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관직에서 물러나 법률학 공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7회] 언제까지나 개인적 연구와 안일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등록 2020.07.14 18:08수정 2020.07.14 18:08
0
원고료로 응원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1895년 12월에 귀국하여 중추원 고문을 맡고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을 한글판 3면, 영문판 1면, 주 3회 발행이다. 순한글로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한글연구가 주시경의 도움이 컸다.

『독립신문』의 발행은 개화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독립협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신문은 독립협회의 사실상 기관지 역할을 하게 되고,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자유민권사상을 불러일으키고 입헌군주제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a

이회영 흉상 우당기념사업회의 노력에 의해 2014년 서울 YWCA 옆 이회영 생가터 표지석 바로 옆에 세워졌다. ⓒ 홍윤호

 
이시영의 형 이회영은 30세가 되는 1896년 3월 17일 『독립신문』에 「소년주세시(少年州歲詩), 소년 30세시」를 발표하였다.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급하게 사람을 몰아붙이는 데
 이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어느새 벌써 서른 살이 되었으니. (주석 4)


이회영은 『독립신문』에 글을 쓸만큼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했으나, 이시영은 민간활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10년에 이르는 '관직의 먹물'이 아직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과 그의 벗들이기도 하는 이상설ㆍ여조현ㆍ이범세ㆍ서만순 등과 자주 어울려 산사에 들어가 정치학과 법률학 등 근대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 때에 독습한 법률공부는 임시정부의 헌법기초위원을 비롯하여 초대 법부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전문지식을 얻게 되었다.
  
a

이시영(1868-1953) ⓒ 독립기념관

 
이시영이 생애 최초라 할 '한가'를 보내고 있을 때 정세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1897년 10월 11일,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고종이 황제 칭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국과의 전통적인 종속관계를 청산하고 완전한 자주독립이 된 것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형식적인 종속관계마저 종식된 가운데 칭제건원으로 중국이나 일본과 대등한 독립국의 지위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조치로 황제의 통치권은 강화되었지만, 동학농민혁명,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이 제기한 국정개혁은 뒷전이고 황실 위주의 개혁사업을 벌이는 동안 외세의 침략은 더욱 노골화되어 갔다. 이처럼 날로 극심해지는 외세의 이권 침탈을 막아낼 국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태에서 청제건원을 시행한다고 해서 자주독립국이 될 수는 없었다.

고종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렇다고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쟁투를 벌인 늑대들이 '초식동물'로 변할 리는 없었다. 고종은 이 해 6월 이시영을 충청도 순찰사에 임명했으나 그는 끝까지 고사하고 하던 글공부에만 매진하였다.

일본은 청국에 이어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1904년 2월 8일 뤼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하였다.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은 2월 9일 서울에 진주하고, 그 힘으로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일본군의 한국내 전략 요충지 수용과 군사상의 편의 제공을 내용으로 하고, 이 조약을 빌미로 일제는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수용했으며, 각종 철도부설권도 군용이라는 명목으로 가로채갔다.

1905년이 되면서 나라의 운세는 더욱 변곡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즈음 고종이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다른 감투라면 몰라도 외교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고종 정부에서 가장 무지하고 무기력한 분야가 외교 쪽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래 1882년 제물포조약, 1884년 한성조약 그리고 이번 한일의정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에 우월권을 넘겨준 불평등 조약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더 무리한 요구를 해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시영은 국가안위가 위태로운 시국에 언제까지나 개인적 연구와 안일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 외부의 교섭국장이 아닌가.


주석
4> 이정규, 앞의 책, 25~2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인기기사

  1. 1 다시 싸움 시작하는 변희수 전 하사... 이젠 법정투쟁
  2. 2 유명한 베를린 한식당에 혐오 문구가 걸린 이유
  3. 3 윤석열 겨냥한 추미애 "검찰, 공정성 파괴하는 말 삼가라"
  4. 4 20년 내 일자리 47% 사라진다? 빌 게이츠의 이유 있는 호소
  5. 5 8000원짜리 와인을 먹고 나서 벌어진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