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팔순 유족 "평생 가슴에 쇳덩어리"

창원지법 마산지원, 6년만에 열린 '국방경비법 위반' 재심 사건 관련 재판

등록 2020.06.12 14:05수정 2020.06.12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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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재심사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이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에 '국방경비법 위반' 재심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6월 12일 오전 피해자의 후손인 김정임(79, 진주)씨가 법정 앞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 윤성효


 "사실 평생 쇳덩어리를 가슴에 안고 살아 왔다. 이전에는 '보도연맹'이라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지금은 민주화가 되고 해서 '민간인 학살'이라고 하니 그나마 우리가 짐을 벗었다."

12일 오전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2층 복도에서 김정임(80) 할머니가 한 말이다. 그는 70년 전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당한 친정아버지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해 법정을 찾은 것이다.

중년이 된 아들과 함께 온 김 할머니는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동안 아무도 몰랐다. 시댁에도 아들한테도 말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언제인가 아들이 묻더라.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느냐고. 그래서 그 때는 '그냥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랫동안 보도연맹으로 죽었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듣는 사람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는 생각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창원유족회 노치수 회장이 "보도연맹이라는 말을 하면 '빨갱이'라 할 것이니까 그런 것이었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요즘은 '민간인학살'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짐을 좀 벗었다. 하지만 무죄가 선고되어 빨리 명예회복이 되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법원, 10명에 대해 '재심 개시' 여부 판단 위한 심리 열어


김 할머니를 비롯한 10명의 유족들이 이날 법정에 나왔다. 이들은 2014년 12월 '재심' 신청했고, 6년 동안 재판이 열리지 않다가 이날 기일이 잡힌 것이다.

김 할머니의 부친을 비롯한 10명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1950년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학살을 당했다. 마산교도소에 수감되어 있거나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정상적인 재판 절차도 없이 국군 등에 의해 학살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창원마산 괭이바다에 수장되기도 했다.

법원은 이들에 대해 재심할지 여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이날 재판은 이들에 대한 '재심 개시'를 할지 말지를 가리기 위한 심리가 열린 것이다. 법원이 재심 사유가 된다고 판단하게 되면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재심 개시'에 검찰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고등법원(항고), 대법원(재항고)에서 다시 다투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검찰이 '재심 개시'에 동의하거나, 대법원의 '재항고'에서 결정이 내려지면 그 때부터 '재심' 재판이 진행된다. 재심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관련 자료를 두고 사형 집행이 정당한지, 아니면 무죄인지 등에 대해 다투게 된다.

이들에 대한 재심 사건은 창원지법 마산지원 형사부(재판장 류기인, 황정언, 정수미 판사)가 맡고 있다.

피해자 가운데 5명은 박미혜 변호사(창원), 다른 5명은 임재인 변호사(부산)가 변론을 맡았다. 변호사들은 재심 신청한지 오래됐다며 빨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류기인 재판장이 '재심 개시' 여부에 대한 입장을 묻자 법정에 나온 공판검사는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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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 윤성효

 
박미혜 변호사는 "체포와 구금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집행되었는지, 형사소송법에 따라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며 "이미 무죄가 난 사건도 있는 만큼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류 재판장은 "재심 개시 요구가 있어 심문 기일을 잡았던 것이고, 비슷한 사건이 항고에 이어 재항고되어 대법원에 가 있다"며 "대법원 확정 여부를 참고해서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2014년 2월, 창원유족회 7명이 '국방경비법 위반 재심사건'을 신청했고, 검찰이 재심 개시를 받아들이지 않아 부산고등법원을 거쳐 현재 대법원에 재항고되어 있어, 류 재판장이 이를 참고하겠다고 한 것이다.

또 당시 비슷한 시기에 노치수 회장을 비롯한 5명이 낸 재심사건에 대해, 창원지법 마산지원은 올해 2월 14일 국방경비법 위반사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재심 사건 역시 처음에는 검찰이 '재심 개시'를 받아들이지 않아 항고, 재항고 절차를 거쳤던 것이다.

"재심 신청을 한 지 너무 오래 됐다"

이날 법정에는 피해자들의 많은 후손들이 나와 지켜봤다. 법정 심문이 간단하게 끝나자 일부 후손들은 "재심신청한지 6년만에 열리는 재판이다. 너무 오래 기다렸는데, 이렇게 짧게 끝나니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할아버지가 희생당했다고 한 변아무개씨는 "어른들 말씀으로 전해 들은 말이 전부다. 괭이바다에서 수장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당시 변씨 할아버지의 오촌당숙도 희생 당했고, 이들은 모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희생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아버지를 잃은 권아무개(76)씨는 "6살 때다. 아버지는 눈썹이 많았고 잘 웃으셨던 기억이 있다"며 "아버지는 '부면장'을 하셨는데, 어머니 말로는 전송하러 나갔더니 검정색 짚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양쪽에 서서 잡아간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가 살아오실 것이라 여겼다. 당시 같이 끌려갔다가 살아오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10여년 뒤에 알려주셨다. 아버지께서 괭이바다에 수장되셨다고. 그래서 4.19혁명 뒤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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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이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에 낸 '국방경비법 위반' 재심사건에 대해, 6월 12일 오전 박미혜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윤성효

 
당시 외할아버지를 잃은 한 유족은 "시간이 없다. 유족들도 다 연로하시다. 재심 신청을 한 지 너무 오래 됐다. 빨리 재판을 해서 무죄가 선고되어 명예회복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거의 대부분 시골에서 농사 짓던 사람들이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하다고 국가를 전복시킬 것이냐"며 "우리는 할아버지 산소조차 갈 수 없다"고 했다.

또 한 유족은 "사람을 죽였으면 나라에서 유족한테는 통보를 해주고, 시신을 돌려보내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것 자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불법이고, 피해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증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창원유족회는 13일 괭이바다에서 "제70주년 13차 창원지역 민간인희생자 합동추모제"를 연다. 창원유족회는 "억울하게 희생 당한 원혼들의 해원과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합동추모제를, 야밤에 죽음을 당한 학살 현장인 괭이바다에서 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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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유족들이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에 낸 '국방경비법 위반' 재심사건에 대해, 6월 12일 오전 박미혜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윤성효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국방경비법 #창원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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