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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라는 칭호 받자마자 이혼한 지도자

[터키에 가다4] 관용의 상징,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

등록 2020.07.26 12:08수정 2020.07.26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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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겨울 동안 이스탄불을 베이스캠프 삼아 터키를 여행했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관용의 상징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
  

메블라나 박물관 정면. 정원에는 분수와 작은 무덤들(오른쪽)이 있다. 왼쪽 정자 형태 건물은 손과 발을 씻는 곳이다. 아래에 수도꼭지가 있다. ⓒ 차노휘

 
드레비시 세마 댄스 본고장인 코니아(Konya)에 메블라나 세마 댄스 창시자인 루미가 터를 잡은 것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Seljuq Empire, 1037~1194) 시대였다.

루미는 열두 살 때(1218) 가족과 함께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인 발흐를 떠나 4,000km에 달하는 대장정에 오른다. 몽골 침입(1215~1220)을 피해서다. 실크로드를 따라 바그다드, 다마스쿠스, 메카 등지를 거쳐 셀주크 투르크 왕조 수도인 코니아에 정착한다. 실크로드 서쪽 끝에 있던 당시 코니아는 여러 문화와 종교가 만나는 곳이었다.

이슬람교 지도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일찍이 신학, 철학, 천문학, 법학에 통달한 학자가 된다. 서른 너머 시를 썼지만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그는 혼란한 시기에 코란을 읽으면서(코란은 아랍어라 특권층만 읽을 수 있었다) 명상만을 강요하는 종교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 '나' 아닌 것은 없다. 우주는 '거대한 나'이다. '작은 나'를 망각하고 없애지 않고서는 '큰 나'를 발견할 수 없다. 이미 뭔가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없다. 내면에 집착하는 욕망으로 채운다면 '신'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를 잊고 비워야 신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정통적인 신학자, 철학자, 천문학자, 법률가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춤추는 시인이 된다. 유네스코는 2007년을 '루미의 해'로 선포한다. 종교를 떠나서 그를 '관용의 상징'으로 보았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그의 넉넉함이 시간이 갈수록 빛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유럽에서는 이교도를 화형 시키는 마녀 사냥을 서슴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구권에서도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스터디셀러가 바로 루미의 시편이다.

다시 아타튀르크
  

홀 유리 안에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 머리카락이 들어있는 함이 있다. 유리 안에 나 있는 구멍에 코를 가져다 대면 장미향이 난다. 생전 무함마드가 좋아했던 향이다. ⓒ 차노휘

 
메블라나 종단의 종교의식이 모두 금지된 것은 터키의 국부인 아타튀르크의 몇 가지 정책 때문이었다(지금은 서구의 열렬한 러브콜을 외면할 수 없어 일부 허용하고 있다). 그는 이슬람교 수니파를 제외한 모든 종교를 이단으로 선포했다. 이 또한 아타튀르크의 속 깊은 계산에서였다.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대제국 오스만이 망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더군다나 그리스인들은 조상들의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온 국토를 헤집고 다녔다. 국민들이 받았을 정신적·육체적 상처는 실로 컸다. 아타튀르크는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면서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절실했다. '우리가 터키다'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단일 국가, 단일 종교, 단일 정신, 단일 민족성을 내세웠다. 터키 땅에서 터키어를 쓰면 다 터키인이라고 넓은 의미로 말했다. 터키어가 세상의 모든 언어의 기원이라는 연구에 적극 후원했다. 그 외의 민족은 이방인이 되었다.

돌궐에서 출발한 투르크족을 뭉치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소수민족을 박해하고 추방해야 했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슬람교 수니파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식은 금지되었다.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아타튀르크 정책은 투르크족 입장에서는 긍정적이었다.

지금도 터키인들은 아파트 관리실에 아타튀르크 사진을 걸어놓을 정도로 그를 사랑한다. 터키 십 대들은 아이돌을 대하듯 아타튀르크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 그의 사인을 몸에 새겨 넣기도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 김구, 세종대왕의 업적을 한꺼번에 해낸 신과 같은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래서인지 그가 죽을 때까지 15년이라는 장기 독재를 했다는 데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심지어 대통령직을 왜 그만두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들까지 있다. 영국 역사가 액튼 경이 말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독재자의 루트를 밟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아타튀르크는 일평생 본인을 위해서는 사치를 하지 않았다. '국부'라는 칭호를 받자마자 이혼했다. 자식이 있으면 술탄처럼 세습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전문직 수양딸들을 받아들여 여성의 이미지를 상승시켜 사회 진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언론에 노출시켰을 뿐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후대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정당 정치의 기본을 다졌다. 보통 왕조 뒤에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는 얼마 가지 못해서 왕정 복구가 이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아타튀르크 정신을 이어받은 터키인들은 터키 공화국 100년을 앞두고 있다.

그는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에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매년 11월 10일 9시 5분이 되면 온 나라에 사이렌을 울려 그를 기념한다. 이렇게 아타튀르크는 신화에 가까운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7세기 앞서, 신화에 가까운 사람이 또 있었다.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이다.
 
코니아 메블라나 박물관

  

메블라나 영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관은 황금 자수가 수 놓인 벨벳에 덮여 놓은 단 위에 안치되어 있다. ⓒ 차노휘

 
이스탄불에서 장장 이틀을 운전하고(가는 도중에 다른 곳에도 들렀지만) 히잡이나 니캅 쓴 여성들을 빈번하게 마주치는, 가장 보수적인 도시인 코니아에 도착했다.

술탄 왕조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현직 대통령의 지지층이 두터워 정부 지원금을 제일 많이 받는다는 곳. 코니아는 인구 대비 트램이 굳이 필요 없는 도시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이 맞는 듯 텅텅 빈 트램이 매번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갔다. 나는 트램 길을 따라 메블라나 박물관으로 향했다.

메블라나 박물관은 1927년이 되어서야 메블라나 영묘가 있는 곳을 개조하여 이름을 바꿔 재탄생했다. 1950년에는 메블라나 추모행사까지 부활했지만 사원으로서의 기능이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멀리서는 터키석 옥빛 원추형 뾰족탑으로 분별할 수 있는 박물관 정문으로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정원과 손을 씻는 정화대, 묘지, 세마젠들의 수행 모습 등이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전시실이 입구까지 길게 이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메블라나 박물관 영묘가 있는 곳. 이곳에 유난히 울고 있는 여인들이 많다. ⓒ 차노휘

 
나는 견학 온 어린 학생들의 뒤꽁무니를 따라 중앙 묘실로 향했다. 대리석 관 위에 각기 다른 터번을 올려놓아 지위를 표시한 이슬람의 성인들이 잠들어 있는 묘소를 양쪽으로 끼고 조금 걸으니 황금 자수 벨벳에 덮인 대리석 관 위에 그동안 보았던 것보다 월등하게 크고 화려한 터번과 마주할 수 있었다. 메블라나 루미의 영묘다.

그곳에 잠깐이라도 머문 사람이라면 눈부신 그것보다 더 눈길을 주는 곳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참배객들의 모습이다. 그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내 전 존재를 떨리게 하는 시를 잉태하고 태어나게 한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루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느꼈다. "사랑이 길이고 우리 예언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가 했던 말처럼 '사랑'으로 말이다.
 

메블라나 박물관 전시실에 전시된 수행자들의 모습. 드레비시 세마 댄스를 배우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고 저렇게 3일 동안 앉아있을 수 있어야 한다. ⓒ 차노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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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다. 2016년부터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와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장편소설 《죽음의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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