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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가루' 먹고 살아온 노동자들을 위한 헌가

[서평] 황석영 소설 '철도원 삼대'

등록 2020.07.10 16:45수정 2020.07.1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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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형식을 기다린다. 쓸 내용은 인생의 도처에서 펼쳐진다. 그 내용을 주워 담을 수 있는 멋진 그릇인 형식이 찾아와 주길 기다린다.

공장 끝에 자리 잡은 45미터 높이의 굴뚝 위 고공 농성장, 지상에 자리하되 허공에 떠 있는, 허공에 떠 있으되 지상에 뿌리를 둔, 삶과 죽음의 중간 지점에서 철도원 삼대의 후손 이진오는 회사의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 농성 중이다.

현재의 일상이 멈춘 굴뚝 위에서 이진오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이 땅의 노동자로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분단의 시대를 쇳가루 먹고 살았던 자신의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의 삶을 호명한다.
 
이곳은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거처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좁은 원둘레는 지상의 일상과 시간이 벗어난 우주선의 조종실 같은 곳이다. 그는 죽지 않고 여기 살아 있으나 세상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중략) 이진오는 차츰 지상에서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 33p
 
"저는 허공에서 수백 일을 보내며 소중한 별들을 만났습니다."
진오는 손가락으로 저물어가는 하늘을 가리켰다.
"그들은 별이 되어 저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612p
 
작가 황석영은 1989년 방북 때 평양에서 영등포 출신의 철도 노동자의 이야기를 만난다. 그것이 땅도, 하늘도 아닌 공간에서 농성하는 21세기 노동자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페트병에 과거의 이름을 써 붙이고 말을 걸며 회상하는 방식의 '형식'을 만나 30년 만에 소설로 나올 수 있던 게 아닐까. 한국 노동 운동사 100년을 꿰뚫는 <철도원 삼대>는 그렇게 탄생했다. 모든 이야기는 간이역에서 문득 출발한다.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 소설은 사건과 인물의 치밀한 얼개에서 경쾌하게 뻗어가는 속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가 돋보인다. ⓒ 창비

  
 1대, 이백만과 주안댁
 
강화도 지산리에서 태어난 이백만은 열세 살에 인천으로 일하러 왔다가 일본인 잡화상의 점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1907년 주인을 따라 용산에 갔다가 한강철교를 지나가는 기차를 처음 보게 된다.

어린 이백만에게 바람처럼 가볍게 달리는 쇳덩이는 개화 세상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개화 세상의 상징물 철도와 기차는 철저하게 조선 백성의 피와 눈물로 만들어진 것이었음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철로가 지나는 곳마다 땅을 빼앗긴 백성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철도 부지의 수용은 거의 무상몰수나 마찬가지였다. - 50p
 
일본 측은 철도공사장을 벌인 고장마다 관아에 찾아가 거의 망해버린 대한제국 관리를 겁박하여 침목과 목재의 조달을 요청했고, 조선인 노동력의 울력 동원을 각 지역 군현에 요구했다. - 53p
 
이백만은 일본 정미소에서 남다른 손기술로 선반을 배우다가, 경인철도 선반부로 이직하게 된다. 그리고 주안 염전에 다니던 인부의 딸 주안댁과 열여덟 살에 결혼한다. 한쇠 일철과 두쇠 이철, 막내 막음이를 낳는다.

젊어서 일찍 죽는 주안댁은 혼령이 되어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며느리인 신금이 또한 주술적인 예지력을 지녔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 몸은 비록 없지만, 그 정신만은 오롯이 남아 이 땅을 지키고 가족을 보우하려는 애끓는 민족혼의 상징적 설정으로 보인다.

이백만은 철도 건설에 필요한 선반 노동자로서 안정적 지위를 갖지만, 결코 책임 있는 자리를 맡지는 못한다. '쇳조각'으로 표현되는 근대의 상징물은 일제가 모든 침략지에 건설하는 철도를 통해 알 수 있듯, 철저히 침략과 수탈을 용이하게 하는 도구였다. 철도는 담을 넘는 도둑의 사다리, 일제의 침탈 사다리로 놓여졌다.

이백만에게 쇳조각은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게 하는 도구이자, 문명 발전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아들들의 이름도 일철, 이철로 짓는다. 그 쇳조각이 동시에 침탈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끼는 건 주안댁이다. 집에 와서도 공방에서 쇠붙이를 녹여 노리개며 장신구를 만드는 이백만에게 주안댁이 던지는 말은 그래서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조노무 쇳조각들을 몽땅 쓸어다 버리든지."
주안댁은 아이들이 듣건 말건 그렇게 혼자 씨불였다. - 79p

 
 
2대, 이일철과 신금이, 이이철과 한여옥
 
소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바로 형 일철과 동생 이철의 서로 다른 향방의 삶이다. 일철은 총독부의 철도종사원 양성소를 졸업하고 철도 기관사로 일한다. 반면 이철은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가담하여 일제의 억압에 맞서 목숨을 걸고 최전선에서 싸운다.

형제는 각자의 방식으로 일제 치하의 삶을 버텨간다.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는 일철은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서지는 못하지만, 암묵적으로 동생을 지지한다. 만주에서 박헌영을 국내로 잠입시키는 위험천만한 일을 기관사인 일철은 기꺼이 나서서 돕는다.
 
"그래 아버지는 평생 쇠를 깎으며 엄마도 없이 우릴 키웠고, 이제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집안을 꾸려가야 한다. 네가 욕을 하지만 나라 없는 백성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 388p
 
"녀석(이철)이 집안의 골칫거리지만, 어디 가서 무슨 도적질을 하는 것두 아니오.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자는데 우리만 편히 살 수 있나." - 469p

이철의 노동운동과 점조직으로 비밀스럽게 전개되는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은 작가의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 전개가 치밀하고 박진감 넘친다. 

독서회를 통한 조직원의 규합, 레포를 통한 접선, 검거되고 이십사시간 동안은 어떤 고문에도 동지들의 이름이나 거처를 말하지 않고 버텨준다는 이십사시간 불문율 등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스럽고 고단한 활동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일본 순사보다 더 악랄하게 동포들을 괴롭히는 일제의 앞잡이 밀정에 대한 묘사도 최달영이란 인물로 성공적으로 형상화해 낸다. 밀정과 노동운동 조직원들의 숨 막히게 펼쳐지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소설의 긴장감과 재미를 고조시킨다.

소설은 경성콤그룹사건, 2.7 구국투쟁 등 역사 사건과 박헌영, 이재유 등 실재 인물을 실명으로 이야기 구조에 끌어와 소설 속 가공의 인물과 결합시킨다. 이렇게 역사적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여전히 억압받는 노동운동이 소설 속 허구가 아닌, 여전히 진행 중인 현실의 문제임을 상기시킨다.
 
3대, 이지산과 윤복례
 
"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 520p 
"참 그지때기 같은 세월이었다." - 575p
 
미군정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보다 통치의 편의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법령, 치안 행정체제, 인적자원을 그대로 흡수했다. 근로 조건의 개선이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운동을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세운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수사 관행은 일제에서 미군정을 경유해 현재까지 유전된다.

해방된 조선의 노동자는 통치비용 조달을 위해 마구잡이로 화폐를 찍어낸 미군정 하에서의 물가상승으로 극심한 경제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일철은 아우의 항일활동을 소극적으로 돕는 시늉이나 하며 살았다고 자책하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의 중앙위원, 영등포역 전평 산별노조의 부지부장이 된다. 총파업을 지도하던 일철은 미군정과 일제 경찰보다 잔혹해진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결국 인천에서 배를 타고 북한으로 월북한다.

일철의 아들 이지산도 감옥에서 숨진 작은 아버지 이이철과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학생운동, 2.7 구국투쟁에 가담한다. 그리고 역시 경찰의 추적을 피해 북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다.

평양에서 재회한 일철과 지산 부자는 철도원 일을 맡게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기관수로 참전한다. 이지산은 군수물자 조달하는 기관차를 몰다 미군 폭격에 오른쪽 다리를 잃고 전쟁 포로로 남한에 남는다. 이지산의 아들 진오는 국민학교 시절 할머니 신금이에게 묻는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 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중략)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 564p
 
소설은 이진오가 465일 고공농성을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막을 내린다. 철도원 삼대의 증손자 이진오는 이제 성난 물결의 소용돌이 같은 세월을 뒤로 하고, 또 눈앞에 펼쳐진 만만치 않은 가파른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 고공농성으로 힘겹게 이룬 노사합의는 언제든 파기될 수 있고, 공권력과 어용노조는 언제든 노조를 물리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

의견 있는 노동자는 빨갱이 취급을 당하는 척박한 노동환경에서도 수많은 노동운동가들은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 왔다. '18-(16)-14-12-10-8', 이 숫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숫자 '2'가 줄어들 때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의 분신, 해고, 고공농성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수많은 노동자의 피땀으로 '주5일 40시간 근로제'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대체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 노동자의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는 옛말은 계절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네 같은 노동자의 현재를 말하는 것만 같았다." - 405p
 
작가 황석영은 근현대문학에서 근로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장편소설이 드물어서 이 소설을 기획했다고 말한다. 사건과 인물의 치밀한 얼개에서 경쾌하게 뻗어가는 속도감 넘치는 스토리 전개가 돋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허구적 세계의 만남도 자연스럽고 기발하다. 역사를 꿰뚫는, 선 굵은 서사의 통쾌함이 지나간 자리에는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섬세하고 따뜻한 묘사에 대한 아쉬움 또한 숨어 있다.
#황석영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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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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