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진 않아도 모두 괜찮은 인생입니다

김효은 그림책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읽고

등록 2020.07.10 16:54수정 2020.07.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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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붐비고, 급하고, 답답하고, 먼지나고. 나에게 지하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다. 하루에도 수십만의 사람들이 머물렀다 떠나기를 반복하는 그곳은 그런 이미지만으로 어떤 정겨운 이야기 거리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는 오랫동안(일거라고 생각된다) 섬세하게 관찰하여 그림을 그리고, 따뜻한 시선의 상상력을 더해 글을 붙였다.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인 그들 N분의 1의 이야기 몇 개가, 지하철이 서울 시내 한바퀴를 도는 동안 펼쳐진다. 김효은 작가의 그림책 <나는 지하철입니다> 이야기다. 


그 몇 개의 이야기에서 나를 찾거나, 혹은 내 친구, 가족, 그저 아는 사람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이를 업고 지하철을 탄 엄마는 몇 년 전의 나. 보따리 품고 가는 할머니는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고개 푹 숙인 채 이어폰 하나에 우울한 기분 의지하고 가는 여학생은 옆집 중학생. 복잡한 출근시간 남들과 반대 방향으로 서서 갈 곳을 고민하는 청년은 몇 년 전 S대 붙었다고 자랑했던 어떤 엄마의 아들.

당신의 이야기를 상상합니다
 

김효은 작가의 그림책 <나는 지하철입니다>. ⓒ 문학동네

 
열량 남짓의 지하철 안. 그 중 어느 한 칸에 타버린 수많은 우리. 그러나 얼굴을 쳐다보거나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다. 어쩌다 할머니 한 분 끼어 앉아 손녀뻘 아이에게 버터맛 사탕 하나 건네며 몇 살이냐를 시작으로 말을 거는 것 말고는.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 엄청난 인연으로 그곳에 있다. 나를 포함해 그곳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말풍선 하나씩 품고 있다. 비록 나는 다른 이의 말풍선을 볼 수는 없지만, 누구든 그것을 데리고 탄다는 사실을 이젠 안다.

단 몇 분이든 몇 시간이든 그 한 칸은 어느 하나 소소하지 않은 이야기들의 집합소다. 그다지 화려하진 않아도 중요하지 않은 생은 어디에도 없겠구나.

내 맞은 편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어떤 아저씨의 낡은 구두에는 어쩌면 고집스럽게 그것만 신는 아저씨의 이야기가 있을 테고, 갓난아기 품에 안은 아기 엄마가, 옆에 앉아 '엄마 엄마' 하고 계속 불러대는 큰 아이를 모른 척 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당신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면, 나는 훨씬 더 여유로워지고 따뜻한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손 내밀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걷는 발걸음은 바빴습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지나치며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길 위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주름진 손을, 가지각색의 얼굴을, 다양한 표정의 발을 그림으로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이 하나둘 쌓이고, 나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길 위에 있던, 가까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에 대해.' -김효은

<나는 지하철입니다>는 어른이 읽어도, 아이가 읽어도, 혹은 같이 읽어도 좋은 그림책이다. 한번 보아도 좋지만 '자세히 보면 엄청 예쁘고 오래보면 무척 사랑스러운' 책이다. 아이와 손 잡고 탔던 지하철 안엔 그리 티나게 살진 못해도 짧은 인생 이야기 하나쯤 해줄 수 있는 어른들과 언니 오빠들이 있다는 걸 아이도 넌지시 알게 될까. 문득 오랫동안 아이용품만 주고 받던 육아동지에게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나는 지하철입니다

김효은 (지은이),
문학동네, 2016


#나는지하철입니다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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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떠오르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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