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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 횡포에 맞선 세종의 정신 승리?

[실록 읽어주는 여자]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등록 2020.07.06 10:38수정 2020.07.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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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코로나19의 창궐, 극우세력의 '역사 뒤집기', 일본의 무역 도발, 게다가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의 난기류까지 더해져, 그 어느 때보다 한국 외교의 역량과 방향성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에 지난 기사("명나라 사대는 성심껏" 잠 못 이룬 세종의 속뜻 http://omn.kr/1o3jk)에 이어, 600년 전 조선의 외교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일전에 중국으로 보내는 '사람 조공'에 대해 소개한 바 있는데요("조선국에 가서 잘생긴 여자 몇 명 간택해 오라" http://omn.kr/1o05l). 조선에서는 그들 공녀(貢女) 외에 '화자(火者)'라는 부류의 사람들도 다수 중국의 황제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흠차내사(사신으로 파견한 환관) 한첩목아 등이 예부(중국 교육부·외교부)의 자문(외교문서)을 가지고 오니..."조선 국왕에게 알려서, 화자를 데려오게 하고...짐이 안남(베트남)에서 화자 삼천 명을 데려왔으나, 모두 우매하여 쓸 데가 없다. 오직 조선의 화자가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을 맡겨 부릴 만하다"...임금이 사적으로 한첩목아에게 말하였다. "황제의 뜻은 어떠합니까?" 한첩목아가 말하였다. "삼사백 명 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은 심으면 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태종실록 7년 8월 6일)
 
중국에서 온 사신이 황제의 뜻이라며 화자를 삼사백 명이나 보내라 합니다. 이에 대해 태종은 '씨를 심으면 수확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많은 화자를 구할 수 있겠느냐'며 난감해 합니다.

이들의 대화에서 화자란 거세한 어린 남성으로, 중국에 데려갈 환관 후보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호칭이 화자일까요?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생식기를 제거한 후 황궁에서 노역을 시키는 죄인의 남자 자손인 엄할화자(閹割火者)의 줄임말이라 보기도 하고요. 책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거세할 때 불로 지져 마무리했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 '남자(人)'에게서 고환을 가리키는 점 두 개가 떨어져 나간 것을 형상화하여 '화(火)'자를 쓴다는 설도 있습니다.
 

19세기 조선 환관의 초상화 ‘내시진영도內侍眞影圖’ ⓒ 조선민화박물관

 
첨지사역원사(외국어 통번역 담당 기관인 사역원의 종4품 벼슬) 배온을 보내 어린 화자를 거느리고 북경에 가게 하였다. 그 주본(황제에게 올리는 글)은 다음과 같다. "영락 21년(1423년) 8월 18일에 흠차소감(사신) 해수가 본국(조선)에 도착하여 황제의 명을 받들어 '네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서른 내지 쉰 명의 어린 화자를 뽑아서 거느리고 오라' 라고 전했으므로, 삼가 이를 뽑아 어린 화자 조지 등 스물네 명을 보내드립니다. 그 이름과 나이는 조지·김수명 21세, 임귀봉 19세, 김유·임득생·안경·김중 등은 18세, 박의·하오대·이군송 등은 17세, 이선·정융·정입 등은 16세, 최의산·이충진·김고성 등은 15세, 박수민·박전명 등은 14세, 김녹·최존자·강중·이전금·신득명 등은 13세, 이추 11세입니다." (세종실록 5년 9월 9일)
 
공녀처럼 화자도 원 간섭기부터 비롯된 '사람 조공'입니다. 위와 같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에서 명으로 보낸 화자들의 인원과 나이 등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원나라로 9회에 걸쳐 100여 명, 조선에서는 명으로 15회에 걸쳐 207명의 화자를 보냈습니다.
 
고려의 환관은 본래 계보가 백성이 아니면 천민·노비였다...원 세조(世祖)에게 (고려인 환관) 몇 명을 바쳤는데, 이들은 궁궐 안에서 시중드는 일과 궁궐 재물을 관리하는 일을 매우 잘하였다. (원 황제의)...은총이 매우 후하였다...이를 선망하고 따라 배워...불과 수십 년 사이에 거세한 무리들이 매우 많아졌다. 원의 정치가 점차 어지러워지며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나라(고려)에서 (원 황제에게) 청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들의 힘에 의지...고용보 등과 같은 자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고려)을 향해 짖으며 (원 황제에게) 헐뜯고 거짓말을 꾸며 재앙을 만들어냈다.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서문)

예부(중국 교육부·외교부)의 자문(외교문서)..."일찍이 조선국에서 화자 수십 명을 찾아 가지고 궁 안에 들어오게 한 의도가 관직을 임명하여 궁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는 데 있었으니, 국내(중국)와 국외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이후로부터 자주 이 사람을 사자(使者)로 삼아 본국(조선)에 나아가게 했다." (태조실록 7년 6월 24일)
 
그들은 본래 고려·조선의 천민 혹은 평민 출신인데, 영민한 덕분에 황제의 총애를 받고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통역을 거치지 않고도 소통이 가능하고, 우리나라와 중국 양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자신이 모시는 황제의 의중을 잘 알기에, 고려·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는데요. 대체로 공녀나 사냥용 매·개 등 조공품의 검수·수송을 담당했습니다. 조선 초기의 경우, 명에서 파견된 다수의 사신들이 고려인 혹은 조선인 화자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윤봉이라는 인물은 무려 열두 번이나 사신의 자격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윤봉은 본국(조선)의 화자이다. 옛날 서흥(황해도 서흥군)에 있을 때에는 몹시 가난하고 천하더니, 명나라 영락제 재위 기간에 발탁되어 북경에 나아가 지금까지 황제 세 명을 모셨다. 황제를 속여 해동청(송골매)·스라소니·검은 여우 등을 잡는다는 일로 해마다 우리나라에 와서 한없이 탐욕을 부리고 제멋대로 행동했다...본국의 사람으로서 본국에 해가 되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응대하기에 지쳐 죽게 하였으니...옛날부터 천하 국가의 혼란은 환관들 때문인데,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오는 자가 모두 이런 무리이니 중국의 정치도 알만하구나. (세종실록 14년 12월 2일)
 
위의 기록은 윤봉에 대한 사관의 평가입니다. 조선 화자 출신인 명 사신의 대체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요. 신분 상승하여 조선을 방문한 그들은 자신들을 낯선 타국으로 보낸 고국에 대한 저항감 때문인지 보상 심리의 발로인지 극심한 탐욕과 행패를 부렸습니다. 황제의 명을 사칭하여 귀한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요구할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사적 욕구를 채우는 일에도 꼼꼼했습니다. 노후 대책 마련을 위해 논밭과 금전 등을 달라 하고, 친인척에게 관직 하사를 요청하는가 하면, 자신의 고향을 승격시켜 달라는 등 요구가 끝이 없었습니다.

조선 출신 사신들의 횡포
 

대한제국 시대에 촬영한 경기개성 태평관의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약 이백 상자나 되었다. 궤짝 한 개를 메고 가는데 여덟 명을 부려야 하는데, 궤짝을 멘 사람들이 태평관(태평로에 있던 사신 숙소)에서부터 사현(홍제동에서 오르는 무악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끊임이 없었다. 사신의 요구가 많은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세종실록 11년 7월 16일)
 
명 사신이 조선 정부로 받은 어마어마한 물품을 공수하는 장면이 실록에 그려져 있습니다. 한 상자를 운반하는데 여덟 명이 필요하며 짐이 이백 상자이니, 인부가 무려 천육백 명이나 동원됐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이 있던 현재의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무악재역까지 약 3km로 측정되고요. 짐을 멘 천육백 명의 사람들이 약 3km의 긴 줄을 이루는 광경을 보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임금이 늘 (사신) 창성이 염치없이 재물 탐하는 것을 걱정했다. 이날 창성이 대언(임금 비서) 김자를 보고 성내었다. "전하는 어찌하여 내 말을 듣지 않는가." (세종실록 10년 9월 23일)

"명 사신 이상이라는 자는 가는 곳마다 번번이 사람을 구타한다니...창성이 영접도감의 은 식기를 훔쳐갔으며, 또 지나가는 지방에서 의자라든가 걸상 같은 물건도 좋은 것이 있으면 보는 대로 탈취해 가고, 또 민간인의 말을 빼앗아 간 것" (세종실록 11년 8월 12일)

임금이..."창성이 청구하는 것은 끝이 없고, 하나라도 마음에 불쾌함이 있으면 바로 조선의 관리를 매질하는 등 모욕이 지나치니,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는가?"...황희와 맹사성 등이 함께 의논해 아뢰었다..."분노를 품고 원한을 쌓아서 중국 조정에다 거짓으로 호소한다면, 중국 밖에 있는 나라에서 일일이 변명하기가 어려워 훗날에 큰 걱정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하오니 능욕을 꾹 참고 우대하여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세종실록 11년 6월 19일)
 
조선인 출신뿐 아니라 중국인 사신도 황제의 위세를 믿고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정부에 갖가지 물품을 요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머물던 곳에서도 좋은 물건이 보이면 훔쳐가고, 민간인의 재물까지 빼앗아갑니다.

게다가 그들은 조정의 인사에 개입하고, 임금의 대리인인 대언 등 조선의 관료에게 서슴없이 폭력도 행사했는데, 이는 국가와 최고통수권자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다 참다 대책 수립을 위한 국정 회의를 합니다. 사신들에게 논리적으로 따질지, 아니면 그들의 행태를 황제에게 알릴지 등을 놓고 수차례 토론하지만, 매번 '전략적 인내'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우선, 그들은 비공식 통로를 통해 중국 황제와 관료들에게 로비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황실과 조정의 내밀한 정보를 들을 수도 있기에, 조선 정부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고요. 무엇보다 그들이 조선에 불리하거나 거짓된 정보를 황제에게 흘리면, 황제와 물리적 거리가 먼 조선 정부에서는 그 뒷감당이 힘듭니다. 그러니 입술을 깨물며 그들의 '갑질'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사대의 예를 함이 지나치다고들 말한다는데, 최근 중국이 매년 사신을 보내 상을 내려줄 정도로 특별히 융숭하게 대우하는 일이 일찍이 없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어와서 나에게 말하고, 몰래 논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세종실록 10년 윤4월 18일)
 
사신들의 부당한 청구를 번번이 수용하자, 사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관료 사회마저 동요합니다. 심지어 명에 대한 사대가 너무 심하다며 임금의 '뒷담화'를 하고, 이것이 세종의 귀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태종 때부터 이어온 사대 외교의 효과는 명 황제의 '신뢰 계좌'에 차곡차곡 쌓인 모양입니다. 어느 날 황제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황제가 칙서에서 말하였다. "이제부터 (명나라) 조정에서 보내는 환관 등이 왕의 나라에 도달하거든, 왕은 예의로만 대접하고 물품은 주지 말라. 조정에서 구하는 모든 물건은 오직 어보(황제의 도장)를 찍은 칙서에 의거해 마땅히 부쳐 보내고, 짐의 말이라며 (사신이) 말로 전하면서 구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다 들어주지 말라. (조선) 왕의 부자가 (명) 조정을 공경히 섬겨 오랜 세월을 지냈으되, 갈수록 더 극진히 함을 짐이 깊이 아는 바이며, 가까이에 있는 환관들이 이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왕은 염려 말라." (세종실록 11년 12월 13일)
 
사신들로 인한 곤욕을 황제도 알게 된 모양입니다. 황제의 도장을 찍은 외교문서에 기재된 청구 물품 외에, 황제의 말이라 사칭하며 사신이 요구하는 물품은 내어주지 말라는 황제의 공식 문서가 도달합니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할 것 같자, 그간 조선에서 대대로 보여 온 지성사대로 미루어 진정성을 믿으니, 환관들의 거짓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우대언(임금 비서) 황보인에게 사신을 문안하라 명하니..."창성이 말도 하지 않고 보지도 않으며, 또 답례도 하지 않았습니다." 창성이 입국한 뒤로 높고 낮은 임금의 대리인을 볼 때마다 모두 그러했으니, 이는 모두 물품을 주지 않아서 화난 때문이었다. (세종실록 12년 7월 24일)

우부대언(임금 비서) 남지를 보내 사신을 문안하고..."앞서 온 황제의 칙서에서 '(사신의) 입으로 전하는 짐의 말은 모두 듣지 말라.' 하셨사오니, 사신의 말을 통해 물품을 바치는 것이 사대의 예에 합당하겠습니까?"...(사신이) "이 나라는 지극히 불손하다. 나중에 (명에 대해) 반역하려는 것이겠지?" (세종실록 12년 8월 4일)
 
사신들은 여전히 황제의 전언이라며 외교문서에 기입되지 않은 물품들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전의 칙서에, 사신이 구두로 청구하는 물품은 주지 말라는 황제의 당부가 있었다며, 이를 어기면 사대의 예에서 어긋난다는 논리로 대응합니다. 자신들이 모시는 황제의 명이니 이들도 도리가 없습니다. 조선 관료들에게 분풀이를 해대며, 꼬투리를 잡을 기회만 엿봅니다.
 
진응사(매 조공을 위해 보낸 사신)의 통사(통역사)가 북경에서 돌아와 아뢰었다. "태감(환관의 우두머리) 윤봉이 황제의 명을 전했습니다. '(조선) 왕이 지성으로 대국(중국)을 섬기는데 한 가지도 어김이 없었으며...짐이 항상 두르는 허리띠의 고리를 지금 특별히 함에 넣어 준다.'" (세종실록 12년 4월 20일)

임금이 가까이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창성이...'황제께서 하사하신 허리띠의 고리를 왜 차지 않으십니까?'...이 사람이 기필코 내 과실을 찾아내서 이를 드러내려는 수작이다." (세종실록 12년 7월 28일)
 
물품 요구에 세종이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자 사신은 태세를 전환하여, 황제가 특별히 하사한 허리띠의 고리를 왜 차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작은 실수라도 잡아내려 눈에 불을 켠 그들 때문에 대책 회의를 소집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정도 곧 올바른 도리에 입각해 대처하는 것이므로 당당하다고 말합니다.
 
임금이 (비서실장) 안숭선에게 말하였다..."우리나라에서 황제의 칙서를 공경히 받들어 물품 주는 것을 행하지 않은 것을 누가 그르다고 하리오. 고금과 천하에 정도로써 행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 자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세종실록 13년 8월 4일)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누군가가 조선의 매 조공이 부족하다며 황제를 부추긴 모양입니다. 황제는 중국의 지배 권역이지만 여진족이 거주해온 땅으로 사람들을 보내 매를 잡겠다며, 이때 필요한 식량과 인원 등을 제공하라고 합니다. 조선인이 섣불리 이곳에 들어가면 여진족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는 외교안보적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좌대언 김종서·우대언 남지·좌부대언 송인산 등이 아뢰었다..."사신이 오는 것이 어느 해나 없을 때가 없었으며 매번 상을 내렸는데, 금년에는 유독 없으니 아마 (황제에게) 이간질의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채포군(매 사냥꾼)을 보내 매와 표범을 잡으니 이것은 의심할 만한 단서입니다." (세종실록 13년 10월 16일)

좌대언(비서) 김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였다..."황제가 사신을 보낼 때마다 칙서에서 (지성사대의) 아름다움을 칭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이번 칙서에 있는 말은 마치 고아를 농락하는 것 같으니, 언제 황제가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느냐?" (세종실록 13년 8월 19일)

원한을 품고 조선에 불리한 일을 저지르는 사신들을 구슬리기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수시로 소집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국가와 최고통수권자의 가장 아픈 곳을 강력하게 찔러버립니다. 황제에게 바칠 매를 잡는다며 우리의 함경도에까지 군사와 사냥꾼 수백 명을 이끌고 들어옵니다. 어떻게 이간질을 했는지 황제와 쌓은 그간의 탄탄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국토주권을 짓밟은 것입니다.

세종의 정신 승리?
 

청국 사신 ⓒ 가회민화박물관

 
아마도 그들은 승리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제는 조선이 자신들의 무서움을 알리라, 그래서 요구를 모두 수용하리라 기대하며 의기양양했겠지요. 그러니 세종은 황제가 제시한 원칙과 사신들의 요구가 상충되지 않을 그 어느 지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임금이 가까이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기후의 춥고 더움에 따라 의복을 주는 것이야 잘못 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주인이 손님에게는 본래 증여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제 사신이 머무르면서 겨울을 지내게 되는데, 어찌 모른 체하고 따뜻한 옷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신에게는 예전처럼 증여하고, 두목(중국 사신단을 수행하는 군인 겸 상인)에게는 조금 줄여서 주는 것이 좋겠다." (세종실록 14년 6월 11일)
 
사신이 자신과 수행원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방한용품을 요청하자, 이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조선의 조정에서는 토론이 벌어집니다. 이때 세종은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사신이 원하는 물품을 주자. 그러나 이는 굴복하여 사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외교문서에는 기재되지 않은, 사신이 구두로 요구하는 물건은 일체 주지 말라는 황제의 엄명을 어기는 일 또한 아니다. 오히려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귀한 손님을 대하는데 야박하면 곤란하다' 라며 동서고금 통용된다는 '집 주인의 손님 접대 의무론'을 내세웁니다.

이는 세종의 '정신 승리'일까요? 제게는 명분과 실리가 양립하는, 즉 중용(中庸)의 미를 외교에서 발휘하려던 한 국가지도자의 안간힘 그리고 묘수로 보입니다.

600년 전 중국과의 외교사를 접하며,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다자 외교를 돌아보게 되는데요. 일본 정부뿐 아니라 네오콘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의 외교관들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안착을 위한 노력을 사사건건 방해해왔음이 존 볼턴 전 미국 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정부의 진척 속도가 불만족스러운 북한은 '봄이 온다'며 잡았던 손을 놓고 무력행사를 예고합니다. 두더지잡기 게임처럼, 한 곳을 막아내면 금세 다른 곳에서 악재가 튀어나오는 형세입니다. 살얼음 낀 겨울 내를 건너는 듯한 우리의 외교, 이제 어떻게 명분과 실리를 잡는 중용의 미를 발휘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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