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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금에 관해 잘 모르는 '모든 것'

[서평] 게으름과 편견을 넘어, 장제우의 '세금수업'

등록 2020.07.17 08:10수정 2020.07.17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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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좋은 책의 기준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남에게 권할 수 있는 책'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에게 깊은 깨달음과 위안을 주는 책은 다른 사람에게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권할 수 있는 책은 작가의 전유물을 넘어 독자들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재탄생한다. 통계분석가이자 독립연구자인 장제우의 <세금수업>은 오래간만에 만난 그런 책이었다.

나라의 세금은 누구로부터 얼마나 걷힐까. 또 어디에 얼마나 배분되어 쓰일까. 세금은 국가 경영의 철학을 가늠해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세금이 어떤 제도와 정책을 발전시키는데 쓰이는지 시민의 눈으로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잘 감시하려면 잘 알아야 한다. 만약 인생의 '필수과목'이 있다면 '세금수업'이 아닐까.


이 책은 객관적인 통계와 과학적 근거를 들어 낡은 세금관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저자는 이념과 정파를 불문하고 세금에 관해 갖고 있는 허상과 편견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잘 몰라서, 혹은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대충 '그렇다'고 믿고 있었던 부분들을 교정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세금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니 복지국가의 진로를 보여주는 '나침반'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몇 가지 단상

1. 손 안의 '모래' 같았다. 움켜쥐었지만 이내 스르륵 빠져나갔다. 코로나19 사태로 지급된 긴급재난지원금은 전 국민에게 지급된 최초의 보편적 '현금성 복지' 혜택이다. 예상했던 대로 반짝 효과였다. 잠깐 숨통이 트이긴 했으나 재난지원금이 소진되자 소비는 다시 축소되었다. 재난상황에서 인간다운 삶을 보호할 수 있는 확고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긴급재난지원금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일시적' 처방임은 분명하다.

2. '전국민고용보험 대 기본소득제'. 시대 변화에 맞춰 복지 제도를 바꾸자는 것인데, 어느 쪽으로 가든 막대한 재정 투입이 필요하다. 세금이 든다는 말이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이 논쟁에 납세자인 나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양쪽의 주장이 다 일리가 있어 보인다.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을 해야 할까.

3. 모든 시민이 시군구, 읍면동에 신청하면 받을 수 있는 복지급여는 대략 360여가지에 달한다. 한국은 '신청주의'이기 때문에 본인이나 가족이 신청하지 않으면 복지급여를 받을 수 없다. 2018년 국가예산 429조원 중 복지예산은 146조2천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34%를 차지하고 있다. 상당한 국가재정이 소요되는 복지분야의 돈이 실제로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국민들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복지효능감'이 떨어지니 당연히 세금을 더 내고 싶은 마음도 잘 들지 않는다.


4. 생계 곤란으로 폐지를 줍는 대한민국 노인 인구는 180만명에 이른다. 'K-방역'의 성공으로 국격을 치켜세우고는 있지만 사실 대한민국은 노인 빈곤율 1위, 노인 자살율 1위의 나라다. '미래 노인'의 삶이 어떠할 것인지는 '현재 노인'의 삶을 보면 가늠이 된다. 누구나 언젠가는 다 노인이 된다. 나의 노년기는 과연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겠다. 언젠가 늙고 병들었을 때 사회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별로 없다. 미래를 생각하면 우울해지는 이유다.

미신과 편견
 

<세금수업> 표지 . ⓒ 사이드웨이

 
결국 세금과 복지의 문제다. 장제우는 책 <세금수업>에서 "세금과 복지의 균형점을 잘 잡아내고 세금과 복지를 지혜롭게 이용하자"(9쪽)고 제안한다. 그러려면 먼저 세금에 관한 편견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은 상품을 구매할 때 납부하는 소비세(간접세) 인상에 대한 증세 반감이 심하다. 부자와 서민이 똑같은 세율로 세금을 내는 것은 저소득층에게 훨씬 불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간접세로 인해 저소득층의 삶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한다. 실제로 한국의 소비세 비율은 OECD 36개국 중 30위에 불과하다. 한국보다 더 많은 간접세를 부과하는 나라들은 보편적 복지를 구현하고 있으며 삶의 만족도와 행복지수가 훨씬 높다.

'간접세를 올리면 서민 생활만 어려워진다'는 '미신'의 배경에는 '오염된 통계'가 있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은 직간접세의 비율을 계산하는데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OECD나 유럽 통계청은 재산 관련 거래세를 직접세로 분류하지만 한국은 간접세에 포함시키고 있다. 1979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의 거래세는 OECD 국가들 중 단연 1위다. '소비세+거래세'를 간접세로 볼 경우, 거래세가 간접세를 부풀리게 되므로 당연히 간접세 비율은 올라간다. 일종의 '착시 효과'인 셈이다.

통계의 오류를 걷어내면 직간접세 논란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를 '세금의 확대-복지의 확대-삶의 질 상승'이라는 선순환 구조로 재편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저자는 "한국은 지금껏 저소득층 복지를 소홀히 하면서 간접세를 억제하여 서민을 챙기겠다는 '가식'의 나라였다"며 "간접세를 올려서라도 강화해야 할 복지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 국민을 위하는 길은 복지에 필요한 세금을 확보하는 것이지 간접세 증세를 배척하는 게 아니다"(129쪽)라고 지적한다.

현실의 왜곡

뿌리깊은 증세 반감과 조세 저항은 현실의 왜곡을 낳는다.

한국은 세금을 통한 복지보다 사보험 의존율이 극단적으로 높은 나라다. 민영 보험료의 합이 '소득세+사회보험료'를 앞지르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한국이 유일하다. 보험이란 미래의 위험에 대한 대비인데, 한국은 사회연대방식이 아닌 각자도생의 방법으로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매년 사보험 해지로 손해를 보는 규모가 10조원에 달한다고 하니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 
 
"한국의 서민들은 십 년도 넘게 사보험을 해지하느라 해마다 10조원도 넘는 돈을 그냥 '버려왔다.' 그렇게 돈을 허비하느니 복지 자금 조성에 일익을 담당하는 게 100배는 더 이득이다. 그런 낭비가 세금으로 걷힐 수 있고, 이에 부가하여 인상되는 다른 이들의 세금까지 탄탄한 복지 인프라를 만드는데 쓰인다면, 그로 인해 가장 이로운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다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보험을 깨던 그들, 우리 자신이다."(55쪽)

소득세를 올리는 것은 '악'이고 기업의 법인세를 올리는 것은 무조건 '선'이라는 생각도 '미신'이다. 현실적으로 법인세는 아무리 많이 올린다 한들 소득세의 규모를 따라갈 수 없다.

덴마크는 기업의 세금 부담이 낮은 대신 노동자의 임금이 많고, 반대로 스웨덴은 기업의 세금 부담인 높은 만큼 노동자의 임금은 덴마크에 비해 낮다. 그러나 두 나라의 '시간당 노동 비용'(임금+기업의 사회보험료 납부액)은 유럽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한국에서만 유독 강하게 작용하는 소득세와 법인세에 대한 선악 이분법은 광범위한 조세 저항을 부추기고 오히려 복지 확대의 발목을 붙잡는다.

'낙수효과'와 '부자증세'는 어떠한가. 저자는 부자증세나 낙수효과 모두 조세저항을 기저에 깔고 '대기주의'를 종용한다고 일갈한다. 그는 "낙수효과가 부유층의 조세저항을 합리화한다면, 부자증세는 부자가 아닌 이들의 조세저항에 정당성을 부여한다"(163쪽)며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 있으라'를 종용하면서 사람들의 삶을 해친다는 측면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공짜 복지'의 허구성

복지는 세금을 통해 실현하므로 국민이 마땅히 분담하는 것인데도 '무상복지'라는 말을 남발하게 되면 '복지는 공짜'라는 인식을 확산하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이는 실제 복지 발전에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복지를 논할 때 반드시 함께 거론해야 하는 세금의 문제, 책임의 문제를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복지에 상당하는 세금을 충분히 납부하고 있다고 국민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때, 복지를 공짜라 부르건 무상이라 부르건 전혀 상관없는 환경이 조성된다. 공짜냐 무상이냐를 따지는게 무의미한 복지강국으로 가야 하지, 무상복지는 공짜복지가 아니라고 억울해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정치가 국민에게 떳떳이 증세를 말하고, 국민이 그 책무를 당당히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복지는 본래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간다."(183쪽)

복지의 민영화, 시장화는 사회 전체의 복지 비용을 줄이는 대신 그 부담을 개개인에게 부과했다. 의료, 주거, 교육 등의 영역에서 개인이 지출하는 복지 비용은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다.

복지국가는 재분배의 도구다. 재분배 방식은 정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20세기의 가장 성공한 정치기획이었던 유럽의 보편적 복지국가들은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바탕위에 세워졌다. 정치에 대한 열망과 실망이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한국사회에서 기존의 체제와 구조의 벽은 여전히 단단하고 연대와 협동의 원리가 작동하는 복지국가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사각지대 없이 공적 복지의 영역에서 최대한 많은 시민을 포괄하며 취약계층에 대한 선별적 복지를 결합함으로써, 광범위한 사회연대를 통한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 바로 '보편적 복지국가'다.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절감했듯이 복지의 확대 없이 위기 극복은 불가능하다. 복지의 확대를 위해 증세는 필수다. 적극적인 증세없이 국가 패러다임 전환은 어렵다.

증세없이 복지국가 없다
 
"사람들은 늘 세금이 줄줄 새고 복지가 부족하다고 불만이지만, 콕 집어 이 때문에 정치판을 갈아엎기는 어려운 정황이다. 국민으로서는 이래저래 답답한 환경이지만 저급 정치인들에겐 한국같은 꿀단지가 따로 없다. 높은 조세 저항과 낮은 세금은 팍팍한 삶의 근원인 동시에, 정치에 대한 허술한 감시망의 토양이기 때문이다....(중략)....정치의 기강을 바로잡는 세금의 위력을 감안할 때 증세는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언제 어느 때나 정치는 국민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들에게 있어 '얼마든지 세금을 늘리라는 국민'처럼 무섭고 불편한 존재도 찾기 힘들다. '진짜' 세금폭탄을 얻어맞는 복지강국의 국민은 사소한 낭비나 비리에도 냉혹한 심판을 내린다."(156~157쪽)

정치가 경제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시대, 재분배의 도구로서 복지국가는 훼손되고 있다.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노동의 양극화, 높은 실업률, 빈곤의 확산과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 등 복지국가는 전방위적으로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1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유럽 복지국가들의 프로세스를 따라가기에 한국의 상황은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 유럽처럼 강력한 노동운동이 복지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10%의 조직력도 안 되는 노동운동이 강해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경제위기로부터 촉발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현실적인 해법이 '복지'에 있다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간절히 필요로 하는 변화는 아래로부터 강제되어야 한다. 세금에 관한 편견과 우상을 걷어내고 증세와 복지 확대를 주장해야 한다.

산발적인 복지담론들을 복지정치의 의제로, 이를 실현한 복지 정치의 주체들이 등장해야 한다. 복지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복지국가에 대한 시민의 열망을 조직하며 사회적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 정치를 바꾸고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원동력이다.

장제우의 세금수업 - 당신의 세금이 우리 모두의 삶을 책임진다면

장제우 (지은이),
사이드웨이, 2020


#세금수업 #증세 #보편적 복지 #복지국가 #복지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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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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