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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의 딸과 초혼, 10여년 뒤 사별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4회] 민중이 원하지 않는 정책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

등록 2020.07.11 15:07수정 2020.07.1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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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1868-1953) ⓒ 독립기념관

 
19세기 말 조선사회는 격변기였다.

큰 물줄기는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동양으로 밀려오고, 재빨리 여기에 편승한 일본이 서구에서 배운 행태를 그대로 조선에서 시행하고자 하면서 벌어진 격변이고 격동이었다.

조선 내부에서도 변화의 파고가 일고 있었다.

'서세동점'에 맞서 '동도서기론'이 제기되고 이참에 우리 것을 찾자는 동학이 창도되었다. 천주교 전래와 동학창도는 백성들을 각성시키고, 차츰 사회변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1840~42년 아편을 둘러싸고 청국과 영국의 전쟁에서 청국이 패하여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태평천국난은 여러 형태로 조선지식층과 민중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최제우가 1864년 유불선 동양 3교와 민족고유의 시천(侍天)사상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도하면서 그동안 봉건질서와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신음하던 백성들이 행동으로 나왔다.

이시영이 24세가 되는 1891년 12월 동학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에 집합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고 1893년 2월 동학간부 40여 명이 대궐 앞에서 교조신원을 위한 복합상소를 올린데 이어 3월에는 보은집회에서 '척왜척양'을 내걸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비슷한 시기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이의 종합세트격으로, 1894년 1월 전라도에서 전봉준ㆍ김개남ㆍ손화중 등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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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9. 23. 우천 조완구 동암 차리석 선생 회갑기념(앞줄 왼편부터 조성환 김구 이시영 선생, 뒷줄 왼편부터 송병조 차리석 조완구 선생) 중경 우리촌에서. 1941. 9. 23. 우천 조완구 동암 차리석 선생 회갑기념(앞줄 왼편부터 조성환 김구 이시영 선생, 뒷줄 왼편부터 송병조 차리석 조완구 선생) 중경 우리촌에서. ⓒ 역사공간

 
이시영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시절 그의 비서관이었던 박창화의 기록이다.

1893년(25세)에는 사학교수(四學敎授) 문신(文臣) 겸 선전관과 사한시(司漢詩), 장악원(掌樂院),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등의 여러 곳에서 요직을 거치었다.

선생의 관로(官路)는 순조로와 26세(1894년) 때에는 이미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정3품에 제수되었고 이어 우승지에 이르렀으며 약원(藥院)과 상원(尙院)의 부제조(副堤調)를 겸임하는 동시에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 수석참의(首席參議)에 특수(特授)되었다.

선생이 10년 동안 여러 가지 직무에 겸임되고 영전하게 된 것은 황은(皇恩)의 특수하심도 있지마는, 선생이 국가에 대한 지성과 공무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거짓없고 충근(忠勤)하였던가 하는 것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 (주석 5)


이때까지도 이시영은 관직에 충실한 전통유학자의 삶이었다. 민족 내부적 모순과 외세의 침략을 지켜보면서 주어진 역할에 매진하였다. 15세 때인 1884년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당대의 세도가 김홍집의 딸과 혼인을 한다. 김홍집은 1867년 문과에 급제하고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청나라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와 고종에게 바치고, 개화정책을 역설했다.

김홍집은 1882년 임오군란 후 전권대신 이유원의 부관으로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었으며,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김홍집 내각을 조직,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세가 득세하자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홍범14조'를 발표, 새로운 국가체제를 세우고 갑오경장을 단행하였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 후 제3차 김홍집 내각을 조직, 단발령 등 급격한 개혁을 실시하다가 전국에서 의병항쟁을 유발시켰으며,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내각이 붕괴되는 동시에 김홍집은 매국친일당의 두목이라는 악명을 쓰고 광화문에서 군중에게 참살되었다.

이시영은 본가는 물론 처가도 쟁쟁한 세도가의 사위가 되어, 장인 김홍집 내각의 개혁정책을 살폈다. 그러나 장인이 광화문에서 성난 군중에게 참살당하기 전인 1895년 6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병사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결혼한 지 11년 만에 젊은 아내를 떠나보내고 1년 뒤에는 장인이 참살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시영은 격변의 파고가 휘몰아치는 정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장인이 3차 김홍집 내각을 맡고자 할 때 아무리 국왕의 지시라도 시국의 엄중함을 들어 출사하지 말 것을 진언했으나 김홍집은 이를 듣지 않았다가 끝내 참변을 당했다. 장인을 지켜보면서 아무리 필요한 개화정책이라도 민중이 원하지 않는 정책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석
5> 박창화, 앞의 책, 2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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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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