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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오만ㆍ독선 지켜보며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26회]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을 탄핵한 이유

등록 2020.08.02 12:10수정 2020.08.0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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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청사의 모습.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며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1919년 8월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수차례의 논의 끝에 9월 11일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 명단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 이승만
국무총리 : 이동휘
내무총장 : 이동녕
외무총장 : 박용만
군무총장 : 노백린
재무총장 : 이시영
법무총장 : 신규식
학무총장 : 김규식
교통총장 : 문창범
노동총판 : 안창호

통합 임시정부가 정부 수반의 호칭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바꾸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의 줄기찬 요구 때문이었다.

국무총리로 선출되고서도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승만은 국무총리 아닌 대통령으로 행세하였다. 그는 대통령 호칭에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미국식 정치와 문화에 깊숙히 젖어 있어서 미국 정부의 수반 프레지던트란 호칭이 의식에 각인된 것이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직제에 대통령 직함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무총리 직제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한글로 대통령, 영어로 프레지던트를 자임한 것이다. 사소한 문제라 여길 지 모르지만 그는 헌법 위에 군림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해방 뒤 집권하여 몇 차례나 헌법을 뜯어고치고, 헌법을 무시하면서 멋대로 통치한 것은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 '헌법 위에 군림'하는 태도에서 발원한다.

이시영은 이때부터 이승만의 오만과 독선을 지켜보았다. 그는 일보다 지위와 감투를 탐하고, 어려운 시기에 화합보다 분열을 조장하였다. 해방 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고, 자신은 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임시정부시절의 작태를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정부령 제1호와 제2호를 반포하여 내외 동포에게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제1호)과, 적(일제)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제2호)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령하였다. 그리고 국내조직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한 데 이어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관리하에 두었다.

연통제는 지방행정조직이고 교통국은 비밀 통신조직이었다. 국내의 무장ㆍ사상투쟁을 위하여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두고 1개 면에 1개의 교통소를 설치하도록 하고, 연통제는 각 도와 각 군에 지방조직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국내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3ㆍ1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국내의 독립기금 송금과 청년들의 임시정부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 눈빛출판사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외무총장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 이어 이회영ㆍ신채호 등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상하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버렸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 정부가 지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물의를 일으키다가 1921년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동녕 → 신규식→노백린이 차례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를 이끌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반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무슨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하였다.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떠나는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이시영도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분란 속에서도 임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만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독립전쟁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광복군총영, 의열단, 의군부, 대한신민단, 혈성단, 신대한청년회, 복황단, 창의단, 청년맹호단, 학생광복단. 자위단 등이 결성되고, 특히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각지에서 무장투쟁을 하고 있었다.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연대하여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를 통해 국치 이래 최대의 항일대첩을 이루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상하이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실현성이 취약한 '외교독립론'에 빠져 있었다.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얼마 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이런 분란에도 불구하고 이시영은 일제패망 때까지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로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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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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