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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 죽었어요, 다시 한 방 쏴주세요"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대전 골령골 학살사건

등록 2020.07.02 21:17수정 2020.07.0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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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결성되고 운영되었던 관변단체였다. 보도연맹원들은 자발적 의사보다는 대부분 이승만 정권의 강압·폭력적 행정 집행 절차를 거쳐 회원으로 가입되었다. 보도연맹원 규정은 광범위하고 자의적이었다. 처음에는 좌익경력자가 보도연맹의 주요 가입 대상이었으나 점차 좌익 관련자뿐만 아니라 동네 이장이나 면장의 권유에 따라, 쌀이나 비료를 받기 위해, 다수 농민이 보도연맹원으로 가입되었다.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의 조사 결과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사이 수천 명의 대전형무소(편집자 주: 형무소는 교도소의 전 용어. 이 글에서는 당시 이름 그대로 쓴다)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된 것이 확인되었다. 당시 희생자들은 방첩대, 헌병대, 경찰 등에 의해 재판이나 법적 절차 없이 대전 동구 낭월동 산내초등학교 인근 산기슭 골령골에서 집단학살 되었다.

전쟁 중이라 병력이 부족할 텐데도 이승만은 왜 자국민을 불법으로 학살한 것일까?

1950년 6월 28일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은 트럭에 실려 산내 골령골로 호송되었다. 당시 산내 현장에는 경찰들이 외곽을 둘러서서 경비하고 있었고 골령골에는 경찰이 사전에 주민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해 파놓은 구덩이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구덩이의 깊이는 1m 50cm, 넓이는 3m, 길이는 50m 정도였다(관련기사: "허리 깊이까지 파" 형에게 동생 묏자리 파게 한 군인 http://omn.kr/1llb1).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가 산내 현장 입구에 트럭을 세워놓으면 청년방위대가 재소자를 구덩이 앞에까지 끌고 갔다. 청년방위대들은 재소자들을 구덩이 쪽으로 무릎을 꿇렸다.
 

학살 직후 ⓒ 진실위 자료

  
등을 발로 밟고 뒷머리에 사격

총살 집행은 헌병대 심용현(1918-1986, 전쟁 후 훈장 받고 성신학원 이사장 역임) 중위의 지휘로 헌병 1개 분대와 경찰 2개 분대가 담당했다( [단독] "심용현 전 성신학원 이사장, 민간인 학살 주범" 입증 문서 발굴 http://omn.kr/1jklq).

심용현 중위의 '사격개시' 명령에 따라 경찰과 헌병 각각 10명씩이 재소자들의 등을 발로 밟고 뒷머리에 총을 쏘았다. 그러고 난 후 심용현 중위와 헌병들이 권총으로 확인 사살을 했다. 청년방위대들은 시신들을 구덩이에 쌀가마처럼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이 과정에서 심용현 중위는 뒤에서 권총을 들고서, 헌병과 경찰이 사격을 주저하거나, 청년방위대가 시신을 쌓는 데 머뭇거리면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붓고 공포를 쏘았다. 당시 총살 현장을 목격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원 김아무개는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m 뒤에서 쏘면, 피와 골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 헌병지휘관이 청년방위대에게 산위에서 돌을 굴려 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

또한 헌병대는 골령골로 끌려온 이들의 눈을 가리고 나무기둥이나 미루나무에 손을 뒤로 해서 묶었다. 헌병지휘자의 구령에 따라 헌병대가 총살을 한 후 헌병지휘자가 권총으로 일일이 확인 사살을 했다. 뒤이어 소방대원이 시신의 뒤로 묶인 손을 풀고 미리 준비한 장작더미에 던졌다. 그리고 시신이 50~60구씩 모이면 불을 댕겨 화장을 했다. 이때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앗 뜨거워'라고 외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 사형수는 없었다는 전 대전형무소 형무관 이아무개의 진술에 비추어, 진실위는 골령골에서의 총살은 공식적인 사형이 아닌 임의적인 학살인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심용현 중위의 명령에 의해 확인 사살을 했던 대전형무소 경비대장 이아무개는, 그때 총알을 맞고도 죽지 않아서 고통스러워하던 한 재소자가, "부장님, 나 안 죽었어요. 나 좀(다시) 한 방 쏴 주세요" 라고 간청을 해서 그 자리에서 그 재소자를 사살하고 나서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고 진술했다.   
 

학살 직후 ⓒ 진실위 자료

   
"학살 명령은 최고위층에게서 내려온 것"

당시 산내 골령골 학살장소에서는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orean Liaison Office)의 총책임자 애버트(Leonard J. Abbott) 소령이 사진기로 학살 장면을 찍었다. 그리고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에드워드(Bob E, Edwards) 중령은 1950년 9월 23일 워싱턴의 미 육군정보부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을 학살 현장 사진 18장과 함께 보냈다. 이 보고문의 주요 내용은 이렇다.
 
북한의 라디오에서는 최근 남한에서의 잔혹성과 집단학살에 대한 의문제기가 있었다. 비록 라디오에서 상당 부분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전쟁 발발 후 남한 경찰은 집단학살을 자행해 온 것이 사실이다.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함락되었을 당시 형무소에서는 수천 명의 재소자들이 풀려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학살이 전방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 점을 볼 때, 이러한 처형 명령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위층(top level)에게서 내려온 것이다. 대전에서의 1800여 명의 정치범 집단 학살은 3일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
 
한편 1950년 7월 6일부터 7월 17일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과 경인지구 형무소에서 풀려났다 재검거된 재소자, 청주형무소에서 이감된 재소자, 그리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보도연맹원이 골령골에서 추가 학살되었다.

당시 재소자 안아무개는 "그때 대전형무소는 앞마당은 물론 공터, 감방 복도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서 끌려온 사람으로 꽉 차있었고, 영등포 형무소에서 함께 끌려온 재소자들은 형무소 앞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은 채 고개 한번 들지 못하고 다음날 저녁까지 보냈고 이때 요란한 트럭 엔진소리와 분주한 군홧발 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때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은 육군형무소 소장 백아무개 소령의 지휘 아래 헌병과 경찰에 의해 골령골에서 학살되었다. 당시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원 윤아무개는 "백아무개 소령이 총살 지휘를 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총살 집행에 동원되었던 당시 서대전지서 경찰 조아무개는 "(그때 일주일 정도 매일) 아침에 대전경찰서에 집합해서 준비된 트럭에 타고, 대전형무소에 가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을 싣고, 산내 골령골에 가서 하루 종일 총살을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산내 주민 임아무개는 "아침부터 해거름까지 총소리가 쾅쾅 났는데 약 일주일간 계속됐다. 막판 이틀 동안은 한밤중에도 총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다.

당시 영국인 언론인 알란 위닝턴(Alan Winnington)은 "1950년 7월 17일 동이 틀 무렵 재소자들의 학살이 이어졌다. 그 전날인 7월 16일에 민간인 100명씩 실은 트럭 37대가 골령골 계곡으로 이동했으며, 여성을 상당수 포함한 인원 3700명이 살해되었다"며 1950년 그의 기사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에 기록했다.
 

당시 영국인 언론인 알란 위닝턴(Alan Winnington)은 “1950년 7월 17일 동이 틀 무렵 재소자들의 학살이 이어졌다. 그 전날인 7월 16일에 민간인 100명씩 실은 트럭 37대가 골령골계곡으로 이동했으며, 여성을 상당수 포함한 인원 3700명이 살해되었다”며 1950년 그의 기사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에 기록했다. ⓒ 진실위 자료

  
돈다발 주고 목숨 건져

1950년 7월 15일 수감자 박아무개의 가족은 대전형무소 형무관에게 돈다발을 주었다. 그러자 돈을 받은 그 대전형무소 형무관은 산내 골령골로 수감자들을 총살하고자 이송할 때, 박아무개를 트럭 맨 뒤에 실었다가 물에 떨어뜨려 살려주었다. 당시에도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었다.

돈의 힘으로 살아난 박아무개는 자기와 함께 트럭에 실려 골령골로 끌려간 친구 우대식의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했다. 결국 아들의 소식을 들은 우대식의 부친과 처 등은 우대식의 시신을 찾기 위해 골령골로 갔다. 그러나 학살 현장에는 다른 희생자들의 시신이 겹겹이 쌓여 있고 한여름 더위로 심하게 부패해 있어 아들의 시신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당시 골령골에서 학살 당한 여운신의 모친도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학살지로 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 당시 골령골에서 많은 시신이 너무 광범위하게 매장되어 있었고 부패도 많이 되어 있었다. 여운신의 모친은 겹겹이 싸인 시신 속에서 아들을 찾기 위해 여러 사체를 들추었다. 시신들의 사지가 떨어져 나가고 부패와 송장 썩는 냄새가 너무 심해 여운신의 모친은 결국 아들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

한편 대전형무소는 인민군 점령 당시 폭격 때문에 건물의 약 75%가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28 수복 이후 대전형무소에는 1000명 이상의 재소자가 수감되었다. 따라서 대전형무소는 수용시설뿐 아니라 식량·의약품 등도 부족해 아사·병사하는 재소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럼에도 1950년 12월 말 서울에서 2000명 이상의 재소자가 대전형무소로 추가 이감되면서 형무소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당시 유엔 민사처(UNCACK/UN Civil Assistance Command, Korea)는 1951년 1월 31일자 주간 보고서에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상태는 여전히 안 좋았다. 1950년 12월 21일부터 1951년 1월 20일까지 439명이 죽었다. 대전형무소장은 의약품·음식 그리고 침구류의 심각한 부족을 극복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더구나 부역 혐의자들은 충남의 각 지서나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해 이미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 보니 고문과 가혹행위로 건강이 악화된 재소자들이 형무소의 열악한 수용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유엔 민사처는 1951년 6월 13일자 주간 보고서에 "재소자들 면담 결과, 이들의 자백을 받기 위한 고문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고문은 완강한 미결수에게 효과적이었고, 특히 정치범들에게는 예외 없는 법칙이었다. 1951년 5월 24일 강경경찰서 유치장의 미결수는 하루에 30번의 구타를 당했고, 조치원경찰서 유치장의 미결수는 물고문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은 1·4 후퇴 시기인 1951년 1월 13일 부산형무소로 대거 이감되었다. 영하 14도의 추운 한겨울 이감으로 질병과 굶주림으로 허약해진 많은 재소자들이 대전역에서 화차에 실리거나 기차로 부산형무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추위와 기아로 죽어갔다.
 

진실위가 발굴한 학살 희생자 유골 ⓒ 진실위 자료

  
한겨울 형무소 마당에서 동사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이송 중 기아와 추위로 사망하기도 했지만, 이후 부산형무소 수감 중 형무소의 열악한 수용 상황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형무소 감방이 수용 인원을 초과했기 때문에 이송된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을 개조한 공장에 수감하거나 형무소 마당, 심지어 형무소 밖에 수용했다. 그 결과 엄동설한에 형무소 마당에서 동사한 재소자도 많았다. 이들은 모두 기아와 추위에 방치되었던 것이다.

전 부산형무소 형무관이었던 김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재소자 한 명이 죽었는데, 그 옆 재소자가 죽은 것을 신고하지 않고 자신이 며칠 동안 죽은 재소자의 밥을 몰래 타 먹은 일도 있었고, (또 시신과 좁은 감방에서 며칠씩 함께 지내다 보니) 전염병이 돌아 많은 재소자들이 사망했다.
 
지난 2010년 진실위는 골령골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대전형무소에서는 1950년 6월 28일경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 최소 1800여 명 이상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충남지구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집단살해 되었다.
 
진실위 진실규명으로부터 6년이 흐른 지난 2016년 정부는 골령골 학살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골령골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난 2018년 정부는 평화공원 조성을 위한 예산을 확보했다. 하지만 정부가 골령골 평화공원 설계를 국제공모하기로 하면서 2024년에야 평화공원이 조성될 전망이다.

한편 지난 6월 27일 한국전쟁 70년 대전산내학살사건 희생자 합동추모제가 골령골에서 열렸다. 이날 천주교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장 김용태 신부는 이렇게 강조했다.
 
골령골 학살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야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이 가능하다. 학살자의 목에서 훈장을 회수하고 그들이 누운 자리를 현충원에서 치워버려야 한다. 그때 비로소 평화와 화합의 길이 열리게 된다.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의 가해자가 훈장 받고 현충원에 누워있기보다 피해자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고 처벌받는 사회를 우리는 언제쯤 만들 수 있을까.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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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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