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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를 뒤흔든 대형사고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52)] 제14 대통령 김영삼 ⑧

등록 2020.07.08 15:56수정 2020.07.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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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현장 모습. 다큐멘터리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의 한 장면. ⓒ 영화사진진

  연이어 발생한 참사

30여 년 군사독재에 넌덜머리가 난 국민들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사정과 개혁에 절대적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대통령 재임 중 대형 참사가 잇따라 이어지자 지지도가 점차 식어갔다. 김영삼 집권 5년 동안 대형 참사는 땅과 바다, 하늘을 가리지 않고 발생했다. YS 정부 출범 이후 첫 대형 참사는 철도에서 일어났다.

1993년 3월 28일 오후 5시 30분 경부선 구포역 북쪽 2.5km 지점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됐다. 600여 명의 승객 중 78명이 목숨을 잃었고, 198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한국 철도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4개월 뒤, 이번엔 하늘에서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1993년 7월 26일 김포를 이륙해 목포로 가던 아시아나 여객기가 공항 접근 중 산에 충돌했다. 이 사고로 66명이 사망하고, 44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해 10월 10일에는 바다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서해 페리호가 침몰했다. 이 사고로 승객 362명 중 292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원인은 정원 초과와 과적 때문이었다.
      

퇴임 후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김영삼. ⓒ 자료사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께 한강 성수대교가 붕괴됐다. 이때 성수대교를 지나던 승용차 2대와 봉고차 1대, 시내버스1대가 추락해 32명이 사망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하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하지만 사흘 뒤 충주호 유람선에서 불이 나서 25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1995년 4월 28일 오전 7시 52분 대구 달서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학생과 시민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와 같은 대형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자 세간에서는 김영삼에 대해 '무면허 운전사'라고 비아냥거렸고, 김영삼 문민정부를 '사고정부'라고 혹평했다.

참사는 끝나지 않았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고 원인은 부실 시공과 무리한 보수공사 때문이었다. 이 사건 후 김영삼은 또다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 국가기록원

   
남북정상회담 불발


1994년 6월 18일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온 카터는 청와대로 예방해 부부동반 오찬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카터는 뜻밖에도 김일성의 제안을 가지고 왔다.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 자료사진

 
그 말과 함께 김일성 주석이 남북정상회담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김영삼은 카터의 말을 듣고 곧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했다. 양측 실무진은 8시간 남짓 마라톤회담을 한 뒤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합의서'에 서명 교환했다. 이로써 긴장과 대결관계로 이어진 남북관계는 일대 전환의 계기를 마련했다.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합의서'에 따르면,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2박 3일 동안 김영삼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제1의제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로 삼았다. 제2의제는 북한의 핵개발 및 전쟁 포기 촉구였다. 김영삼은 김 주석에게 얘기할 것을 자구 하나하나까지 메모한 뒤, 회담 날짜를 기다렸다. 하지만 역사의 신은 김영삼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16일 앞둔 1994년 7월 9일 정오, 김영삼은 칼국수로 점심을 드는 데 의전비서관이 메모 한 장을 건넸다. 김일성 사망 소식이었다. 첫 남북정상회담의 기회를 다음 정권으로 넘겨야 했다. 
 

평생 동지요 맞수인 김영삼과 김대중 ⓒ 자료사진

 
IMF 사태

김영삼 대통령은 경제를 '갱재'라 발음해 세간의 웃음을 샀다. 8선 의원으로 최연소 국회의원, 최연소 원내 총무, 야당 총재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그였지만 경제만큼은 통달치 못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는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된 요인은 외부·내부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으로써 그런 경제 위기를 초래한 데 대해서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한보·기아 등 대기업이 부도로 쓰러지고 대동은행·동남은행·동회은행·경기은행·충청은행 등 소규모 은행도 무너졌다. 그리고 숱한 기업의 노동자들이 대책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김영삼 문민정부는 경술국치 이후 최대의 국난을 자초케 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만든 신한국당의 대선후보조차에게 탈당을 요구받는 수모를 겼었다. 하늘은, 역사의 신은 그를 돕지 않았다. 15대 대선 결과, 그는 평생 맞수로 꼽혔던 김대중에게 권력을 넘겨줬다.

김영삼-김대중은 평생 동지와 맞수로 대립하다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마지막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두 사람 모두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맹자의 '왕도론'에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를 말한 바, YS는 그 첫 번째인 하늘이, 역사의 신이 그를 돕지 않았나 보다.
 

국립현충원으로 가는 김영삼 운구차가 광화문을 지나고 있다. ⓒ 자료사진

        
(*다음 회는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영삼 회고록> /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 실록>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썼습니다.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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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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