인은 5.7%(880달러에서 930달러) 수준의 상승을 보여 히스패닉 노동자들보다는 낮지만, 전체적인 평균보다는 높은 수준의 상승분을 기록하였다."
 
흑인들은 백인에 뒤이어 미국에 정착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보다 늦게 정착한 중남미계나 아시아계보다 낮은 대우를 받고 있다. 이 같은 흑인들의 경제적 열세가 노골적이고 명확한 제도적 차별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백인들이 주도하는, 눈에 띄지 않는 은근한 차별이 이들의 경제 상황을 압박하고 있다. 위의 박경태 교수 논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의 노동시장에서 소수민들을 배제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많은 경우 모호한 기준을 적용한다. 예를 들어서 고용주가 새로운 직원을 뽑을 때 지원한 사람이 해당하는 일에 얼마나 적합한가 하는 측면 외에도 태도·품위·직업경력·나이·결혼상태·말투·인상 등과 같은 것을 측정한다면, 이것은 특정 집단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이미 존재하는 흑인에 대한 편견을 고려하면 이런 항목들은 흑인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한다. 게다가 일단 취업이 되더라도 흑인들은 경영자나 관리자 비중이 낮기 때문에 업무능력 평가에서도 불리한 판단을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흑인들은 취업도 힘들지만, 일단 취업이 된다 해도 흑인 상사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인사고과에서도 불리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백인들의 은근한 담합에 의해 벌어지고 있고, 이것이 흑인 노동자들의 경제적 지위를 더욱 더 떨어트리고 있다는 것이다. 흑인 차별이 더욱 더 조장될 수밖에 없는 사회환경이 이런 식으로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이 미국과 유럽의 시민혁명을 주도하고 중소 지주층이 조선 건국에 이어 16세기 사림파(유림파) 개혁을 주도한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대부분의 혁명이나 사회변혁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축적한 집단에 의해 발생한다. 자신들이 보유한 경제력에 비해 자신들이 받는 사회적 대우가 낮다고 생각하는 집단이 혁신운동을 지지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한국 현대사의 경우에도 1987년 6월항쟁 직후 발생한 노동자 대투쟁이 민중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이것이 한국 민주화를 지속적으로 추동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미국 흑인들은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열악하다. '미국 빈민가' 하면 흑인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흑인들은 노예 신분에서만 벗어났을 뿐 빈곤 상태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적으로는 똑같이 1표를 가진 그들이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차별받는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이 같은 경제력의 열세에 있다. 이따금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만성적인 경제적 열세에 놓여 있다. 그래서 백인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할 만한 정치적 역량을 조직하는 데 한계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백인들의 보이지 않는 차별에 무방비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이번 시위로 '조금은' 나아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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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가혹 행위로 숨진 것을 애도하는 미국 미니애폴리스 주민들이 지난 달 31일(현지시각) 그가 경찰에 연행됐던 현장에 마련된 임시 추모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이번 시위가 진정되면, 흑인 인권은 조금은 더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흑인들의 경제적 역량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일시적 미봉책에 그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런 차별을 없애는 보다 근원적인 방법은 이들이 정치적 1표에 어울리는 경제적 1표를 갖도록 하는 일, 이들에 대한 경제적 차별을 철폐하는 일인 경제민주화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에는 흑인들의 역량이 충분치 않으므로, 미국 소수민족과 세계인들이 흑인들의 경제민주화 투쟁을 돕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한 지역에서 민중의 지위가 개선되면 주변 지역 민중의 지위에도 영향을 끼치는 패턴이 세계사에 존재하므로, 미국 흑인의 경제민주화를 위한 세계적 연대는 결국에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민중의 경제적 이익으로도 연결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해본다.
#흑인 시위 #조지 플로이드 #마틴 루터 킹 #제임스 얼 레이 #흑인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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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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