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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 년 만에 약속을 지킨 옛 연인... 이들은 해피엔딩일까?

[리뷰] 영화 <체실 비치에서> 우리 그때로 돌아간다면 달라졌을까

20.07.16 10:18최종업데이트20.07.1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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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체실 비치에서>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주)키위미디어그룹

 
사랑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마주하는 순간이자 모르는 세계를 열어주는 몇 없는 문이며 인생 전체를 흔들 수 있는 폭풍이다. 같은 사람과의 관계라 할 지라도 어느 시기에 만나느냐에 따라 사랑은 전혀 다른 세기와 모양으로 휘돈다. 우리는 폭풍이 지나간 뒤에야 '그러면 좋았을 걸' 하며 황량한 길을 서성인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그러면 좋았을 일' 따위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이후의 나와 이전의 나는 다른 존재인 이유에서다. 지금 차분한 마음으로 폭풍의 흔적을 돌아보는 나는 폭풍 안에 있던 언젠가의 나를 완전히 헤아릴 수 없다.

인생의 크고 작은 바람과 함께 이전의 나는 계속해서 소멸해왔다. 추억한다는 것은 애도하는 일이다. 한때 연인이었던 누군가과 나였던 누군가의 죽음을. ​

​로큰롤을 좋아하는 남자와 클래식 밖에 모르는 여자. 나는 예전에 이 둘은 절대 연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호감은 생길 수 있겠지만 연애로 이어지기에는 공감대가 너무 없으니까. 취향은 그 사람의 살아온 삶과 깊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부유하고 엄숙한 가정에서 자란 플로렌스(시얼샤 로넌)와 서민 가정이자 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돌보며 자란 에드워드(빌리 하울). 그들의 삶을 구구절절 나열하며 이 둘은 다르다 말하기 뭐하니 작가는 로큰롤과 클래식으로 대변해버린 것이다. 다른 취향, 본질적으로는 다른 환경을 가진 그들의 끝은 예견되어 있었던지도 모른다.

특히나 에드워드는 자신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는 가족에 질려했다. 그러니 그는 더더욱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주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와 연애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타인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길 바란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섹스 후 뛰쳐나가 버린 플로렌스를 그는 몰아세웠다. 왜 나를 창피하게 만드냐며. 플로렌스는 공허했을 것이다. 연애는 결핍을 채우는 행위가 될 수도 결핍을 마주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다른 취향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더 내부에 본질이 있다면 연인 사이에 이러한 본질을 마주하는 시간은 꼭 필요하다. 적어도 상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하는 태도는 지녀야 할 것이다. 서로를 모르는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공허하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 컷 ⓒ 그린나래미디어(주)/(주)키위미디어그룹

 
애매하다. 연인이 헤어졌다고 해서 새드엔딩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르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각자 큰 트라우마가 있었다. 아마도 에드워드에게는 뇌손상을 입은 어머니가, 플로렌스는 친척에 의한 성적 학대의 기억이 트라우마일 것이다. 트라우마는 나약한 인간에 깊숙이 박힌 못이다. 깊숙하다고 하여 그 못을 뽑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못이 뽑히는 순간 그 자리를 채워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처음부터 완전히 채우지 못한다면 벽을 든든히 지탱해주면서 조금씩 채워나가면 된다. 플로렌스는 꽤나 우직하게 에드워드를 받쳐줬지만, 에드워드는 플로렌스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성추행 트라우마라는 못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플로렌스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가 잘한 것은 아니나 밉지도 않다. 대단히 현실적이다. 오히려 플로렌스보다 더 마음이 가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빠져 남의 속내까지 들여다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말을 하면 분명 도와줬겠지만 먼저 손을 뻗기란 쉽지 않다.

플로렌스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일 수도 있다. 자신과 공통된 취미를 가진 남성과 가정을 꾸려 자식을 셋이나 낳았다. 트라우마를 어느 정도는 극복했을 것이다. 원하던 공연 홀에서 원하던 애니스모어 사중주단 구성 그대로 은퇴 공연을 마쳤다. 객석에는 꽤나 그리워했을 옛 애인이 약속한 좌석에서 브라보를 외치며 그를 축복했다. 에드워드를 다시 마주한 그 날은 뭉클하고 싱숭생숭했겠지만 그래도 그의 전체적인 인생을 돌아봤을 때 에드워드 없이도 꽤 괜찮은 이후를 살았다. 물론 이것은 감독이 에드워드의 시각으로 후반부를 구성했기에 플로렌스의 겉모습만 훑고 판단한 것일 수 있다.

반면, 에드워드는 그렇지 않다. 대학시절 역사학 수석을 할 만큼 학업능력이 우수했던 그는 종일 담배를 문 허름한 레코드샵 사장이 되었다. 엄마 선물을 산다고 가게에 들어온 꼬마가 플로렌스의 딸인 걸 알게 되고, 쓸쓸한 얼굴로 그의 친구들에게 헤어지던 날을 이야기했다. 더 나이가 많이 들어서는 라디오에서 소개된 플로렌스의 은퇴 공연을 혼자 보러 갔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보고싶었어요. 잘 지냈군요. 혹시 우리도 잘 지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너무 많이 어렸을까요.'

그들 중 누군가는 꿈을 이뤘다. 그들은 철없던 시절 했던 약속을 용케 떠올렸고 지켰다. 극의 초반부터 커플은 위태로웠으니 그들이 헤어졌다고 하여 이 엔딩이 새드엔딩이라 말하기도 힘들다.

다만 운명이라는 것. 진짜 운명이라는 게 있고 우리는 그저 무력한 존재라면,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새드엔딩이다.
 

영화 <체실 비치에서> 스틸 컷 ⓒ 그린나래미디어(주)/(주)키위미디어그룹

 
왜 플로렌스는 배에 타고 있었을까. 실제로 움직이는 배는 아니었다. 해변 위에 장식마냥 세워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떠한 의미를 형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배에 플로렌스가 타고 있는 것처럼 연출했다. 해변 신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에드워드는 등을 돌리고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남자에게 묻는다. 다시 돌아가자고. 하지만 에드워드는 결국 플로렌스를 떠나보내고 만다. 그녀는 말하자면 에드워드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는 십수 년이 지나 레코드샵 사장이 되었을 때도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반면, 배에 타 있던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에 관계의 해결책을 말해보거나(그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더라도)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기도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다 했지만 연인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녀도 상심했을 것이다. 다만 이별 후에는 더 쉽게 털고 나아갈 수 있는 강자의 입장이 되었다. 플로렌스는 나아갔다. 자신의 꿈을 향해, 발전을 향해 항해했다. 플로렌스에게 그 장면은 기회가 아니라 전환점에 가깝다.
빌리하울 체실비치에서 시얼샤로넌 도미닉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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