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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남녀의 '아픈' 사랑 통해 본 흑인 혐오주의

[리뷰]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20.06.09 13:34최종업데이트20.06.0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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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포스터 ⓒ 메건 엘리슨 외

 
백인들에게 흑인은 여전히 같잖은 존재다. 흑인 노예제도가 없어진 지 10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의 눈에 젊은 흑인 여성은 백인 남성의 노리갯감이고 흑인 남자는 채찍 대신 공권력을 휘둘러 순종하게 만들 수 있는 저급 인간일 뿐이다. 

1970년대 초 뉴욕 할렘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If Beale Street Could Talk)>의 이야기면서 당시 미국의 실제 상황이기도 하다. 영화는 아름답고 풋풋한 열아홉 살의 티시(키키 레인)와 스물두 살 포니(스테판 제임스)의 사랑 이야기이다.
 

▲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스틸컷 ⓒ 메건 엘리슨 외

 
수줍은 모습의 두 젊은 남녀가 함께 걸어 나온다.

"준비됐니?"

티시가 묻자 포니가 대답한다.

"내 평생 이토록 완벽하게 준비를 한 적은 없어."

둘이 얼굴을 포개고 키스를 하는 장면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그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을 차가운 유리 벽을 사이로 만나서는 안 돼"라는 티시의 목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티시와 포니는 구치소 유리를 통하여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이처럼 관객이 기대했던 사랑 이야기는 차가운 현실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그것도 티시의 임신 소식과 함께.

그 당시 미국에 사는 많은 흑인 젊은이들처럼 포니는 저지르지 않은 죄목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 유리창 너머 전화기로 티시가 전하는 임신 소식에 포니의 얼굴은 순간 당혹감에 일그러지다가 환하게 웃는다. 관객은 앞으로 그려질 티시와 포니의 고단한 사랑 이야기를 예상할 수 있다.

영화는 티시의 시선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이어지는데, 과거가 사랑스러운 커플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이야기한다면 현재는 사회의 편견에서 빚어진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티시와 포니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뒹굴고 자라 자연스레 사랑을 나누게 된 사이다. 비 오는 어느 날, 둘은 포니의 임시 거처에서 사랑을 나눈다. 천천히 아주 진지하게. 카메라는 둘의 격정적인 몸짓을 담기 보다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로를 갈망하는 표정과 몸놀림에 오랫동안 초점을 맞춘다.
 

▲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스틸컷 ⓒ 메건 엘리슨 외

 
포니가 말한다.

"나에게 익숙해지기만 하면 돼. 이제부터 나는 네 거야."

포니는 저지를 수 없는 거리와 상황에서 벌어진 강간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된다. 알리바이와 증인은 연인과 전과자라는 이유로 묵살되고 한 백인 경찰관의 어이없는 증언으로 확신범이 된다.

포니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티시와 그녀 가족의 몸부림, 티시의 절망, 가족의 위로가 관객의 가슴을 수축했다 이완시키곤 한다. 절망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딸 티시에게 엄마가 말한다.

"사랑해서 생긴 일이야. 지금까지 사랑을 믿어 왔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믿으렴."

그리고 엄마(레지나 킹)는 포니를 위하여 강간 피해자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푸에르토리코로 떠난다. 피해자의 설득에 실패라고 돌아온 엄마는 포니와 티시의 아들을 받는다.
 

▲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스틸컷 ⓒ 메건 엘리슨 외

 
구치소에서 밤잠을 못 이루는 포니, 면회 온 티시에게 이제는 목공예 예술가가 아니라 가족이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식탁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플리바게닝을 하며 현실과 타협한다. 

영화는 포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대신 티시가 유치원생 정도로 자란 아들과 함께 교도소에서 포니를 만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견고한 백인 사회가 변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면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셈이다.

다소 밋밋하다 느낄 만큼 영화는 흑인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인 장면이 없다. 흑인을 경멸하는 백인 경찰조차 총을 쏘거나 힘으로 진압하지 않는다. 대신 티시의 내레이터와 주인공들의 대화 속에서 관객은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고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이십 대가 되면서 거리에서 하나씩 사라져가는 포니의 친구들, 친구 다니엘(브라이언 헨리)의 억울한 전과, 흑인이기 때문에 싸구려 방조차 구할 수 없는 현실, 백인 남성과 여성의 고급 백화점 점원인 티시를 대하는 희롱과 무시하는 태도, 가게에서 부딪힌 백인 남성이 티시에게 추근대는 수작, 그리고 흑인 혐오주의 백인 경찰 벨(에드 스크라인)이 순간의 모욕을 포니에게 갚아주는 잔인성 등 곳곳에서 흑인들이 직면하는 삶의 위험과 고단함이 전해진다.

티시와 포니의 아버지인 조셉(콜맨 도밍고)과 프랭크(마이클 비치)의 만남에서 조셉은 그들의 박탈된 삶을 실감나게 표출한다.

"우리에게 돈이 있었던 적이 있어? 그래도 자식들을 이만큼 키웠잖아. 자, 행동으로 옮기자고. 어차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돈 아닌가?"

그들은 프랭크가 일하는 의류 공장에서 옷을 훔쳐다 길에서 팔아 변호사 비용과 피해자를 만나기 위해 푸에르토리코로 가는 여비를 마련한다. 

영화,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은 1974년에 출간한 제임스 볼드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한 영화로 70년대 미국의 흑인 혐오와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50년 가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같은 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영화 속 티시와 포니에게 쓸만한 집을 내주는 집주인 레비(데이브 프랭코)에게 포니가 묻는다. 흑인 둘에게 친절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레비는 대답한다.

"사랑하는 모습이 보기 좋을 뿐입니다. 희든, 검정이든, 녹색이든, 보랏빛이든 상관없어요.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리고 영화는 티시와 포니의 사랑을 넘어 티시와 가족들, 드물지만 몇몇 백인들의 편견없는 모습을 함께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2018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흑인 혐오주의 제임스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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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반 동안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다가 다시 엘에이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도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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