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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페미니스트, '쎈 언니' 포스에 반하다

[그 날] 이희호 여사 별세 1년... 대통령 부부는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걸었다

등록 2020.06.10 07:40수정 2020.06.10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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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쏟아지는 뉴스 속에 그 날의 사건을 되짚어 봅니다. 오늘은 지난해 오늘 우리 곁을 떠난 이희호 여사 편입니다.[편집자말]

1964년 어느 날 가족이 창경원으로 나들이를 갔을 때 사진이다. 이희호 여사의 왼 편에 선 이가 고교 1년생 맏아들 김홍일, 중학교 3학년이던 둘째 김홍업은 빠져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안고 있는 아이가 막내 김홍걸이다. 뒷줄에 선 여성은 가사도우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 김대중평화센터


1964년의 어느 날. 네 가족은 창경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고등학교 1학년인 맏아들과 이제 갓 태어난 막내, 남편과 아내가 함께 했다.

가족 외출을 기념 삼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헌데 정중앙에 앉은 여성의 맵시가 자못 당당하다. 무릎께 오는 V넥 원피스에 목에 딱 맞는 목걸이로 포인트를 줬다. 부푼 머리칼에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갖췄다. 그녀는 왼다리를 살짝 꼰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녀의 왼편에는 집게를 쥔, 장난기 가득한 큰 아들이. 그녀의 오른편에는 막내아들을 다소곳하게 안고 있는 남편이 앉았다.

오래된 흑백 사진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녀의 위풍은 그를 주인공으로 보이게 한다.

이 같은 당당함은 그들의 동교동 집 문 앞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남편은 아내의 이름도 문패에 함께 걸었다. 남자는 바깥일을,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의 생경한 모습이다.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자라났다."  (이희호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 中)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다. '동반자' 이희호 여사를 향한 존경을 그는 이름을 나란히 놓는 것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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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김대중 대통령은 전세였던 동교동 작은 주택을 구입하면서 아내 이희호 여사의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함께 달았다. 사진은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한 부모를 대신해 동교동을 지켰던 장남 김홍일까지 걸려 있던 문패. ⓒ 김대중평화센터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  (이희호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 中) 

남자 김대중의 청혼을 받은 여자 이희호는 정치라는 꿈을 함께 꿨다. 그 꿈에 대한 신뢰로 그들의 결혼은 성사됐다. 그 신념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듯 보이는 두 장의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입니다"
 

"여사님은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의 배우자, 영부인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입니다."

2019년 6월 10일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이 같은 말로 이 여사를 표현했다. 그 말마따나, 이 여사는 국내 여성 인권을 위해 평생 노력한 1세대 페미니스트다.  

이 여사는 1952년 여성 지도자들과 함께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했다. 가장 젊었던 그가 상임간사가 됐고, 발기문 작성에 연구원 등록까지 실무를 도맡았다.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났고, 다시 돌아온 그는 1959년 1월 YWCA 총무로 사회운동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녀가 내 건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 합시다' 였다. 

4.19 혁명 후 첫 국회의원 선거(1960년) 때는 '축첩자(첩을 둔 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자'는 운동을 펼쳤다. '아내를 밟는 자 나라 밟는다'는 플래카드를 써 거리를 활보했다. 
  

1959년부터 YWCA 총무를 맡은 이희호 여사는 '혼인시고를 합시다' 캠페인을 펼쳤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다른 여성단체들과 함께 축첩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축첩자에 투표 말라' 등의 플래카드 중에는 이희호 여사가 직접 쓴 것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 김대중평화센터

  
이 여사는 여성문제연구원(이후 여성문제연구회로 이름 바꿈)의 2대 회장(1964년~1971년)을 8년 간 지냈다. 여성 노동자의 열악한 근로 환경을 조사하는 보고서를 발간했고, 여성들의 정치의식을 조사해 주권 행사를 독려했다.

여성문제연구회가 가장 주목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남녀평등의 구현이었다. 남녀차별 법조항을 철폐하는 것에 앞장섰다. 이는 1989년 가족법 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 남편인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가 법 개정에 앞장섰다. 여야 남성 국회의원의 반대를 뚫고 이뤄낸 쾌거였다.

가족법 개정으로, 남편은 8촌까지 친족으로 인정하지만 아내는 4촌까지만 친족으로 인정하는 법의 불평등성을 바로 잡았다. 재산권과 상속권 행사에서 남녀가 동등한 법적 지위를 갖게 됐다.

"가족법 개정은 내 평생소원이었다. 헌법은 남녀평등을 보장하고 있는데 가족법은 일제강점기에 틀이 만들어진 뒤로 거의 바뀌지 않았다. 여성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들, 손자에게까지 법률상 종속돼 있었다. 가족법 개정 문제만큼은 내 생각을 남편에게 전했다." (이희호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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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생애사진 100선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1998년 15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1998년 영부인이 된 후에도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직·간접적 노력은 계속됐다. 2001년, 정부 수립 이후 첫 여성부가 탄생했다. 행사 참여 위주로 운영되던 청와대 제2부속실의 역할을 아동·여성을 위한 활동에까지 확대했다. 

"여성 권익 향상은 내 오랜 소망이었어요. 정부 출범 때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이 특별위원회를 발전시켜 여성부를 세웠어요. 1998년엔 가정폭력방지법을 만들었고 1999년엔 남녀차별금지법을 시행했지요." (이희호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 中)

김대중 정부 시절, 교육부·행자부·법무부·농림부 등 정부 부처에 여성정책 담당관실도 신설됐다.

"우리가 청와대에 있는 동안 정부와 사회에서 여성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었지요. 우리가 들어가기 전 50년 동안 청와대에 여성 비서관이 한 명뿐이었어요.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그 수가 열 명으로 불었지요. 여성 장관도 네 명 배출했고요." (이희호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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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생애사진 100선 1984년 미국 '피플'지에 실린 김대중-이희호 부부 사진. ⓒ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 같은 정치적 변화의 중심에는 이 여사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때문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이희호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 中)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미국 망명시절 한 강연회에서 이 같이 말하기도 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가 아닌 이희호의 남편 김대중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을 때 중국 <인민일보> 자매지 <스다이차오>는 "이희호 여사는 민주주의와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평생 대통령과 함께 해온 만큼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의 몫이다"라고 적었다. 

부부의 연을 약속할 당시 꿈꾼 '정치'를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함께 일궈냈다. 

마지막까지 여성운동가였던, 그녀 

"내 양심에 비추어 일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 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2016년 11월 2일 한겨레 인터뷰)

그녀의 바람은 그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후에도 '여성의 인권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았다. 이 여사는 별세하기 1년 전인 2018년 3월, 당시 불불고 있던 '미투 운동'에 대해 지지의 뜻을 밝혔다.

"정말 놀랐어요. 가슴 아팠어요. 남성들은 여성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해요. 어떻게 여성들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지 너무 화가 나요. (여성들이) 용기 있게 나서는 거 보면 좋아요. 우리 땐 생각도 못 했어요. 대견하고 고마워요.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어요." (2018년 3월 1일 경향신문 인터뷰)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여성운동가로 살았다.

이미 그가 떠난 후, 남은 언어들이 그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 "위대한 여성지도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민주진영 전체의 큰 어르신인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셨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배우자를 넘어 20세기 대한민국의 위대한 여성지도자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이 깊었던 것은 이 여사 역할 덕분이다. (고인은) 여성부 신설과 남녀차별금지법 제정 등 국민의정부 시절 여성정책에 크게 기여했다. 오늘도 동교동 자택에는 두 분 문패가 나란히 걸려 있을 것입니다."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2019년 6월 11일)

"이희호 여사는 여성이 가진 포용의 미덕을 보여주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국난 극복과 정치 안정에 큰 힘이 됐다. 영부인을 넘은, 김 전 대통령의 든든한 정치 동반자로서의 삶은 여성과 국민들에게 큰 울림을 남겨줬다. 먼저 서거하신 김 전 대통령 곁으로 가셔서 생애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시길 바란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2019년 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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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생애사진 100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2007년 경기도 구리 코스모스 축제를 방문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김대중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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