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총 든 이웃의 등장, 뺏고 뺏기던 6.25전후 피난민의 삶

[한국전쟁 70주년-길 위의 소년 3] 한국전쟁 초기, 소년 이철옥이 마주한 혼란스러운 시대

등록 2020.06.25 14:21수정 2020.06.25 14:39
0
원고료로 응원
2020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전쟁을 주도했던 많은 주역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 전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 또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식민지배보다 큰 비극이었던 분단과 전쟁. 이 이야기는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경험과 성장기다.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증언을 해준 이철옥의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진솔하다. 높고 고창한 관념의 말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구체적 삶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 기자 말

삼팔(38)선과 군사분계선은 다르다. 38도선은 지구에 가상으로 그어진 동서 방향의 선. 적도에서 0으로 시작한 이 선이 대략 한반도의 중간에 멈추면 38~39도 어느 선에 다다른다. 38선은 북한 땅인 장산곶과 옹진반도, 해주와 연백군, 연안과 개성을 남한에 둔다. 반면 연천과 화천, 철원·김화·인제·고성·양양 등 현재의 남한 땅은 북쪽에 속했다.

남북이 치열한 현실전투에서 확보, 1953년 7월 27일 확정된 군사분계선(휴전선)은 38선 이남의 땅 3,900㎢를 북한으로, 이북의 땅 약 4,300㎢를 남한 땅으로 결정짓는다. 이로써 북한은 백령도 대청-소청도 연평도를 잃었지만, 동고서저 지대인 우리나라의 서쪽 평야 지대를 얻는다. 남한은 철원-김화-평강의 철의 삼각지를 포함한 산악지-군사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를 얻게 된다.
 
a

삼팔선을 대체한 휴전선은 곧 군사분계선이 되었다. 출처 NordNordWest FriedC Mnmazur stillsky@protonmail.com ⓒ wiki commons

 
그리고 월남 뒤 정착한 이철옥 선생의 거주지 강화는 한국전쟁에선 주변부였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남과 북 사이엔 온통 뻘로 가득한 곳이었다.

이곳은 지상군이 핵심인 북한군의 주요 진격지도, 중요 점령지도 아니었다. 그들 기갑사단과 보병들은 1번 국도를 통해 김포평야로, 3번 국도를 통해 연천-전곡-동두천으로 일거에 삼팔선을 넘었다. 자료에 의하면 김일성은 새벽 3시, 내각회의를 소집해 '이승만의 북침'이라는 거짓 주장을 하고, '자위로서의 전쟁'을 역설했다고 한다. 1시간 뒤인 오전 4시, 북한의 전면적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작전명은 '폭풍'이었다. 그들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고, 이후 서울에 머물렀다.

7월 1일부터 약 7만 명 남한군을 뒤에 두고 북한군은 남쪽 지역을 점령해 간다. 90% 남한지역이 점령되고 낙동강 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지던 그 시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진다. 그리고 3개월 동안의 유엔군·국군의 북진이 진행된다. 같은 해 12월경,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전면적 후퇴 뒤 삼팔선을 기준점으로 한 양측 간 공방이 처절하게 오간다. 이게 한국전쟁의 대략 내용이었다. 서로의 집들을 허물고 생명을 해친 뒤, 조금씩 빼앗거나 빼앗긴 땅이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이 우세했던 6월~9월 기간 강화도의 정치사회적 풍경은 북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을 잃은 관공서에는 주로 인민군이 주둔하고, 인민위원회가 구성됐을 터였다.
   

현재 강화대교가 놓인 갑곶 선착장 집단 민간인 학살지 알림판. 1951년 1월 6일에서 8일까지, 강화향토방위특공대는 할머니, 부녀자, 아기 등 민간인 약 300여 명을 집단학살했다고 적혀있다. 이런 일은 상호간에 일어났다. ⓒ 원동업


갑자기 주도권 잡은 이들... 시부모에 '동무'라 부르던 며느리 

"그때 우리 친구 누이 둘이 완장을 찼어요. 말단 근로자들, 가난한 사람들, 소작농 그런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은 거야. 시집온 지 며칠 안 된 며느리가 어느 날 시아버지 보고 '아버지 동무' '시아버지 동무' 북한에선 그랬다고. 이거 환장하는 거지. 어제까지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총대를 메고 와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했던 1950년 9월경부터 12월 흥남 철수로 대표되는 후퇴 시기까지는 강화에서도 '남쪽 세력'이 맹위를 떨쳤다. 북한 주력군과 더불어 '핵심 부역자'들은 대개 쫓겨가는 인민군들을 따라 사라졌다. 이 공간을 메운 것은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단체들이었다. 이들은 그간 이웃으로 지내왔던 사람들, 멀리 살지만 한민족으로 살았던 이들을 번갈아 가며 죽였다.

이철옥 선생은 전쟁 발발이 있던 1950년 6월부터 같은 해 12월 인천에서 제주행 피난 배를 타기까지 6개월여 기간 동안 혈구산 골짜기에서 농사를 돕는다. 들리는 소문, 혹은 가끔은 직접 가서 보는 전쟁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철옥이 개입할 세상은 아니었다. 그가 제주로 피난을 가게 된 이유는, 끝내 피난 가기를 거부해 집에 남았던 동네 할머니의 때아닌 보호자가 되면서였다. 그들은 함께 피난 배에 올랐고 그 배가 제주에 닿았다. 

- 제주에서의 생활은 어떠셨어요.
"제주에 가니까 마을마다 돌담 안에서 살아요. 유격대가 밤이면 공격을 해오니까 담을 쌓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어느 집에서 묵게 됐는데, 피난민들에게 배급이 조금 나왔어요. 근데 그걸로는 먹고살기가 어려우니까, 모두 궁리가 필요했어. 같이 피난 간 이웃분 중에 차를 갖고 성산포에서 고등어를 떼어다 파는 분이 있었어요. 당시엔 뭐에 절이거나 포장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차에다 막 다 실었다고. 나는 그 차를 타고 가다 적당한 곳에 내려요. 그리곤 지게에다 고등어를 퍼주는 거지. '그걸 팔아라!' 그렇게 해서 도움을 받았어요."

- 어린 나이인데 힘드셨겠어요.
"고등어들이 차에서 흔들리잖아요. 길도 안 좋고 그러니까. 그러면 모래랑 자갈이랑 넣고 같이 흔들면 돌이 위로, 모래가 아래 가듯, 고등어도 그렇게 돼요. 그런데 나한테는 위에서 퍼주니까, 다 큰 것만 받잖아요. 나한테는 그게 이득이에요. 그걸 갖다가, 내가 그때 (제주) 세화 쪽에 있었는데, 거기까지 팔며 가는 거예요. 남으면 그걸 우리가 먹고. 그러니까 나한테는 세 번이 이득이었어요. 장사하게 된 거, 큰 고등어 받은 거, 그리고 남은 걸 먹는 거."

나는 이철옥 선생과 함께 지난 5월 8일~10일 2박 3일 동안 강화도와 교동도, 연천과 전곡과 동두천, 그리고 철원의 노동당사나 백마고지 전적지를 돌았다. 1947년부터 군 제대를 한 1956년여까지, 그가 거쳐간 곳들이었다.

2박 3일의 자동차 여행에서 그의 짐은 작은 옷 가방 하나뿐이었다. 강화도에서 4만 원짜리 여관에 묵을 때나, 아침밥으로 전날 남은 떡 몇 점을 나눌 때도 그는 한 점 불편한 기색조차 없었다. 배고픔도 잠자리의 불편함도 그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듯했다. 더 어려운 시기를 건너왔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라기보다는 천성에 가까워 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이제 봄이 되니까 날이 덥잖아요. 햇빛도 위에서 내리쬐고. 그래서 풀을 좀 베어다가 고등어를 덮었다고. 그늘을 만든다고. 근데 가다 보니까 아지매들이 막 뭐라 그래요. 그 풀로 덮으면 고등어가 더 빨리 상한다는 거예요. 어느 날엔 바닷가에도 갔어요. 물속 바위틈으로 보니까 노란 불빛 같은 게 두 개 보여요. 아지매들께 물었지. '저게 뭐예요?' 그러니까 '잡수궤요!' 그래요. 그래 손을 넣었지. 그랬더니 문어가 팔뚝 어깨까지 날 붙잡는 거예요. 내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으니까 아지매들이 깔깔 웃어요."

2019년 5월 14일 첫 만남과 그해 6월 19일 두 번째 만남, 2020년 조금 길게 정식으로 녹음을 했던 4월 17일, 그리고 5월 여행에서 이철옥 선생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북한 공산정권하에서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 그는 특히 분노했다.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참전유공자들을 홀대하는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서운함과 질책을 숨기지 않았다. 그 이야기들엔 모두 사실적 근거와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공개'를 앞두자 그는 그런 이야기들을 묻고자 했다. 그게 자칫 진실을 알리는 데 방해가 되거나, '정치적 논란'이 될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선생 말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다. 어떤 일은 사실을 다시 짚거나, 맥락을 달리 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큰 줄기에서 나는 그에게 전적으로 공감했다. 개인이 가진 고유의 자유, 생각하고 말하고 어떤 신을 믿고, 사회체제를 선택해 이동할 자유. 그는 그런 것들을 지키고자 했다. 미워하고 싸우는 일, 거짓을 말하고 속이는 일도 그는 거부했다. 모함을 당했을 때에도 묵묵히 자기 일을 했고, 옳은 일을 했어도 그 때문에 누군가 피해를 봤을 땐 미안해했다.
 

휴가를 나와 이웃의 아이를 안고 있는 이철옥 그가 월남한 뒤 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고아가 되었다. 그 중에도 그는 주변 할머니, 아이들을 보살피려 애썼다. ⓒ 이철옥

 
그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은혜를 받았고(적어도 그렇다고 말했고) 그걸 기억했으며, 그런 은혜를 갚고자 노력하며 살았다. 더 큰 가치를 위해선 기꺼이 싸워야 한다고 믿는 것 같았지만, 애초 싸움만을 선택지로 보지는 않았다. 남이든 북이든 지역과 상관없이, 언제나 필요한 덕 같았다.

그는 80대 후반 나이에도 비상한 기억력을 지녔다. 나는 겨우 30여 년 전 복무했던 부대를 여단 수준에서만 숫자로 기억했으나, 그는 70여 년 전 겪거나 곁에 있던 거의 모든 부대의 숫자와 명칭을 기억해냈다. 어렸을 적 고향 함경도에서 먹었던 가자미와 명태와 청어가 어떻게 요리됐는지도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강화도 조기와 새우, 소금의 생산에 대해서도 눈앞에 있는 양 말했다.

그는 이전에도 영리한 소년이요 청년이었을 터였다. 이 모든 것이 이철옥이었다. 그가 지닌 이런 특성들은, 제주도 이후 강화에서의 유격대 생활과 춘천에서의 군 복무를 견뎌내는 힘이 돼 준다.                                                             

(* 다음 편에서 계속)   

[지난 기사]
열네살 때 탈북, 열일곱 때 전쟁... 그의 기구한 사연 http://omn.kr/1o0bx
월남하다 마주친 공산군의 놀라운 한마디 http://omn.kr/1o0e3
덧붙이는 글 이 내용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한 상태이고, 영화는 아직 어느 곳에서도 상영된 적이 없습니다. 영화제는 9월에 열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AD

AD

인기기사

  1. 1 법원 "헬기사격 사실"... 밀가루·계란 뒤덮인 전두환 차량
  2. 2 박정희의 전화 "내가 점심 사면 안 되겠심니꺼?"
  3. 3 김대중에게만 남달랐던 전두환, 그럴 수 있었던 이유
  4. 4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이낙연 20.6%, 윤석열 19.8%, 이재명 19.4%... 초접전
  5. 5 법원, '윤석열 사건' 1시간여 만에 심문 종료... 판사사찰 의혹 문건 공방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