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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고, 맞아죽고... 어느 부대에서 일어난 참상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한국전쟁 국민방위군 사건

등록 2020.06.26 18:46수정 2020.06.2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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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 ⓒ 진실위 자료

 
1950년 12월 17일 창설된 국민방위군은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예비병의 성격이 강했다. 국민방위군 창설 이전에 이미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와 경상남·북도에 49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1951년 1월 중공군이 남침하자 이승만 정권은 몇 십만 명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을 급속히 남쪽으로 무리하게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국민방위군 예산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은 1951년 1월 29일이었다. 그 내역은 국민방위군 장병 수를 50만 명으로 잡고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 연료비, 잡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장정들의 하루 식량이 1인당 4홉으로 당시 5홉 5작이었던 전쟁포로보다도 적었다. 또한 이 예산에는 교육대의 운영비, 장병들의 피복비, 의료비 등과 장교와 기간병에 대한 급여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이동시키기 전 이들의 소집장소는 지역별로 정해져 있었다. 예를 들면 서울은 창덕궁, 경기북부지역은 안산초등학교, 경기남부수원은 수원공설운동장, 인천은 축현초등학교 등이었다. 그렇게 모인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 100~200명씩을 편성해 인솔자를 붙여 남하시켰다.

당시 유엔군이 모든 도로를 주 보급로로 지정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국민방위군은 샛길, 산길 등을 엄동설한에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남하 경로는 서울의 경우 창경궁-덕소-양평-여주-괴산-문경새재-문경-상주-영천-경산을 거쳐 부산·마산·진주·울산·통영·제주 방면 등으로 나뉘어 가는 것이었다.

부족한 식량과 지휘관들의 횡령으로 국민방위군은 배를 굶주린 채 걷거나 해군 함정을 타고 남쪽의 교육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대규모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충분한 보급품이나 시설이 없었다. 결국 동상·기아·질병 등으로 수만 명 사상자가 속출하는 참상이 이어졌다.

당시 하동지역 교육대장 차연홍은 1951년 1월의 국민방위군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식 4홉, 부식비 25원은 빠듯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대로만 축내지 않고 장정들에게 급식했었던들 허기져 쓰러지는 일은 없이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대 운영비가 전혀 지급되지 않아 부득이 부식비 일부를 전용할 수밖에 없었고, 또 수령해 오는 양곡도 으레 가마당 6, 7킬로 이상씩이 축난 것이었다. 사령부에 항의했으나 회답은 번번이 '양해하라'는 것이었다.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지 않나 싶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교육대의 운영을 하나부터 열까지 주민들의 협조로 감당했다. 볼 일이 있어 대구 사령부에 갔다. 일과시간이 조금이라도 늦게 되면 으레 사령부 간부들은 시내 요정에서 찾기가 일쑤였다. 요정에 찾아가 보면 돈을 수북이 쌓아놓고 '섰다'판을 벌이고 있곤 했다.
 
항상 기아에 시달렸다
 

국민방위군을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숙식은 또 인솔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도착한 마을에서 이장이 알아서 숙소를 배정해주고 식사도 민가에서 해주는 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늦게 도착하면 아예 밥이 없었다. 또한 매일 수천 명씩 몰려드는 장정들을 계속 먹일 식량이 없었다. 그 결과 국민방위군 대부분은 항상 기아에 시달렸다.

남하하는 국민방위군을 따라 떡이나 엿 등을 파는 행상이 도로변에 나와 있기도 했다. 일부 국민방위군은 자비로 음식을 사 먹기도 했으나 돈이 별로 없던 대부분의 국민방위군은 배가 고픈 나머지 행상의 음식을 일부러 발로 차 땅에 떨어지면 주워 먹거나 마구 달려들어 거지처럼 약탈했다.


많은 국민방위군이 열악한 시설에 있다 보니 전염병 등 질환도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을 치료할 의약품은 거의 없었다. 교육대 간부들은 그나마도 부족한 쌀이나 의약품을 상인들에게 팔아 횡령을 일삼았다. 심지어 간부들은 자유당 국회의원 30명에게 자기들이 횡령한 돈을 뇌물로 주기도 했다.

전염병 환자가 생기면 간부들은 환자를 닭장, 창고 등에 격리했다가 죽으면 들것에 실어 아무 곳에나 묻어버렸다. 그나마 교육대 근처에서 사망한 사람은 암매장지라도 추정할 수 있었으나, 귀향 도중 길가에서 죽은 국민방위군의 숫자는 파악조차 안 되었다. 사망해도 가족에게 거의 통지하지 않았다. 고향 친구가 살아 돌아와 가족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는 것이 전부였다.

국가 예산을 지원받는 국민방위군은 당연히 예산집행이나 군수물자 관리에 있어서 군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의 통제가 안 됐다.

간부들이 부정과 횡령을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이승만 정권이 이들에게 봉급을 아예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군복도 횡령한 돈으로 만들어 입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이었기에 시설에 수용되었던 국민방위군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배급된 식사량은 갈수록 줄어들어 나중에는 계란만 한 소금 주먹밥이 나왔다. 굶주림에 직면한 국민방위군은 민가에 뛰어들어 구걸이나 약탈을 하고, 배가 고파 소나무 껍질, 땅속의 풀뿌리, 정미소 벽에 붙은 왕겨, 인분을 뿌린 밭작물까지 닥치는 대로 먹었다. 우물가에 버려진 음식 찌꺼기를 주워 먹기도 했고, 배가 고파 바닷물을 마시다가 죽기도 했다. 밥을 훔쳐 먹다 간부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

당시 제주도 국민방위군 수용소에 있었던 심재갑은 지난 2010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하루는 국민방위군 장교가 운동장에 모이게 하더니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호통이었다. 이 돈 때문에 제주도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면서 윽박질렀는데, 모두들 조용히 있자 한 사병을 불러내서 주머니와 내복을 뒤졌다. 돈이 발견되자 마구 몽둥이질을 해대면서 나머지 모두의 옷을 뒤지겠다고 하는 말에 모두 질겁하고 가진 돈을 다 내어놓았다. 그런데 이후 서귀포 국민학교에서의 국민방위군 생활은 더욱 처참했다. 20평 규모의 교실을 근 2백여 명이 사용해서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운동장에 모여서 보면 모두들 기침을 하고 시커먼 가래침을 뱉어냈다.

식사는 주먹밥에 반찬은 소금국에 고사리를 넣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식사 시간이면 커다란 국통에 있는 고사리 하나라도 건져 먹기 위해 아비규환이었다. 우리들의 일과는 훈련을 하고 틈틈이 한라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하는 것이었다. 행군 중에는 주민들이 말리던 썩은 고구마 조각을 주워 먹고, 한라산에서는 소나무 껍질이나 풀을 먹었다. 우물가를 지날 때는 시궁창에 버려진 밥찌꺼기들을 밥풀 하나하나를 닭이 쪼아 먹듯이 건져서 삼켰다. 인분을 잔뜩 뿌린 채소밭에 뛰어 들어가 당근이며 마늘 등을 씻지도 않고 입에 처넣었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어"

국민방위군이었던 박상규는 통영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진술했다.
 
백여 명이 이동해서 도착한 곳이 외딴 섬이야. 전에 있던 곳은 밥덩이가 주먹만 했는데, 여기서는 계란만 해. 또 바닷물에다 고구마 줄거리, 그걸 집어넣어서 국이라고 주는 거여. 그것도 받으면 건더기는 하나도 없어. 그냥 바닷물 끓인 것만 준단 말이야. 벌써 건더기는 다른 놈이 다 먹어버려.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런데 거기서 계란만 한 밥덩이 하나를 100원씩에 팔아. 중대장이 팔아먹는 거라고. 우리에게 주는 주먹밥을 쪼개서 그걸 만들어서 팔아먹는 거라고. 그렇게 한 달을 먹고 났더니 다리가 뒤틀려서 걷지를 못하겠더라고. 아주 삐쩍 말라가지고. 하루는 옆에 있는 젊은 사람이 낮에 바닷가에서 무슨 해초 같은 걸 뜯어 먹었어. 밤새 배가 아프다고 난리를 치는데, 병원이 있나 뭐가 있나. 그냥 내버려 뒀더니 아침에 죽었어. 제사를 지내주는데 밥 한 사발에 반찬 좀 올려놓고 전부 다 서서 초상을 치른 거지. 그리고 학교 뒤 산비탈을 파고서 그냥 묻었어. 그리고는 제사를 지낸 밥을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모습을 보니 인간도 아니고 완전히 개, 돼지보다도 못한 꼴이지 뭐.
 
삼천포교육대 근처에서 두부 장사를 하던 강은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삼천포에는 강원도 사람들이 많이 왔다. 국민방위군 장교들은 방을 따로 얻어서 살림을 살았다. 방위군이 한 명 그 옆에서 심부름을 했다. 그 당시 삼천포 중학교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거기 있던 방위군들은 참 많이 죽었다. 수용된 숫자는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 잘 모른다.

그 사람들 가을에 잡혀왔는지 옷들이 얇았고 이는 바글바글했다. 추운데 이불도 없어서 동네 반별로 갖다주기도 하고, 또 7~8호씩 동네에서 돌아가면서 밥을 해주고 그랬다. 우리에게는 쌀을 주지도 않고 밥을 해달라고 하는 거였다. 내가 그때 두부 장사를 했는데, 거기서 나온 콩비지를 방위군들이 마구 와서 허락도 없이 다 먹었다. 그 사람들 이제 죽을 판이니까 옆에 친구고 뭐고 없었다.

방위군 식량이 나오기는 나왔다. 그런데 동사무소 마당에 식량을 쌓아놓고 장교들이 상인들 불러서 다 팔아먹었다. 쌀을 쌓아 올리기는 방위군들이 져 올렸는데, 또 그러다가 배가 고프니까 한 줌씩 훔쳐 먹다 걸리면 장교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안 주고 다 팔아먹었다.

교육대에서 저녁 때가 되면 대여섯씩 지고 내려가는데 뒤에서 보면 다 죽은 사람이었다. 사람들 많이 죽었다. 죽은 사람은 공동묘지에 다 갖다 묻었다. 여기서 살아간 사람이 몇 안 된다. 90%는 죽었다. 우리 집에 심부름하며 드나들던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이 '나는 살아갑니다' 하면서 인사를 하러 왔었다.
 
당시 사천에서 국민방위군을 보았던 변윤수는 이렇게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장교들이 착복한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보급 나온 쌀을 안 줬기 때문에 국민방위군 사람들이 감시망을 피해 민가에 와서 걸식을 하지 않았겠나. 국민방위군이 수용되었던 곳은 사천비행장 자리였다. 거기에 가건물을 짓고 살았다. 숫자는 상당히 많았다. 국민방위군 사람들 못 나오게 철망을 치고 보초도 세우고 그랬는데, 배가 고프니까 몰래 담을 넘어서 마을로 나왔던 사람들 중에는 모르고 간부 집에 들어갔다가 개 맞듯이 맞은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들이 배가 고프니까 철망을 사이에 두고 장사꾼들에게 떡이나 빵을 물물교환으로 바꿔 먹기도 했다.
 

삼천포읍 암매장 추정지. 참고인이 가리키는 곳이 제2국민병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삼천포읍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은 현재 경작지가 되어버려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 진실위 자료

 
"밥 훔쳐 먹다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

진주교육대에서 수용되었던 김광식은 진실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 당시 진주사범 정문에 국민방위군 제8교육대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처음엔 그곳에서 잤는데, 사람이 많아지니까 일렬로 사람을 세워서 그대로 눕게 했다. 나는 뒷사람 배를 베고 자고, 앞사람은 내 배를 베고 자고 그런 상황이었다. 교실 바닥에 가마니 깔고 잤는데 위생 상태가 엉망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엔 한 끼에 소금 주먹밥 하나씩 먹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비하면 훨씬 나은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견딜 만했다.

그러다 사람이 너무 많아지니까 중대 편성(200명)을 하고 이동했다. 중대는 철저히 지역을 섞어서 아는 사이를 다 갈라놓았다. 그런 후에 우리 중대는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주먹밥 하나 먹고 하루 종일 이동을 했는데 밤 8시쯤 지리산 자락의 어느 허름한 학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4개월을 1개 중대가 같이 보냈다. 거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철저히 민가하고 분리시켜서 만나지 못하게 했다. 완전히 고립되어서 민가에 먹을 것을 얻으러 갈 수도 없었다. 먹을 게 없으니까 다들 소나무 새순을 먹었는데 난 잘 먹지 못했다. 메뿌리라고 콩나물 같이 생긴 것이 있었는데, 보리밭 같은 땅속에서 재수가 좋으면 발견되는 것이다. 배가 너무 고프니까 그런 걸 항상 찾았다.

배급은 꼭 죽지 않을 만큼만 안남미로 만든 밥을 줬다. 중대장은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았는데, 우리 먹을 것도 모자란 판에 그 사람 가족들까지 먹여준 거다. 원래 4홉을 배급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한 2홉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밥그릇도 제각각이었는데, 국은 무슨 해초 같은 것으로 끓인 것이었다. 정말 배부르게 밥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3월 말이 되자 한 사람씩 기상할 때 안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보면 뻣뻣하게 굳어서 죽어 있었다. 매일 한두 사람씩 죽어나갔다. 그 사람들 다 굶어죽은 거다. 산 속이라서 죽으면 그냥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산속에다 묻어버렸다. 의약품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날짜도 얘기해 주지 않아서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죽은 사람이 우리 중대에서만 열댓 명 되었다. 다른 중대는 잘 모른다. 그런데 밥 훔쳐 먹다 맞아죽은 사람도 있다. 상상도 못한다. 소가 똥을 싸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데, 얼마나 배가 고프면 그 냄새가 그렇게 구수했다. 잘 먹는 소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당시 김해읍장이던 허성룡은 그때 김해교육대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김해에 도착하던 날 밤 2명의 국민방위군이 죽자 마을사람들은 너무도 불쌍한 생각이 들어 널을 사다가 공동묘지에 안장해 주었다. 막걸리와 북어, 과일 두서너 개를 사다가 제를 지낸 후 상여가 나갔다. 그러나 꽃상여는 아니었다. 리어카에 널 두 개를 실은 후 흰 보자기를 덮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국민방위병의 죽음에 널을 쓴 장례식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일 2~3명씩의 장정이 죽어나니 널을 사댈 돈도 없었다. 그러니 자연 막걸리와 북어 한 마리를 놓고 지내주던 제마저 치워버렸다.

장정들이 몰려드니 사망자의 숫자도 늘어났다. 어떤 날은 10여 명씩 죽어나갔다. 일일이 장사를 지낼 수가 없어서 막사 옆에 거적때기로 덮어두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한꺼번에 리어카에 실어다 공동묘지에 갖다 묻었다. 처음에는 봉분도 만들어 주었으나 그도 중단해 버렸다. 그날에 죽은 인원이 몇 명이든 한 구덩이에 몽땅 묻었다. 깊이 파려면 힘이 드니까 시체가 들어가서 안 보일 만큼만 파고는 슬슬 흙을 덮어버렸다.
 
"영양부족으로 대부분 사망"

당시 구포교육대 위병소 조장이었던 이동영은 그때 상황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1950년) 12월경 약 9천 명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구포다리 옆에 생선창고를 치우고 수용했었다. 식량, 의약품 사정이 안 좋아 사망자가 많았다. 하루에 소량의 주먹밥만 제공되고 병이 들면 환자끼리 한곳에 모아놓았다. 이삼일에 한명 꼴로 죽어 나갔던 것 같다. 영양부족으로 대부분 사망했던 것 같다. 죽은 시체를 매장하는 곳이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다. 트럭에다 싣고 가는 것이 어디 멀리 가는 것 같았다.
 
창녕읍 주민으로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한태원은 이렇게 진술했다.
 
그때 경기도, 강원도 사람들이 겨울에 무더기로 내려와서 여기 창락국민학교에 꽉 차게 수용되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여기서 전염병이 나서 무더기로 거의 다 죽었다. 학교 너머가 공동묘지인데, 거기다 막 갖다 실어다가 묻었다. 이듬해 봄이 되니까 개가 시체 일부를 물고 오기도 하고 온갖 것을 다 물어 오고, 그 후 몇 해 동안 환경적으로 동네가 고통을 많이 당했다. 누가 찾아오지도 않고,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표지를 꽂아놓은 것도 아니고 누가 찾을 수가 없다.

경산시 압량면 당리리 주민 이산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1.4 후퇴 즈음에 국민방위군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동네에 마구 몰려들었다. 동네 몇몇 창고에 50~100명씩 수용했는데 밥을 못 줘가지고 봄이 되자 창고에서 기어 나와 '밥 좀 줘요, 밥 좀 줘요' 했다. 그런데 우리도 살기가 굉장히 곤란했거든. 도와주기가 쉽지 않았어. 원래 창고가 일본 사람들이 지었는데, 함석으로 만든 거요. 거기서 살아나간 사람이 얼마 없어. 거의 다 죽었어. 내려올 때는 다들 괜찮았어, 그런데 좀 있으니 죽기 시작하는데, 다 죽어 가는데 누가 그걸 치우겠어. 그 시체 처리를 우리 마을 반 단위로 배정을 시켰어. 그래서 우리 마을 공동묘지나 개울가에 그 죽은 사람들을 가마니에 싸가지고 가서 묻었어. 봉분 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냥 묻고 덮고 마는 거지. 처음에는 표지를 해놨지만, 나중엔 비가 오고 그러니 다 쓸려 내려가 버렸어. 우리 중학교 때(1953~55년) 장마가 지면 시신이 다 드러나고 그랬어.
 

창녕읍 매장 추정지. 동네 주민이 가리키는 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세로 약 30m, 가로 약 100m가 제2국민병 암매장지로 추정된다. ⓒ 진실위 자료

  
"너무 배가 고파 돌멩이라도 먹을 것 같았다"
 

김봉수는 경주교육대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거기서 내가 장질부사에 걸렸다. 의약품을 제대로 먹은 것은 없고 물을 끓여서 계속 먹었다. 다행히 병은 나았지만 나를 도와주시던 분이 오히려 병이 들었다. 그런데 그 병이 퍼지게 된 것이 그곳에 있던 장교들이 귀향하던 장정들을 또 끌고 온다. 그중에 병에 걸린 사람을 함께 수용하니 병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죽으면 연병장에 시신을 덮어놓고 그랬던 기억이 있다. 한 20명가량 죽음을 목격했다. 어디다 갖다 묻었는지는 잘 모른다.

공장이 엄청 커서 수백 명이 함께 있었다. 부대 편성은 하지도 않고 돼지처럼 우리를 몰아넣고 수용했다. 장소가 좁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배가 고프면 저녁에 몰래 나가서 동네에서 얻어먹곤 했다. 소금에 절인 작은 주먹밥 하나씩 세끼 나눠주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돌멩이라도 먹을 것 같았다. 밥 훔쳐 먹다 걸린 사람이 있었는데, 식기를 입에 물고 연병장 돌고 그랬던 기억이 있다.

전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은 자인교육대에서의 당시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17세 때인 1950년 12월 말에 노량진에서 국민방위군으로 거리징집을 당했다. 기차 타고 남하했다가 자인교육대에 수용되어 1951년 5월 중순 해산했다. 수용된 곳은 바닥에 가마니가 깔려있는 창고였다. 창고마다 60~70명 정도 수용되었다. 그해 겨울은 무척 추웠으나 아무런 난방기구도 없이 내내 추위에 떨어야 했다. 낮에는 훈련 받는 것도 아니고,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햇볕을 쬐며 이를 잡던 기억이 난다.

식사는 처음에는 주로 보리밥에 소금국이 나왔으나, 점점 사정이 악화되어 소금물을 뿌린 주먹밥으로 대체되었다. 입대할 때부터 환자인 대원들도 있었으나, 추위와 기아로 환자들이 날로 증가했다. 의료진이나 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곳 지방의원에서 진찰을 받기도 하는 것 같았으나 역부족이었다. 밤새 환자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지냈고, 병들어 죽어가는 환자도 생겼다. 사망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르겠다. 피해가 많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승만이 1950년 12월 무리하게 모집한 국민방위군은 그 다음해인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설치법 폐지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어  4개월 만에 해체되었다. 국민방위군이 해체된 뒤 국방부는 국민방위군 68만여 명을 소집해 질병, 동상 등에 의한 낙오 및 도망자를 제외하고 약 30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사망자는 1234명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나머지 38만여 명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넉 달에 5만여 명이 죽다
 

국방부 발표와는 달리 국민방위군으로 5만여 명이 사망했다는 <부산일보>의 보도가 있었다. 또한 당시 국민방위군 피해 상황에 대한 국회보고서는 '팔십 퍼센트의 (국민방위군) 귀환 장정이 노력취업이 불가능하며, 그 중 대다수는 생명을 보존하기가 어렵다'로 적고 있다. 진실위는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수만 명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했다. 불과 넉 달 만에 이승만 정권은 부패와 관리부실로 자국민 장정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한편 국민방위군 해체 후 귀향 장정에게는 쌀과 광목이 얼마씩 지급되기로 했으나 이마저도 지급하지 않고 횡령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리고 국민방위군으로 강제 소집된 후 사망이나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은 대부분 정부로부터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고 희생자들은 국가에서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했다.

1951년 7월 19일 결국 재심 군사재판정은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등 관련자 5인에게 사형을 언도했고 이들은 그 해 8월 13일 처형되었다.

국민방위군사건을 조사해 진실규명을 결정을 내린 진실위는 지난 2010년 아래와 같이 국가에 권고했다.
국가는 1950년 11월~1951년 8월경까지 국민방위군의 소집·수용 등의 과정에서 발생된 국민방위군의 사망·실종 등 전반적 실태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조사결과에 따라 사망자·실종자 등과 그 가족에게 공식적 사과, 위령제 실시,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및 전사 또는 순직자에 준하는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갖추는 등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국가는 위 진실위 권고사항에 대해 아무런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국민방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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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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