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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71년 만에 전몰용사 인정, 6살 아들이 기억한 '해골마크'

기록 없다던 국방부, 1949년 옹진전투 방흥용 이병 뒤늦게 '전사' 확인... 군사망진상규명위 역할

등록 2020.07.07 12:15수정 2020.07.0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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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황해도 옹진지구전투 도중 부상을 입고 치료 도중 목숨을 잃은 고 방흥용씨의 아들 방철순씨가 2일 오전 충청남도 서산 탑곡1리 경로당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71년만에 전몰용사로 인정 받은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고 방흥용 이병은 병적자료에 ‘군번2901886 방흥용’ 기록이 남아 있음에도 생년월일 및 주소가 미기재되어 참전사실 확인을 받지 못하다가 71년만에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의해 전사자로 인정을 받았다. ⓒ 유성호

 
77세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담담하게 과거를 술회하던 그는 "71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하며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아버지의 유골함과 마주했던 6세 아이로 돌아간 듯, 그는 "평생 응어리를 품고 살았다"라며 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방철순(77)씨의 아버지 고 방흥용(1922년생, 호적엔 1924년으로 등록) 이병은 1949년 6월 황해도 옹진지구전투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치료 도중 목숨을 잃었다. 북한은 6.25전쟁 이전인 1949년 5~6월 황해도 옹진반도 일부 지역(현 휴전선 이전 38선 기준 대한민국 영토)을 여러 차례 공격했는데, 이때 방 이병이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옹진지구전투는 '유사 이래 최대 격전'으로 평가될 정도로, 6.25전쟁 이전에 있었던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 중 하나였다.

1944년생인 방씨는 아버지 방 이병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 유골함을 받아든 게 6살이었던 터라, 딱 한 장면만 지금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1922년생 동갑인 어머니, 아버지는 열여덟에 결혼(1939년)하셨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왜정(일제강점기) 때 징병으로 끌려가버려서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고 해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죠. 당시 만주까지 끌려갔던 아버지는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고 그제야 고향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습니다. 근데 아버지는 '왜정 때야 끌려갔지만 나라가 생겼는데 왜 못 가겠느냐'며 군에 입대하셨어요. 그리고 휴가 때 나와 제 손을 잡고 면사무소에 같이 갔었는데 그게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에요. 군복 바지를 입으셨고 팔뚝에 해골 마크가 붙어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무섭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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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방흥용씨의 아들 방철순씨가 지난 일을 회상하며 71년이 지나서야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이후 기억에 남은 장면은 사망통지서를 쥔 채 슬피 울던 어머니, 그리고 6살 상주로서 치렀던 장례식의 풍경뿐이다.

"편지가 왔단 소식에 냇물에서 빨래하던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라나섰죠. 사망통지서가 와 있더라고요.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우셨어요. 6살인 저야 그 순간 뭘 아나요. 돌아가셨다는 게 뭔지, 죽었다는 게 뭔지 잘 모르는 나이잖아요. 얼마 후에 시체가 들어온다며 동네 사람들이 저를 앞세워 어디론가 갔어요. 팔뚝에 해골 마크가 있는 군인들이 직접 유골함을 들고 우리 집까지 가더라고요. 그때 열아홉 먹은 삼촌과 상주 역할을 했는데 직접 유골에 베 헝겊도 씌우고 그랬어요. 화장만 했지 뼈를 빻진 않았더라고요. 그리고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절을 하다 보니 나중에 무릎이 빨갛게 다 까졌죠."

갑자기 끊긴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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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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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방흥용씨의 부인이 1952년 면장으로부터 받았던 표창장. 표창장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공적을 세우고 전몰한 애국 열사의 유가족’이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 유성호


방 이병 사후 남은 가족들은 면사무소로부터 식량지원, 농사지원 등을 받을 수 있었다. 방씨도 학비를 면제받아 중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방씨는 어머니가 1952년 면장으로부터 받았던 표창장을 지금도 갖고 있다. 누렇게 변한 표창장에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공적을 세우고 전몰한 애국 열사의 유가족"이란 문구가 담겨 있다.

하지만 방씨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갑자기 모든 지원이 끊겼다. 당시 군사원호법이 시행되면서 전사확인증 등 증빙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 것이다. 학업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방씨는 곳곳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가장을 잃은 집안과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경제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원이 끊긴 이후에) 너무 힘들었죠. 농사 조금 지어서 먹고 살 수가 있나요. 빚이 늘어가니 그나마 있던 논도 팔게 되고... 고등학교에도 못 가고 말끝마다 '호로XX' 소리 들었던 삶이 평생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시대에 아버지 없이 사는 것의 어려움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릅니다."

먹고 살기 바빴던 시절을 지나 노년이 된 방씨는 2014년 다시 국방부의 문을 두드렸다. 단순히 지원과 관련된 문제가 아닌, 아버지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방부의 답변은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병적자료에 '군번 2901886 방흥용'이 남아 있음에도 생년월일 및 주소가 기재돼 있지 않아 동일인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따.

"그땐 아주 실망했죠. 나라 지키다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행정을 엉터리로 하는 모습을 보며 모든 게 원망스럽더라고요."

'군번 2901887 방흥용' 추적

그러던 중 방씨는 2018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아래 위원회)'의 존재를 알게 됐다. 신문을 보다 우연히 '군에서 사망한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내용을 발견한 그는 곧장 진정서를 넣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2018년 특별법 제정으로 만들어진 위원회는 "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 중 의문이 제기된 사건에 대해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고 그 관련자의 피해와 명예회복, 나아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회복과 인권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난해 2월부터 약 1년 동안 조사를 진행한 위원회는 아버지 방 이병과 '군번 2901886 방흥용'이 동일인물임을 밝혀냈다. 위원회는 "사망 구분에 관한 사항을 전사자로 재심사할 것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결정문을 국방부에 보냈고, 국방부는 지난 3월 방 이병을 전사자로 최종 인정했다.

위원회는 우선 병적자료에 남아 있는 '군번 2901886 방흥용'을 추적했다. 생년월일과 주소는 없었지만 학력은 '국민졸(현 초등학교 졸업)'로 기재돼 있었는데, 이는 실제 방 이병의 학력과 같았다. 또 군번 2901800~2901999의 200명을 전수조사한 결과 모두 1949년 3월 5일 18연대에 입대한 이들이었고, 주소가 확인되는 138명 중 114명의 주소가 충남이었다. 18연대는 실제 황해도 옹진지구전투에 참여한 바 있으며, 방 이병 역시 충남 서산 출신이었다.

위원회는 1921~1932년생(당시 입대 가능 연령) 중 '방흥용'이란 이름을 가진 이들 역시 전수조사했다. 4명의 방흥용 중 1명만 '하사'로 군복무한 사실이 조회됐고, 나머지 3명 중 2명은 실제로 군복무 사실이 없는 이들(생존해 있는 자녀와 직접 통화)이었다. 즉 나머지 1명인 실제 방 이병이 군번 2901886의 주인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아들 방씨가 기억하고 있는 '해골 마크' 또한 중요한 단서로 작용했다. 위원회는 18연대 창설요원이었던 이들과 2000년 제18보병연대가 발간한 <진백골전사>를 통해 '1948년 11월 20일 18연대 창설 1기생인 백복환 상사가 부대명을 건의했고 이후 부대 간부들이 회의를 개최해 백골 부대와 백골 마크를 부대 상징으로 결정했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창설요원들은 "18연대 부대원들의 군번 앞 세 자리가 '290'이었는데, 이것이 '2×9=18'에 따라 18연대에 부여된 군번"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방씨가 지금껏 보관하고 있던 면장 표창장(1952년) 역시 아버지의 전사 여부를 밝혀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위원회는 표창장 명의자의 이름과 서산군 사령등사부에 기재된 당시 면장의 이름이 일치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한 표창장의 서체 및 직인과 당시 면장이 작성한 다른 문서(농지개혁 관계 통계 조회의 건)의 서체 및 직인을 비교해 표창장을 진본으로 판단했다.

묘 앞에 무릎 꿇은 77세 아들
  

71년만에 전몰용사 인정 받은 고 방흥용 이병 유가족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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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방흥용씨의 아들 방철순씨가 오후71년만에 국방부로부터 전몰용사로 인정 받아 사망확인서를 들고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 ⓒ 유성호


방씨는 아버지가 살았던 충남 서산에서 여전히 거주 중이다. 최근 부쩍 귀가 어두워져 보청기를 낀 채 10여 년 전부터 해오던 아파트 경비원 일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일 만난 방씨는 육군참모총장 직인이 박힌 '사망확인서'를 든 채 마을 어귀의 선산으로 향했다. 전사로 인정받은 후 처음 사망확인서를 아버지에게 내보인 날이었다. 묘 앞에 선 그는 하염없이 사망확인서를 내려다봤다. 한동안 말이 없던 방씨는 무릎을 꿇으며 아버지 묘 앞에 '전사'라고 적힌 사망확인서를 내려놨다.

"아버지, 이제야 이렇게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됐습니다. 평생 먹고 사느라 힘들었지만 어머니가 저를 이렇게 다 키워주셨습니다. 저도 안 해본 것 없이 다 하면서 자식들 가르쳤습니다. 아버님, 이제 맘 편히 어머님과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세요."
#전쟁 #전사 #국방부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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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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