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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추모보다 어려워야 한다

[박원순 사건, 이렇게 본다] '시민운동가' '인권변호사' 그리고 '성폭력 가해 지목인'

등록 2020.07.15 16:39수정 2020.07.1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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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유명을 달리한 이후 여러 의견과 평가나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오마이뉴스>는 다양한 의견을 기다립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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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분향소가 11일 오전부터 서울시청앞에서 운영되어 시민 조문을 받기 시작했다. 오후들어 시민들이 수백명으로 늘어나면서 서울광장을 한바퀴 돌아 시청옆 골목까지 밀려서 1시간 가량 기다려 조문을 하기도 했다. ⓒ 권우성


그가 죽었다던 9일 밤부터 고소인 측의 기자회견이 있기 전까지, 포털사이트, 뉴스, SNS는 그를 추모하기 여념이 없었다. 정치권의 추모, 조문 행렬도 줄을 이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목소리가 대다수였다. 내가 알던 것도 있었고 모르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로부터의 성폭력 피해를 호소한 사람을 공격하는 빌미로 사용됐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인권' 변호사 시절부터 서울시장에 재직 중일 때까지 보였던 행보들은 여성 친화적이었었다. 나 역시 그의 행보를 좋아했고 응원했다. 그러나 그런 삶의 궤적과 그의 권력형 성폭력 가해 지목 사실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위화감은 반성적 성찰의 출발점이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의 삶이 범죄자로 기억되기에는 다분히 입체적이고 복잡다단하다'라는 문장은 그의 피소 사실을 옹호하는 가장 온화한 서술이었다. '그의 죽음은 반성이었을 것'이라는 목소리와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를 범죄자로 몰아가지 말아라'라는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그 행렬의 마지막 즈음에는 피해 호소인에 연대하며 행렬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 '(고소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여성이 그만한 남자사람친구를 다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자칭 역사학자의 터무니없는 서술, 피해호소인에 대한 공격과 신상털기가 있었다.

그의 가해 지목 사실이 그의 모든 업적을 지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그를 추모하기 힘들었다. 그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나는 그가 왜 죽었는지 짐작할 뿐,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죽음으로써 그에 대한 모든 평가와 사유의 가능성을 앗아갔고, 반성과 재사회화의 여지를 스스로 제거했으며, 피해 호소인의 2차 피해를 가능케 했다.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를 범죄자로 가정하고 말하는 것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반박을 논할 필요도 없이, '공소권 없음'으로 시시비비의 가능성마저 포기한 그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고 묻고 싶다.

사자(死者)의 정신을 기억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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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분향소가 11일 오전부터 서울시청앞에서 운영되어 시민 조문을 받기 시작했다. 오후들어 시민들이 수백명으로 늘어나면서 서울광장을 한바퀴 돌아 시청옆 골목까지 밀려서 1시간 가량 기다려 조문을 하기도 했다. ⓒ 권우성

 
반년 살짝 넘게, 민주화 과정에서 돌아가신 어떤 열사의 추모사업회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사업회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 선거 때부터 납작한 진영논리로 주장을 펼치고, 다른 입장을 매도하는 글을 페이스북 그룹에 수 차례 업로드했다. 


위치를 이용해 하나의 입장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피로감을 느낀 나는, 추모사업회와 관련이 있는 다른 선배에게 푸념했다. 그 선배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아가실 때의 열사라면, 아마 저 사람을 비판할 것이다. 그가 지금도 살아있다면, 아마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죽은 누군가의 정신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전에 그것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나는, 혹은 우리는 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할 수 없다. 그 사람은 되살아날 수도 없고, 당연히 그의 생각을 전해줄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정신을 기억한다는 것은 반드시 전유(專有)의 과정을 수반한다. 박원순을 추모하기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회찬 전 의원 등의, 살아온 궤적이나 삶을 마감한 맥락이 서로 너무나도 다른 망자들을 소환하고 있는 현실은 이를 방증한다.

물론 모든 전유가 나쁜 행위는 아니다. 만약 그를 사유 대상으로 삼고 비판적으로 재전유한다면, 그 지점에서 어떤 형태의 지식이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모르겠다. 피해 호소인이 여전히 수많은 가해와 피해에 시달리는 이 와중에 마음 놓고 추모도 차마 못 하겠다. 하지만 그의 정신을 기억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전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죽음과 정신이 우상화되거나 그저 명분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을 생산적으로 재전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늘 실천의 맥락 속에 있어야 한다. 인권변호사로서의 그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그가 그럴 리가 없어'라며 피해 호소인을 공격하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그의 죽음은, 정확히 피해 호소인에 대한 공격을 촉발하는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를 그저 추모한다면 그 방향성은 잠시 내려두고 죽음을 애석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자에게 특별히 관대한 우리나라의 문화 자체를 매도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정신을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추모 행렬은 그에 대한 기억을 전시함으로써 그를 신화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의 정신을 기억한다면,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 박원순이 권력형 성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됐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어찌하여 '인권변호사' 박원순이 '가해 지목인' 박원순이 됐는지, 그것을 가능케 한 '권력'이란 무엇인지, 어떤 사회 구조가 그를 그렇게 만들 수 있었는지 차분히 살펴야 한다. 그가 '가해 지목인' 박원순이 아니라, '인권변호사' 박원순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헤아리고 거기에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나는 그가 여전히 인권변호사였으면, 피해 호소인을 옹호하고 그를 변호할 것이라고 믿는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인권변호사 박원순이라면 피해자를 모독하진 않았을 것이다.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 박원순과 '가해 지목인' 박원순을 분리할 수 있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기억은 전유의 과정이다. 온전히, 총체적으로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며, 그런 맥락에서 분리가 가능한지 여부보다, 그것들을 어떻게 분리하여 사유해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여기서 '어떻게'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이, 곧 그의 정신을 재전유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기억은 추모보다 어려워야 한다.
#박원순 #기억 #추모 #권력형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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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입니다. 경제학에서 사회학으로 전과를 준비중이며, 학생사회에 발만 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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