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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광주를 대표한 셀럽의 최후

임진왜란 때 일가족이 순국한 제봉 고경명 장군, 그를 기리는 ‘포충사’에 가다

등록 2020.06.27 15:35수정 2020.06.2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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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명장 명신들을 다 죽인 무장세력이 신진 사대부들과 연합하여 쿠데타로 집권한 새로운 왕조, 조선이 개국한 지 200년. 당시 조선의 외교정책은 큰 나라인 명나라를 섬기고 작은 나라 여진과 일본과는 화친한다는 이른바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중화 대륙에서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금나라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00여 년간 진행된 내전을 종식시키고 일본 통일을 완수했다. 강한 군사력을 갖게 된 일본은 국내 정치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1591년, 대륙침략 계획을 세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정벌'을 선언했다.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은 일본의 오랜 꿈이었지만, 명나라 정벌은 구실이었고 그들의 실제 속내는 '조선의 정벌'이었다. 이듬해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15만에 달하는 일본군들이 최신 무기 조총으로 무장하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다.

부산진을 단숨에 집어삼킨 왜군들은 파죽지세로 내륙으로 침탈해 들어왔다. 한 달도 못 되어 수도 한양이 무너졌고, 두 달 만에 평양이 함락됐다. 조선의 왕, 선조는 백성들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포충사 옛 사당.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 후손들과 유생들, 제자 박지효 등이 충렬공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됐다. 선생의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제봉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 임영열

 

1603년 선조는 ‘포충(褒忠)’이라는 사액을 내렸다. 현판은 조선 최고의 명필, 한석봉이 휘호 했다 ⓒ 임영열

 
 

충효당, 청사영당, 전사청, 고직사 등은 철거됐지만, 옛 사당과 동재 서재는 본래의 위치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임영열

 
당파 싸움만 하던 무능한 관료들과 관군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성난 민중들은 선조가 머물던 궁궐에 불을 지르고 노비들은 노비문서를 불태웠다. 군주민수(君舟民水). 임금은 '배' 요, 백성은 '물'이라서 백성들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나라를 구한 건 아무 대가도, 명예도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각지에서 들고일어난 '의병(義兵)'들이었다. 관군 모집에는 응하지 않던 민초들이 스스로 모여 의병대를 조직했다.

각 지방의 명망 있는 선비나 승려, 전직 관리들이 의병장을 맡았다. 작게는 수 십 명에서 수 천 명에 이르는 의병들은 산발적으로 유격전을 펼치며 왜군들의 후방을 교란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치열한 전면전을 치르며 일본군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의병은 결국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2010년부터 정부에서는 임진왜란 때 경상도 의령에서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1592년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매년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해 의병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있다.

고등고시에 수석 합격한 호남의 천재, 제봉 고경명 장군
 

포충사에 봉안되어 있는 충렬공 제봉 고경명 장군(1533~1592)의 영정. 문인 출신답게 복건을 쓰고 도포 차림이다. 1558년(명종 13년)에 치러진 식년 문과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호남의 천재다. ⓒ 임영열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압촌마을 제봉산(霽峯山) 아래에는 '포충사(褒忠祠)'가 있다. 포충사와 제봉 고경명 하면, 광주·호남 사람들에게는 두 번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조선 중기 광주를 대표하는 셀럽' 중의 한 사람이다.

포충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의병장 제봉 고경명과 두 아들 종후와 인후, 종사관 안영과 유팽로를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포충사에는 사당이 두 곳이다. 1601년에 후손들과 유생들이 세운 옛 사당과 1980년 유적 정화사업으로 지은 신 사당이 있다. ⓒ 임영열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1533~1592)은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마을에서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과 남평 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화를 당한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고운(高雲)이다. 명문가문의 출신이다.

한국 가사문학의 선구자, 면앙정 송순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26세 되던 1558년(명종 13년)에 치러진 식년 문과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요즘으로 보면 고시에 수석 합격한 '엄친아'인 셈이다.

을과 장원은 역시 호남의 선비, 고봉 기대승이 차지했다. 훗날, 제봉과 고봉 두 사람은 호남 문단의 주류를 이룬다. 지금도 웬만한 호남의 누각과 정자에 가면 이들의 시문을 쉽게 볼 수 있다.
 

전남 담양의 성산 아래에 있는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정자, 식영정에 걸려있는 제봉 선생의 ‘식영정 20영’ 이 시는 송강 정철의 명작, ‘성산별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 임영열

 
수석 합격한 덕에 벼슬길에서 승승장구하던 제봉은 31세 홍문관 교리 시절 정쟁에 연루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제봉은 시문에 몰두하며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교유하며 명문을 남긴다.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함께 '식영정 4선(四仙)'으로 불리며 '식영정 이십영'를 지었다. 이 시문을 모티브로 하여 정철의 명작, '성산별곡'이 탄생한다. 42세 때 광주 목사 임훈과 함께 4박 5일 동안 무등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문, '유서석록'은 지금도 널리 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19년간 고향에서의 은거를 마치고 50세 때 재 등용되어 영암, 서산, 순창 군수를 지내다 1591년 동래부사, 지금의 '부산광역시장'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고 낙향한다. 고향에 내려온 지 1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국가의 녹을 받던 제봉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60세 백발의 제봉은 박광옥, 유팽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며 각 고을에 격문을 보냈다. 한 달여만에 담양의 추성관에는 전라도 각지에서 6천 여명의 의병이 모여들었고 제봉은 '전라도연합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1592년 6월 11일, 제봉의 연합의병은 유팽로와 안영, 양대박을 종사관으로 삼고 두 아들 종후, 인후와 함께 담양을 출발한다. 전주를 거쳐 은진에 도착했을 때 금산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이 호남을 공격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다. 곡창 지대인 호남을 방어하기 위해 연합의병은 관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관군이 먼저 무너졌다.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들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후퇴 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장군은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유팽로와 안영, 차남 인후와 함께 장렬히 순국했다. 비록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곡창 호남을 사수했고, 장군의 죽음은 호남 의병 봉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주인을 닮은 충노(忠奴) '봉이'와 '귀인'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포충사 옛 사당으로 오르는 홍살문 옆에는 자연석으로 세워진 비석이 하나 있다. 충렬공 제봉 고경명 집안의 하인, 봉이와 귀인을 기리는 ‘충노비’다. 봉이와 귀인은 금산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제봉과 그의 차남 인후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냈다. 이듬해 다시 장남 종후의 ‘복수의병군’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남 종후와 함께 순국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양반의 사당 앞에 세워진 노비를 기리는 비석이라고 한다 ⓒ 임영열

 
금산 전투에 제봉과 함께 참전한 의병 중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제봉 집안의 하인, '봉이(鳳伊)와 귀인(貴仁)'이다. 주인을 닮은 봉이와 귀인은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주인을 정성껏 도왔고, 전투가 끝난 40여 일 후에 제봉과 그의 차남 인후의 시신을 간신히 수습해 정성껏 장사 지냈다.

이듬해 다시 장남 종후의 '복수의병군'을 따라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남 종후와 함께 순국하였다. 포충사 옛 사당으로 오르는 홍살문 옆에 자연석으로 세워진 봉이와 귀인을 기리는 '충노비(忠奴碑)'가 서 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양반의 사당 앞에 세워진 노비를 기리는 비석이다.

두 아들뿐만 아니라, 고경명 장군의 일가는 모두가 의병으로 참전해 순국했다. 장군의 동생 경신은 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려 제주에 다녀오다 풍랑에 익사했다. 또 다른 동생 경형은 진주성 전투에서 장남 종후와 함께 순국했다.

전남 영광으로 출가한 딸은 정유재란 때 왜장을 꾸짖다 장검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두 아들과 딸, 동생, 노비들까지 일가족이 한 전쟁에서 순국한 사례는 세계 어느 전쟁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다.
 

마상격문(馬上檄文). 제봉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도록 격려하기 위해 달리는 말위에서 초를 잡았다는 격문이다. 최치원의 ‘토황소 격문’, 제갈량의 ‘출사표’와 함께 3대 격문 중 하나로 꼽힌다 ⓒ 임영열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1년 후손들과 호남 유생, 제자 박지효 등이 충의로운 인물들을 기리고자 사당을 세웠다. 1603년에 선조는 '포충(褒忠)'이라는 사액과 함께 '충렬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포충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헐리지 않은 전남지역 2대 서원 중 한 곳으로 남았다.

1980년 유적 정화사업에 따라 새로운 사당과 유물전시관, 내외삼문, 정화비 및 관리사무소 등을 세웠다. 이때 사당을 보수하면서 충효당, 청사영당, 전사청, 고직사 등은 철거되었다. 옛 사당과 동재 서재는 본래의 위치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420여 년. 호남 의병의 상징, 고경명 장군의 일가와 제장들을 기리는 포충사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호국의 표상'이 되었고, 장군의 영정 앞에 피워진 향불은 365일 하루도 꺼지지 않고 있다. 호국 보훈의 달 6월. 포충사를 찾아 호국의 인물들을 되새겨 보며 향불 하나 올리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보훈'이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채널코리아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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