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가정 폭력, 우리 모두의 오지랖이 필요하다

등록 2020.06.19 15:02수정 2020.06.1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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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란 말이 있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기상이론에서 시작된 과학용어다. 지금은 어떤 사건이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일에까지 예상하지 못한 결과나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킬 때, 흔히 쓰이는 말이다.

코로나 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그것이 과연 서로 관련이 있을까 싶었던 일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뜻밖의 결과를 불러오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비 효과'란 말을 자주 생각한다.

코로나 19 이후, 중국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년 대비 4분의 1로 감소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코로나 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이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중국 공장들이 가동을 중단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덕분에 우리나라도 중국발 황사의 영향에서 올봄은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베네치아 강의 수질이 일시적으로 회복됐고, 덕분에 운하에 흐르는 물로 물고기가 떼 지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대기 질이 좋아지면서 인도에서는 히말라야산맥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다. 인간이 자연에 저지르고 있던 수많은 잘못이, 코로나 19로 인해 만천하에 들통이 난 셈이다.

물론 코로나 19의 날갯짓이 이처럼 긍정적인 결과만 불러온 것은 아니다. 지금 세계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 위태롭다.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이때,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만큼 마음의 씀씀이도 각박해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남을 포용하고, 너그럽게 감싸 안는 대신 미워하고 증오하며 괜한 화풀이를 일삼는 사람들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최근 몇 달새 세계 곳곳에서 가정폭력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19로 인해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것을 그 원인으로 꼽고 있다. 저마다 외출을 자제하면서 한 집에서 자주 부딪히다 보니, 가족 구성원 간에 다툼이 반복되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가정 내 학대로 인한 911 신고가 늘었고, 중국에서는 이혼 소송을 진행하려는 사람들이  20 퍼센트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코로나 19로 이동 제한령을 시행한 이후 가정폭력이 30 퍼센트 이상 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경찰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코로나 19 첫 확진 환자가 나온 뒤 석 달간 112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 보다 약 4.9% 감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집계 기간이 짧은 것을 고려하면 안심하긴 이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원래 가정폭력 신고율 자체가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낮다. 전통적으로 '자고로 남의 가정사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탓이다.

최근 9살 아이가 부모에 의해 고문에 가까운 학대를 받아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사고 있다. 아이의 계부는 아이의 목을 쇠사슬로 묶어 감금했고, 쇠파이프로 구타했다. 친모는 그 모든 것을 알고도 방관했다.

아이는 얼굴은 물론 온몸이 멍투성인 채로 발견됐다. 화상을 입은 손에는 손톱마저 빠져 있었다. 즉. 눈으로도 얼마든지 아동 학대의 정황을 알아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인해 대면 수업 대신 온라인 수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학교 측에서는 아이가 학대받는 사실을 몰랐다. 담임이 아이에게 학습 꾸러미를 전해 주기 위해 집에 방문했지만, 아이를 만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집에서 탈출해서 거리를 헤매고 있던 아이를 지나가던 시민이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이 모든 일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남의 가정사에 용감하게 끼어든 시민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어리고 약하고 작은 것은 돌보고 아껴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도덕이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라는 사람들이 그 '최소한'을 어겼다. 아이의 몸에 남은 상처는 언젠가 아물겠지만, 마음의 상처가 아물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이쯤 되면 부모가 되는 데에도 자격시험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내 것을 내 맘대로 하겠다는 파렴치한 논리로는 부모가 될 자격이 없다. 한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도 물론 귀하고 힘든 일이지만, 그 생명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은 그보다 더 큰 희생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때다. 내 이웃에 사는 아이의 얼굴에 수상한 멍 자국은 없는지, 밤늦게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부부싸움 소리가 혹 도를 넘지는 않았는지, 우리 모두 좀 더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의 그 사소한 오지랖이 태풍을 일으키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한 인간의 남은 생을 구원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힘들수록 더 끈끈해지는 것이 가족 간의 정이라던데,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이제 더는 없었으면 좋겠다.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고 '집콕' 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코로나 시대에 집마저 더는 안전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 큰 비극이 아닐까? 질병도, 그로 인한 가난도, 인간다움을 포기한 인간을 마주하는 것보다 무섭진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우리모두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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