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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해외망명 준비했으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22회] 고종이 갑자기 붕어함으로써 거사는 미수에 그치고

등록 2020.07.29 18:16수정 2020.07.29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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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가운데)과 그의 아들 순종(왼쪽),영친왕 이은(오른쪽).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이었다. ⓒ 위키백과

 
이시영이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차원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 즈음, 국내외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은 중국에 있어 이권확대를 노리고 영일동맹을 이유로 내세워 8월 23일 독일에 대해 선전을 포고, 산동성의 독일 조차지 청도와 독일령 남양제도를 점령하는 한편, 이듬해에는 중국에 「대중21개조 요구」를 승인케 했다.

중국으로서는 굴욕적인 요구 조항이었다. 주요 내용은 △ 관동주 조차기한과 남만주철도 권익기한의 99년간 연장, 만주남부ㆍ동부ㆍ내몽골에 있어 일본의 우월권 확립, 중국연안의 항만ㆍ섬의 타국에 대한 할양ㆍ대여 금지 등이었다.

'21개조 요구'는 곧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중국 안에서는 반일운동이 드세게 일어났으나, 일본 정부는 5월 7일 최후통첩을 발하고 이틀 만에 위안스카이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중국 인민들은 이의 무효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한편, 이를 수락한 5월 9일을 국치일로 정하고 주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변화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동안 중국 식자층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망국노'라고 멸시해 왔다. 그러나 이제 동병상련의 우호관계가 되고, 일제는 공동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이시영은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 형(이회영)과 만나 고종황제를 탈출시켜 중국에 망명정부를 수립하려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두 형제는 큰 원칙에는 쉽게 합의가 되었으나 '고종황제의 중심'에는 의견이 엇갈렸다.

"성재의 생각은 어떤 구심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효과적인 운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우당의 의견은 어떤 인물이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는 것은 과거 동학과 같은 형태로의 활동이 되어 결국은 내분을 야기시켜 효과적인 활동을 못하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이었다." (주석 4)


이회영은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아나키스트의 구상이고, 이시영은 고위관료를 지낸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해외에 산재하여 역량을 모으지 못한 상태였다. 아직 국내외 어디에서도 임시정부 (또는 망명정부) 수립론이 제기되기 전이었다.
 

영친왕 이은과 마사코의 혼약을 알리는 <아사히신문> 기사 ⓒ wiki commons

 
형제는 향후의 정부체제 문제는 미뤄 두고 우선 고종황제를 해외로 탈출시키자는 데 뜻을 모았다. 거대한 구상이었다. 이렇게 하여 '광무제(光武帝)의 국외망명기도사건'이 진행되었다. 전 판서 민영달이 거액을 내놓았다. 이 준비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우당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의 증언이다.

이때는 마침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과 왜(倭) 황가(皇家) 방자(芳子)와의 혼담 결정으로 황제의 고민이 지극하였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교영(李喬永)이 부친의 생각을 황제에게 전하자 뜻밖에 쾌히 승락하셨다. 부친은 황제께서 승락하셨다는 소식을 이교영으로부터 전해 듣고 홍증식(洪增植)을 데리고 민영달(閔泳達)을 찾아가 고종 황제의 뜻을 전하며 그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러자 민영달은 "황제의 뜻이 그러시다면 신하된 나에게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나는 분골쇄신하더라도 황제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며 쾌히 승락하였다. (주석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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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행차. ⓒ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극비리에 고종의 망명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1918년 중반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전후 처리를 위해 〈14개조 평화원칙〉 중에 민족자결주의를 포함시킴에 따라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의 뜨거운 기운이 일고 있었다. 윌슨의 주창에 앞서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직후 레닌은 러시아 내 100여 개 소수민족에 대해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하는 〈러시아 제민족의 권리선언〉을 선포했다. 다시 이규창의 증언.

이리하여 부친께서는 민영달 씨와 비밀리에 만나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였다. 먼저 수(水), 육(陸) 두 가지의 출국 행로를 비교하여 배를 타시기로 하였고, 다음 행선지에 대해서는 우선은 중국으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비교하여 북경에 행궁(行宮)을 정하기로 하였다. 민영달 씨는 자금으로 5만 원을 내놓고 부친은 준비작업을 맡기로 하였다. 1918년 말 무렵 부친께서는 민영달 씨가 내놓은 자금을 이득년ㆍ홍증식 두 동지에게 주어 북경에 머물고 있던 다섯째 숙부인 성재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하고 고종황제께서 거처하실 행궁(行宮)을 임차하고 수리하도록 부탁하였다. 상해임시정부 조직자금도 5만 원 중 일부였다.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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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장례식 고종 장례식 ⓒ 신용철

 
이시영은 고종이 거처할 장소는 물론 향후 독립운동의 방략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고종이 갑자기 붕어함으로써 거사는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망명 시도를 알고 일제가 독살했을 가능성이 따른다.


주석
4> 이정규, 『우당 이회영 약전』, 58쪽, 을유문고, 1985.
5> 이규창, 『운명의 여진(餘燼)』, 52쪽, 클레버, 2004.
6> 앞의 책, 52~53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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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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