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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집행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 / 66회] "나를 위해 애쓰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등록 2020.06.28 16:04수정 2020.06.2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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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앞에 선 김재규의 마지막 모습. 재판 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그는 짧게"없다"고 답했다. 1979년 12월 20일에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이듬해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경향신문

 
운명의 날 1980년 5월 24일의 여명이 채 밝기 전인 새벽 3시경, 김재규를 태운 호송차량이 육군교도소를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서대문구 영천의 서울구치소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보안청사의 지하실 독방에 가뒀다.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지금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가장 먼저 지은 것이 이 서대문형무소였다.

일제강점기 수많은 의병과 항일지사가 생명을 잃거나 고초를 겪었다. 의병장 이인영을 필두로 김구ㆍ안창호ㆍ여운형 등 독립지사, 손병희ㆍ한용운 등 민족대표들, 강우규 의사, 유관순 등 3ㆍ1혁명 관련자 수천 명, 해방 뒤에는 진보당 조봉암, 북한 노동당부부장 황태성, 인혁당사건 관련자 등이 여기서 처형 되었다. 민족의 수난과 한이 맺힌 곳이다. (주석 5)


우연이었을까, 현저동 101번지에 잠시 수감된 김재규의 수형번호가 101번이었다. 이곳으로 신새벽에 이감될 때 그는 곧 형이 집행될 것을 예감하였다. 그리고 담담한 심경으로 최후의 순간을 맞았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아침 7시 정각, 김재규는 사형 집행실로 향했다. 집행관이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미 전날 녹음으로 유언을 남겼음인지 짧게 두 마디를 했다.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부하들이 눈에 밟혔다.


집행관이 다시 스님과 목사를 모셨으니 집례를 받겠느냐고 물어도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고광덕 스님과 김준영 목사가 새벽부터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는 다만 "나를 위해 애쓰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하직 인사를 했다.

사형이 집행된 후 그의 손에는 집행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긴 염주와 작은 염주 2개가 그대로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독실한 불자가 스님의 예불을 왜 마다하였을까? 그의 말대로 이미 성불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까. 아니면 구차한 절차를 생략한 채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피안으로 가고 싶었던 것일까?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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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재판 박정희 대통령 ‘시해’ 혐의로 재판정에 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혹자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후 ‘육본’이 아닌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2020년 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다.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이야기는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그때 그 사람들>(한석규와 백윤식 주연)이라는 영화로 제작해서 개봉한 바 있다. ⓒ 국가기록원

 
김재규장군은 63세에 10ㆍ26거사를 통해 독재자를 암살한 지 6개월 28일 만에 의병ㆍ독립지사들이 순국한 그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교수형이었다. 그리고 1시간 단위로 박선호 등 부하들이 차례로 형이 집행되었다. 박흥주 대령은 단심이어서 3월 6일에 이미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신군부는 시신을 육군통합병원으로 옮기고 동생 김항규 씨에게 "시체를 빨리 치우지 않으면 화장을 하겠다"고 협박조로 연락하였다. 그때서야 부인과 유족은 육군통합병원으로 달려가 시신을 확인하고, 오열했지만 그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김영희 여사는 처형된 다섯 사람들(김재규 장군과 4명의 부하들)의 수의를 똑같이 주문하여 육군통합병원으로 갖고 갔고, 유가족들은 3일장도 못 지내고, 바로 그 다음날 서둘러 장례를 지내야 했다.

장례 날 육군통합병원에서 삼엄한 헌병들의 경계와 안내(?) 속에 다섯 구의 시신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발인시간을 달리하여 나갔고, 김재규 장군의 시신이 든 영구차는 앞, 뒤로 무장한 헌병 1개 소대의 호위(?)를 받으며 영정도 앞에 못 모시고 뒤에 따라 가도록 하였다. 김재규 장군은 죽어서도 유언대로 묻힐 수가 없었다. (주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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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진은 1980년 1월 23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항소심 2차 공판 당시 사진. ⓒ 연합뉴스

 
김재규 장군은 변호인과 가족들에게 국군동정복을 입혀 매장하고, 묘비에는 "김재규장군지묘"라고, 그리고 부하들과 한 곳에 묻어달라고 별도의 유언을 남겼다. 신군부는 시신에 동정복도 못 입히게 하고, 부하들과 함께 묻히는 것도 막았다.

김재규 장군은 당일 경기도 광주군 보포면 능곡리의 삼성공원 묘지에 제한된 유족과 많은 기관원들이 지켜본 가운데 매장되고, 박흥주 수행비서는 경기도 포천 천주교회 묘지, 박선호 의전과장은 경기도 고양군의 공원묘지, 이기주 경비원은 경기도 양주군 구내면 공원묘지에 따로 묻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거행되고 국립묘지에 안장된 것과 크게 비교되었다.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프랑스가 히틀러의 나치에 점령당했을 때 레지스탕스운동에 나섰던 끌로드 모르강이 먼저 간 동지들에게 바친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주석 8) 이 전한다.

 몸짓도 없고 꽃도 없고 
 종소리도 없이
 눈물도 없고 한숨도 없이
 사나이답게
 너의 옛 동지들
 너의 친척이
 너를 흙에 묻었다
 순난자(殉難者)여!
 흙은 너의 영구대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오직 하나의 기도는
 동지여
 복수다. 복수다
 너를 위해…….


주석
5> 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3쪽, 나남, 1999.
6> 안동일, 앞의 책, 394쪽.
7> 오성현, 앞의 책, 224~225쪽.
8> 끌로드 모르강 지음, 문희영 옮김,『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231쪽, 형성사, 1983.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재규 #김재규장군평전 #김재규사형집행 #김재규교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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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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