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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무관제왕' 일본신문 보도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21회] 독립군은 근거지를 만주지역에서 소련과의 국경지대로 옮기게 되었다

등록 2020.07.28 18:01수정 2020.07.2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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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밭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 ⓒ 독립기념관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서 1912년 가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중국 동북3성과 연해주 지역을 널리 순방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학생 모집과 운영기금 모금이 목적이기도 했지만, 동포들을 두루 만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일제와 싸우면 반드시 독립의 날이 온다는 격려를 위해서였다.

이시영이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학교 일에 열중하고 있던 1913년 초가을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이상설로부터 편지가 왔다.

"근간 일본의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에 이시영은 만주의 무관제왕이라 하였고, 또 만주일대의 살인 강도 두목이라는 기사가 있어 일본 전체가 크게 주목을 하게 되어 앞으로 무도한 참해가 닥쳐올 것이니 타처로 피신하라" (주석 1) 는 내용이었다.

일제는 이시영이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군관을 양성하고, 이들 중 일부가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10월 청산리전투의 주역임을 알고, 지난 해에는 동북3성과 연해주 지역을 순방하면서 조선 교민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그야말로 '불령선인의 우두머리'로 인식한 것이다.

이 해 9월 베이징의 지인들로부터 전보가 왔다. 신변이 위험하니 그곳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신문 기사를 보고 피신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시영은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고, 얼마 뒤 그가 살던 집은 일본 군대가 습격하여 무차별 방화약탈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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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등이 있는 유하현 삼원보의 남은 조선족 학교 유하현 삼원보는 항일운동의 주역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가 자리 잡은 곳이다. 이제 그 흔적이 많지 않지만 지금도 조선족 학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조창완

 
유배자는 정주지(定住地)가 있지만 망명자에는 정주할 곳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망명자는 자유인이다. 그리고 이시영에게는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재혼한 박씨 부인이 1916년 12월 3일 망명지에서 고생 끝에 숨을 거두고, 1905년에 태어난 차남 이규열(李圭悅)과 함께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겼을 즈음 망국군주 고종이 중국군 참모차장 천환(陳罕)의 손을 거쳐 위안스카이 대총통에게 밀서가 전달되었다.

내용은 동삼성 교포 문제에 대한 것과, 한국 독립운동 등 이시영이 추진하는 사업에 대하여 원조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원래 위안스카이 대총통은 한국에 왔었을 때부터 선생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는 수차에 걸쳐 비밀회의를 열고 육군총장 딴치루이(殷棋瑞)와 위수사령관 리첩싼(李捷三) 등에게 선생을 적극 지원하도록 지령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교포 이주와 각종 무예 기술에 관한 제반 문제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여 장기 항일을 하도록 도움을 주게 하였는데, 천(陳)은 쓰촨(四川) 후이뺀(會辨)으로 출발하였다.

이것은 일본군이 만일 베이징, 상하이를 침탈한다고 하더라도 쓰촨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데서 취해진 조치였다. 천(陳)은, 이러한 오지(奧地)로 깊숙이 들어가서 실력을 충분히 양성한 다음 한중(韓中)이 연합전선을 펴서, 소위 제국일본(帝國日本)을 타도하자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주석 2)


일제는 1920년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후 간도지역 교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이른바 경신참변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이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여 무차별 살인ㆍ방화ㆍ강간ㆍ약탈로 살해된 사람이 1700여 명, 불탄 가옥이 3300여 채에 이르렀다. 이후 독립군은 근거지를 만주지역에서 소련과의 국경지대로 옮기게 되었다.

고종이 유폐된 처소에서 이 같은 소식을 듣고 위안스카이에게 밀서를 보내고, 측근에게 이시영을 만나 한중 연합전선을 준비토록 한 것이다.

"선생과 천 차장은 서로 이러한 방책을 단단히 약속하여 놓고 매사를 착착 추진하던 도중인데, 일본인의 교활한 모략과 강포한 침해로 위안스카이 총통을 기만(欺瞞)하여 죽게까지 하였고, 선생의 모든 계획도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주석 3)


주석
1> 박창화, 앞의 책, 49쪽.
2> 앞의 책, 50~51쪽.
3>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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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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