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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도 처음 본 애들이 중공군 기습, 그땐 그랬어요"

[한국전쟁 70주년-길 위의 소년 4] 어제의 이웃, 오늘은 원수... 참전군인들의 이야기

등록 2020.06.26 09:53수정 2020.06.2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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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전쟁을 주도했던 많은 주역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 전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 또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식민지배보다 큰 비극이었던 분단과 전쟁. 이 이야기는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경험과 성장기다.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증언을 해준 이철옥의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진솔하다. 높고 고창한 관념의 말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구체적 삶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 기자 말

1951년 여름쯤, 소년 이철옥이 모시고 갔던 할머니를 찾아 할머니의 아들이 제주로 찾아온다. 그들은 함께 인천을 거쳐 강화로 돌아온다. 이제 전쟁발발 1년여. 초기 3개월 간의 후퇴와 약 3개월 간의 반격, 그리고 중공군 가세로 인한 재후퇴. 전세는 어느 한쪽에 일방적이지 않았다. 강화는 새로운 질서를 잡아가고 있는 때였다. 

- 강화에 돌아오신 후 어떻게 지내셨어요?
"당시 강화에 101헌병대대가 있었어요. 본대는 인천에, 강화엔 파견대가 있었어요. 그때 나는 거기 소속돼 있었어요. 정식 군인은 아니지만... 그때 소대장이 황씨라는 분, 상사 이씨, 중사 장씨, 경찰에서 파견된 형사 두 사람, 그리고 문관 하나와 나. 이렇게 한 조가 됐단 말이에요.

-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당시 황 소대장은 상이군인이었어요. 왼쪽 다리를 잃었어요. 나는 소대장을 주로 보좌를 했어요. 헌병대는 거기 적지에서 나오는 첩자들이 많아서 그들을 수색했어요. 유격대가 말썽을 부리면 그걸 조사하고 처리하는 일도 헌병대가 했어요. 형사들이 민간인 관련된 문제도 다루고."
  

당시 강화에서 활동한 24인 결사대의 회고록을 들고 있는 이철옥 선생. 민간 유격대였던 강화향토특공대의 전쟁기록이다. 유격대 부대장이었던 상사 홍종택이 썼다. ⓒ 원동업

 
- 전쟁 당시 강화도 상황은 어땠나요?
"을지병단이라고 강화도 청소년유격대가 있었어요. 공을 많이 세웠어요. 거기서 북한군과도 교전하고, 나중에 중공군하고도 교전했다고요. 애들이... 무기도 처음 보지 않아요? 다룰 줄도 모르고. 그러니까 야영할 때 식사 시간 맞춰 숨어있다가 공포를 쏴대는 거예요. 삥 돌아가면서 (상대가) 밥 먹는 순간에 기습하는 거야. 그럼 청소년들한테도 (당하는 거예요). 걔들은 처음 오는 데니까. 공산군 정예부대가 쫓겨 나는 거야. 그 당시에 쓴 작전기록 원본이 내게 있어요. 홍종택이라고 유격대장으로 있던 사람 가족들이 나한테 준 거예요. 그 사람은 나중에 육군 대위로 예편을 했어요."

- 일종의 징비록인 거로군요.
"정리한 거예요. 유격대가 만들어진 저간의 배경, 활동사항, 연락사항, 전투 배치도 같은 걸 소상하게 다 적어놨어요. 공을 많이 세워서 강화엔 그들 비석도 있어요. 홍 대장 부인은 현재 인천에 요양원에 계시고."

당시 강화는 매우 복잡한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최전방 강화도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면서 적 교란 및 정보 수집을 위해 그 지역을 잘 아는 정보 첩보 대원들이 필요했다. 접경지 특성상 적국과 아국 간엔 치열한 선무공작이나 민간침투가 상시적이었다. 당연히 작전상 요충지 확보나 진격의 교두보 확보, 적의 진격 및 보급로 등을 끊기 위한 본격적인 파괴와 전투행위 등도 상시적 실제로 전개되곤 하는 곳이었다.

금호동에서 만난 전선봉 선생이 강화 교동도 대륭시장의 '청춘브라보'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났다. 강화의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 황해도 연백시장을 본떠, 주로 황해도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시작했다는 대륭시장에서 '청춘브라보'는 유공자들에 대한 지원과 생활 유지를 위해 연 '상점'이었다. 두 번의 군 검문소를 지나고, 두 개의 삼각형 다리가 현수교를 만들고 있는 다리를 지나 우리는 교동도로 차를 몰았다. 강화도 길 중간에 강화전쟁박물관이, 625전쟁참전유공자비 등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내려 그들을 잠시 기리기도 했다.
 

이철옥이 소션병 동상에 경례하고 있다. 강화도는 역사 이래 전쟁의 땅이었다. 이철옥은 강화도 6.25참전유공자비를 찾았다. ⓒ 원동업

 
'청춘브라보'에선 전쟁 당시 청소년 혹은 청년이었던 이들이, 아직도 정정한 노인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들 말을 차례차례 들었다.

"나는 최봉렬. 1931년에 황해도에서 났고 1950년 6월 25일, 노 젓는 배를 타고 교동으로 피난을 나왔어요. 내가 열아홉 살이었던 기억이 나요. 그땐 붙들리면 인민군으로 가는 판이니까. 근데 (여기) 와보니까 뭐 먹고 살 도리가 없는 거예요. 여기는 그렇게 (남북간 전투 등 전황이) 심하지 않았어요. 그래 당시엔 고향에 쌀 가지러 가기도 하고. 그래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케이로부대(Korean Liaison Office 한국연락사무소)에 들어갔어요. 여기서 신체검사하고 군대를 받더라고. 여기 대륭초등학교 마당에서 하더라고. 군에 들어가면 일단 먹는 건 해결이 되니까.

근데 여기 나창묵이라는 연대장이 우릴 파견을 보내더라고. 바이도라고 무인도야. 거기 아군을 1개 소대를 파견을 보내더라고. 우리 부대 목적은 저 전방에서 오는 인민군하고 중공군이 전방으로 가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 주로 교량을 폭파시키는 일이었어요. 전방으로 가는 주력을 막기 위해서 거기에 파견했던 겁니다."

"저는 성은 장가고, 이름은 영호입니다. 요새 원사라 그러죠, 예비역 상삽니다. 나는 8240부대 을지 타이거여단 1연대 무전병 통신병이었습니다. 여기 강화부대 타이거여단. 우린 해주비행장 피난민 구조, 이북 침투자 후송, 전방 대규모 작전할 때 서해지구 총출동할 때, 인민군 분산을 시켰어요. 중공군 24군을 전방 못가게 우리가 붙들고 있었어요. 저는 유격군에 51년도 8월 5일날 들어갔고, 54년도 2월 22일 자로 육군에 정식 편입되면서 군번을 받았어요. 그 이전엔 군번도 없고, 계급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여기는 전부 내버린 땅이에요. 방어할 수가 없어. 여긴 황해 연백에서 나온 사람들이 지킨 땅이에요. 그러니까 왜 HID(대한민국특수임무수행자회, 2004년 참여정부는 '특수임무수행자보상법'을 제정해 군 첩보부대에 소속됐던 이들에 보상했다-편집자 주)한테는 보상을 해주면서 그 땅 지킨 사람들은 왜 보상 안 해 주냐 이거야. 우리가 지킨 땅에서 작전도 할 수 있던 거 아니에요? 근데 보상을 안 해줘. 민폐 많이 끼쳤다고."
 

왼쪽부터 최봉열, 장영호, 이철옥, 채재옥씨. 6.25 전쟁이 발발한 당시 그들은 소년 혹은 갓 스물이 된 청년들이었다 강화도 교동 대륭시장 '청춘브라보'는 이들 베테랑들의 아지트이기도 하다. ⓒ 원동업

 
"저는 채재옥입니다. 1931년생이고, 51년도 황해도 연백에서 교동도로 4월 10일 날 피난 나왔습니다. 사변이 날 적에. 각 면에 방위군이라고 있었어요. 치안 담당. 누가 해라 해서 한 게 아니고, 젊은 사람들이 반공심에 의해서 무기를 든 거에요. 죽창하고 몽둥이. 인민군 주력부대하고 전투하려니까 무장도 안 돼 있죠, 연안에서 계속 사상자만 내고 실패를 해서 다 교동도 같은 데로 피난을 나왔어요. 그래서 한국 국방부에서 무장한 사람들을 그냥 방치해 놓을 수가 없다 해서, 을지병단이란 명칭을 두고 연대 배치를 했어요. 국방부에서 관리를 했어요.

미 극동사령부에서 황해도 오폭을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아군 기지에다 왜 폭격을 하느냐. 여기 을지병단하고 군인들이 침투해서 공작을 하고 있는데.' 잘못 알고 폭격해서 사상자가 생기니까. 극동 사령부에서 국방부에 질의해가지고, '당신네가 서해에 가지고 있는 병력을 우리 극동사령부에 넘겨라.' 그래서 부대를 인수 맞아요.

그때 51년도 8월. 명칭이 어떻게 나왔냐면 '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 서부지구 작전사령부'. 그때부터 극동사령부에서 전부 에무원총, 기관포, 엘에무지, 박격포 이런 걸 전부 준 거예요. 그 전 을지병단에는 노획된 무장을 갖고 있었는데, 극동사령부에선 완전 무장을 시킨 거예요. 원래는 부대 이름이 월백투인데, 병력도 많고, 미군하고 의논해서 우리는 타이거여단이란 명칭을 갖고 부대를 운영하겠다. 그래서 을지병단을 이제 타이거병단으로 부른 거예요."
 

전쟁의 혼돈 중에도 부대는 차츰 '뉴 노멀'을 갖춰갔다. 이철옥 선생이 소속돼 있던 101헌병대대 또한 해체돼 새로 재편된다. 부대는 해체하고, 그를 옆에 두고 끌어주던 황 소대장은 거제 포로수용소로 배치된다. 철옥은 그를 따라 거제로 내려간다. 철옥에겐 어느새 부대가 그의 집이요, 함께하는 병사들은 그의 가족이었다.

(* 다음 편에서 계속)             

[지난 기사]
①열네살 때 탈북, 열일곱 때 전쟁... 그의 기구한 사연 http://omn.kr/1o0bx

②월남하다 마주친 공산군의 놀라운 한마디 http://omn.kr/1o0e3
총 든 이웃의 등장, 뺏고 뺏기던 6.25전후 피난민의 삶 http://omn.kr/1o0g2                
덧붙이는 글 이 내용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한 상태이고, 영화는 아직 어느 곳에서도 상영된 적이 없습니다. 영화제는 9월에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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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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