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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정부 재무총장 이어 상하이임정 참여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23회] 3ㆍ1혁명의 적장자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등록 2020.07.30 18:29수정 2020.07.3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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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 비각(정동) 근처에서 만세운동을 구경하는 사람들 ⓒ 시민주권

 
'강도일본'(신채호 표현)에 국권을 빼앗긴 지 9년만인 1919년 3월 1일을 기해 한민족은 거족적으로 봉기하였다. 3ㆍ1혁명이다.

3월 1일부터 4월말까지 2개월 동안 집회 총인원 202만 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피검자 4만6,948명, 불탄 종교기관 47동, 불탄 민가 715호 등이다. 당시 인구는 1,800만 명이었다.

독립만세 시위는 국내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거주하는 해외 각 지역에서도 전개되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에서 자주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 3~4월에 국내외에서 총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ㆍ선포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한성임시정부와 러시아 노령임시정부 그리고 상하이임시정부였다.

한성임시정부는 1919년 3월 23, 24일 국민대회 13도 대표자들이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통해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이시영은 한성임시정부의 재무부총장으로 선임되었다.

한성임시정부의 각료는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 내무부총장 이동녕, 외무부총장 박용만, 재무부총장 이시영, 차장 한남수, 교통부총장 문창범, 군무부총장 노백린, 법무부총장 신규식, 학무부총장 김규식, 노동국총판 안창호, 참모부총장 유동렬, 차장 이세영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재무차장 한남수와 참모부차장 이세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외에 있었다. 따라서 한성임시정부는 국외망명가들이 중심이 된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이시영을 비롯하여 선임된 각료 대부분이 해외에서 활동 중이어서, 어떤 경로를 통해 선임되었는지, 밝혀진 바 없다. 이시영은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3ㆍ1혁명을 계기로 국내에서 최초로 조직된 임시정부에 쟁쟁한 독립운동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주요 객원으로 선임된 것은 그동안의 독립운동이 돋보인 결과였다.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으로 한성임시정부는 활동을 계속하기 어려웠고, 이시영도 물론 귀국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한성임시정부는 '페이퍼 정부'의 역할에 그치게 되었다.

3ㆍ1혁명의 적장자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상하이는 1800년대부터 상업도시로 발전한 해상교통의 요지이고,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의 거점도시인데다 1840년대에 외국주권이 행사되는 조계(租界), 즉 미국ㆍ영국ㆍ프랑스의 조계가 있었다. 미국과 영국의 조계 대신 프랑스조계를 택한 것은 1789년 대혁명정신, 자유ㆍ평등ㆍ박애정신이 남아 있었고, 프랑스조계에서는 한국의 임시정부 장소를 양해하였다.
  

중국의 아버지 손문과 대한민국의 아버지 신규식 ⓒ 위키피디아

 
상하이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선택한 인물은 중국 신해혁명에 직접 참여한 신규식의 역할이 컸다. 을사늑약에 분통하여 음독했다가 오른쪽 눈을 실명한 신규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문을 도와 신해혁명에 가담하고, 이후 박은식ㆍ신채호ㆍ이상설 등과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여 상하이에 둥지를 틀었다.

신아동제사의 지사들은 얼마 후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고종황제를 모셔와 망명정부를 수립하고자 국내에 밀사를 파견했다. 거사를 준비하던 성낙형이 일제경찰에 검거되면서 이 운동은 좌절되고, 1917년 7월 신규식ㆍ조소앙ㆍ신채호ㆍ박은식ㆍ윤세복ㆍ홍명희ㆍ박용만 등 14명이 「대동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연대를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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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청사 출입구 상해임시정부청사 출입구 ⓒ 오마이뉴스 김시연

 
독립운동가들에게 국제정세의 변화가 감촉되었다. 앞에서 소개한대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1917년 11월 볼셰비키혁명 후 레닌이 러시아 안의 100여 개 소수민족에게 '민족자결'을 원칙으로 하는 〈러시아 제민족의 권리선언〉을 발표하고,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 〈14개조 원칙〉을 선언하였다.

여운형 등 동제사 간부들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는 한편, 국내에서 3ㆍ1혁명이 발발하고 임시정부수립론이 제기되면서 상하이를 중심으로 임정수립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상하이에는 기존의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핵심인사들을 비롯하여,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이시영 형제, 러시아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3ㆍ1혁명의 주역들이 파견한 현순, 일본에서 2ㆍ8독립선언을 주도한 최근우, 미국에서 여운홍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여운형ㆍ현순 두 사람의 대표로 베이징에 찾아와서 선생을 초청하므로 중형 회영과 이동녕ㆍ이광 등과 더불어 상하이로 갔다."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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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 상해임시정부 청사 건물 ⓒ 김정은

  
이들은 프랑스 조계 보창로 325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렸다. 비용은 국내에서 3ㆍ1혁명 준비기금으로 천도교의 손병희가 기독교 이승훈에게 전한 5천원 중 2천원으로 사무소를 임대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6~27일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할 '최고기관'의 설치 문제를 논의하고, 이시영ㆍ이동녕ㆍ조소앙ㆍ이광ㆍ조성환ㆍ신석우ㆍ현순ㆍ이광수가 참여하는 8인위원회를 구성하여 임시정부 수립절차에 들어갔다. 8인위원회는 논의를 거듭하여 먼저 임시의회를 설립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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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을 기념해 찍은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과 신익희, 윤현진, 안창호, 손정도, 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 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 줄 왼쪽 첫 번째 여운형 등이 보인다. ⓒ 역사학연구소

 
4월 10일 오후부터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셋방에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조직체의 성격과 형태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정부를 수립하자는 측은 국치 이래 국민의 소망은 정부수립에 있다는 주장을 폈고, 다른 측은 위원회나 정당을 먼저 구성하자는 주장이었다. 수직적인 정부가 수립되면 지역ㆍ단체ㆍ이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여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논란 끝에 결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뜻을 모았다.

국내 각도를 대표하는 29명으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국호와 연호, 국체, 임시헌장(헌법)이 채택ㆍ제정되었다. 국호는 대한민국, 연호는 대한민국 원년, 국체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임시헌장을 제정하기 위해 이시영ㆍ조소앙ㆍ신익희ㆍ남형우로 4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기초되었다. 이시영과 형 이회영은 서울 대표 자격으로 의정원의원에 선임되었다.


주석
1> 박창화, 앞의 책, 65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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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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