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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굴 속에 1천여 구의 시신... 죽은 자들이 전하는 진실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

등록 2020.08.01 13:20수정 2020.08.0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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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발트 광산 유골 ⓒ 진실위 자료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8월 경북 경산시 코발트 광산에서 군경이 보도연맹원과 교도소 재소자 등 수천 명을 무차별 학살하는 참상이 발생한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왜 우리나라 군경은 자국민을 무차별 학살한 것일까?

지난 2007년 필자는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 몸담았을 당시 민간인 학살 장소인 경산 코발트 광산을 방문한 적이 있다. 지금은 부경대 교수로 있는 그때 진실위 동료였던 노용석 박사의 안내로 필자는 코발트 광산 학살현장에서 차디찬 학살 희생자의 유골들과 대면했다. 당시 무더운 여름이었는데도 학살 현장은 냉기로 가득해 오히려 한기로 몸을 떨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승만 정권이 만든 관변단체인 보도연맹은 할당제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의 구장이나 읍장 등은 보도연맹의 인원 수를 채워야 했고 당시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쌀, 밀가루, 비료 등을 주며 가입을 권유했다.

또한 실제 좌익 활동을 한 사실이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빨치산에게 식량을 제공했거나 오히려 그들에게 피해를 당했는데도 빨치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많은 농민들이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보도연맹원이었던 변아무개는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없는데도 경찰이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해 가입하게 되었으며 가입신청서에 서명을 하거나 도장을 찍으면 되었다"라고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경찰이 강요해 보도연맹에 가입 
 

코발트광산 유골 ⓒ 진실위 자료

 
당시 청도경찰서에 근무한 손아무개는 지난 2007년 진실위에서 "보도연맹원 중에는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경찰에 의해 가입된 경우도 꽤 많았다. 경찰이 권유 또는 강요해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시킨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다.

결국 대다수가 농민들인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전, 아무것도 모르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단지 쌀, 밀가루, 비료 등을 준다는 권유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은 예비 검속에 따라 경찰서 유치장, 교도소, 창고 등에 구금되었다.

그 무렵 경찰에 예비 검속 된 후 풀려난 고아무개는 예비 검속 후의 과정을 지난 2007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쌀 한 말을 준다고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는데 전쟁이 나고 지서에 연행되어 지서 인근 창고에 구금되었다. 얼마 후 그곳에 잡혀 있던 사람들과 굴비 엮이듯 몸에 줄이 묶여 청도읍의 농업 창고로 이송되었는데 농업 창고에는 이미 1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잡혀와 있었고 산동 지역에서 잡혀온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곳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는데 풀려나지 못한 사람들은 아침에 트럭에 실려 산동 방향으로 실려 갔으며 그 중 많은 수가 곰티재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경산경찰서 직할 파출소에서 경비 근무를 했던 길아무개는 경산 지역에서 실시된 예비 검속에 대해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경산경찰서 관할 지서에서 보도연맹원들을 포함한 좌익에 협조한 사람들을 경산경찰서로 연행했다. 연행된 사람들은 경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는데 유치장이 좁아 약 50평 규모의 무도장에 200~300명가량의 사람들이 구금되었다.
 
이유도 모른 채...   
 

코발트광산 입구 ⓒ 진실위 자료

 
이렇게 구금된 민간인들은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다수 재소자들과 함께 1950년 7월부터 8월 중순까지 경산 코발트 광산 등에서 이유도 모른 채 군경에 의해서 집단학살 되었다.

1950년 늦여름 청도경찰서 소속으로 유치장 경비 근무를 했던 이아무개는 당시 유치장 상황과 선배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지난 2007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어느 날 유치장에 잡혀 있던 사람들 중 보도연맹원들만 사라졌는데 그들은 트럭에 실려 경산으로 갔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선배 경찰들이 보도연맹원들을 경산 코발트 광산에 집어넣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그 무렵 경북경찰국에 근무한 노아무개는 "청도 등에서 잡혀온 보도연맹원들이 대구형무소에 구금되거나 경산 코발트 광산과 가창골 등으로 끌려가 사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당시 현장을 다녀온 경북경찰국 사찰계 형사들에게서 들었다"라고 진실위에서 회상했다.

당시 대구형무소 간수로 근무한 하아무개는 2008년 진실위 조사관에게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1950년 7월경 대구형무소는 군 형무소와 함께 사용되었다. 당시 형무소에는 헌병대가 파견되어 있었다. 대구형무소에는 수용인원을 초과할 만큼 재소자가 많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형무소로 끌려왔으며, 그 사람들은 형무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모두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처형당했다고 군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무렵 경산 코발트 광산 인근 마을인 압량면 갑제동에 거주했던 문아무개는 당시 코발트 광산에서의 학살 과정을 직접 목격했는데 그때 상황을 진실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전쟁이 나고 7월 20일이 지났을 무렵 산에서 소에게 꼴을 먹이고 있던 중 덮개를 씌우고 군인들이 올라탄 트럭들이 경산 코발트 광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광산으로 올라간 차들은 수직 굴 밑에 삼베 및 모시옷 등을 입고 실려 온 사람들을 하차시켰으며 약 10명씩을 수직굴로 데려가 총살을 시켰다. 당시 사살현장에는 헌병과 경찰이 있었는데 그때 광산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경산에서 경찰에 예비검속된 사람들과 대구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때 경산군 청년방위군 교육생이었던 박아무개는 "당시 사건 현장인 코발트 광산 주위가 헌병과 경북지구 CIC 경산 파견대에 의해 통제가 되어 있어 사건 현장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으며 단지 사람들을 태우고 광산으로 이동하는 트럭을 멀리서만 지켜보았다"라며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또한 당시 경산 안심면에 거주했던 이아무개는 청년방위대 경산지대 중대장으로 근무했던 매형으로부터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에 대해 전해 들었다며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매형은 경산지역 방위장교로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사람들이 총살될 때 현장에 있었다. 매형은 현장에서 누군지는 몰라도 총을 쏘라는 지시를 했는데 도저히 총을 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매형은 계속된 총살로 광산의 수직굴이 가득 차자 수직굴 옆 골짜기에 땅을 파고 총살을 계속했다고 했다.
 
당시 대구형무소에 파견되어 있던 국군 제22연대 헌병대원인 박아무개는 "전쟁 직후 200~300명 규모의 형무소 재소자들을 본인과 헌병대원들이 직접 인솔해 칠곡 신동재로 데려가 사살했다. 이후 형무소 근무를 교대했는데 교대한 다른 소대원으로부터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재소자들을 사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2008년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10일간 지속된 학살
 
 

코발트광산 유골 ⓒ 진실위 자료

 
당시 코발트 광산 학살 현장인 수직굴과 약 50~100m 떨어진 곳에서 청년방위대원으로 경비근무를 했던 김아무개는 코발트 광산 희생자의 신원과 수에 대해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1950년 7~8월경 헌병과 경찰들이 대구형무소에서 끌고 온 사람들을 코발트 광산으로 데려와 물이 차있던 수직 동굴 앞에서 처형했는데 당시 처형장 50~100미터 주변에는 본인을 포함해 청년방위대원들이 M-1 소총을 소지하고 경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에서는 30~40명의 사람들을 실은 트럭이 하루에 많게는 8대 이상 왔으며 군경에 의한 처형은 약 10일간 지속되었다.
 
진실위 조사 결과 당시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사살될 뻔했으나 다행히 총탄에 맞지 않고 생존한 경우도 확인되었다. 영동군 학산면에 거주하던 이아무개의 아내 한아무개는 "사람들을 나란히 앉혀 놓고 군인들이 '발사'라고 소리를 치며 사살이 시작됐는데 남편은 총에 맞지 않아 숨어 있다가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대구로 도주했다"라며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또한 2007년 충북 영동군 양강면 가동리에 거주하던 최아무개는 "남편인 정아무개가 보도연맹원으로 끌려 간 것은 아니지만 대구에서 검거되어 수직굴이 있는 광산으로 끌려가 각이 선 모자를 쓴 군인 복장 풍의 사람들에 의해 수직굴 앞에서 총격을 당했는데 다행히 줄이 풀리고 심한 총상을 입지 않아 살아나왔다"라며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학살 사건이 발생한 후 10년이 지난 1960년 4․19 직후에 이 지역에 대한 유해 발굴이 실시되었다. 그때 유해 발굴 과정에 참여했던 경북유족회의 이복녕은 "당시 현장에 지금보다도 시신의 수가 수도 없이 많았으며 인근 대원골 골짜기에는 시신으로 인한 핏물이 많이 흘러 인근 주민들이 아주 애를 먹었다"라고 지난 2006년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그 후 진실위가 실제 유해를 발굴한 결과 코발트 광산 내부뿐만 아니라 그 인근 골짜기인 대원골에서도 수십 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피해자 측 참고인들은 "이 학살 사건의 희생자 대부분이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좌익에 협조한 사람들이었지 적극적으로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라고 진실위에서 하소연했다. 더구나 당시 경산경찰서 소속으로 근무한 경찰들조차 "이 학살사건의 희생자 대다수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라며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사건 무렵 청도경찰서에 근무한 손아무개는 "빨갱이들 때문에 민간인들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 당시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라고 지난 2007년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또한 청도경찰서에 근무했던 이아무개는 "당시 보도연맹원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불법적으로 사살되었는데 그 사람들의 경우 재판을 받았으면 다 살았을 사람들이었다" 라고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억울하고 아까운 죽임을 당했다" 
 

코발트광산 유골 ⓒ 진실위 자료

 
이 학살 사건 발생 무렵 경산경찰서에 근무한 신아무개는 "당시 경산지역에서 죽은 사람들 대다수는 실제 좌익 활동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던 관계로 억울하고 아까운 죽임을 당했다"라며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또한 경산경찰서 직할 파출소에 근무했던 길아무개 역시 "당시 경찰서로 잡혀온 많은 사람들은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라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당시 청년방위대원으로 경산에 갔다 돌아온 이선희와 강태석은 "경산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경우 실제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좌익이 뭔지도 모르고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었다"며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위와 같은 여러 증인들의 진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경산지역 보도연맹 희생자들은 대부분 그저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빨치산에 단순 협조하거나 심부름 등을 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한국전쟁 직후 억울하게 학살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청도경찰서 외근계에 근무한 이아무개는 "선배 경찰들이 보도연맹원들을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고 가 밀어 넣고 왔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라고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또한 경산지역 청년방위대원으로 코발트 광산에서 교도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있을 당시 현장 경비를 했던 김아무개는 "사건 현장에서는 대체로 군인들이 처형을 주도했으나 군이 물러난 이후에는 경찰들이 사람들을 처형했다"라며 회상했다.

뿐만 아니라 경산 코발트 광산 인근의 갑제동 뒷산에서 총살 과정을 지켜본 문아무개는 "광산으로 끌려온 사람들에 대해 경찰과 군이 총살을 집행했다"라며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진실위 조사 결과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의 직접적인 가해 기관은 각 지역 경찰서, 경북지구 방첩대(CIC)와 각 지역 CIC파견대 그리고 국군 제22헌병대로 밝혀졌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이승만 정권의 내무부 치안국-경북지방 경찰국-각 경찰서, 육군본부와 경남북지구 계엄사령부로 이어지는 지휘명령체계 속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자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승만 정권의 우리나라 경찰은 무늬만 대한민국 경찰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경찰은 일제강점기 일본 순사들보다 더 악독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을 상대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들은 해방 후에도 그대로 경찰복을 입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에게 가했던 일본순사에게 배운 잔인한 고문기술을, 그대로 해방된 국민을 상대로 써먹었다.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불법 학살

2009년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과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해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경산 코발트 광산 유족들은 조금씩 유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 2005년 진실위가 설립되고 국가 차원의 발굴이 2007년부터 약 3년 동안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지난 2010년 진실위는 해산되었고 국가 차원의 유해발굴은 멈췄다.

아직도 천여 구 이상의 유해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 코발트 광산 주변에는 지금 요양병원과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지금까지 진실위 등에서 발굴한 유해는 총 560여 구로 현재 세종시에서 보관 중이다.

진실위는 경산 코발트 광산 등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전체 희생자 수를 최소 180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조상을 잘 모시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려왔다. 그런데도 최소한 천여 구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상의 유골을 습기가 가득한 굴 속에 그대로 방치하는 만행을 우리는 언제까지나 계속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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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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