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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원, 이승만 대통령 탄핵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27회] 그의 국제감각은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의 타도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었다

등록 2020.08.03 17:46수정 2020.08.03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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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 이승만 파리강화회의 후 이승만이 추진한 '위임통치' 청원은 이승만 탄핵으로 이어졌다. 특히 단재 신채호는 '이승만이 이완용이나 송병준보다 더 큰 역적'이라며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 먹으려 한다'고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격렬히 비판했다. ⓒ 국가기록원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29일 마닐라행 기선 컬럼비아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다.

6월 29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민찬호 등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동지회 창립석상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1921년 9월 29일 태평양회의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침을 받고 하와이에서 워싱턴 D.C. 로 돌아왔다. 태평양회의 한국 대표단의 전권대사로 임명된 것이다.

태평양회의는 1921년 7월 11일 미국의 신임 대통령 하딩에 의해 제의되었다. 파리강화회의가 유럽중심의 국제현안을 다룬 것에 비해 동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현안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국제회의를 워싱턴에서 갖자고 제의, 일ㆍ영ㆍ불ㆍ이 등이 받아들이면서 개최하게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고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워싱턴 D.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The Korean Commission)로 명칭을 바꾸고 이를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이 8월 25일 워싱턴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이승만 등이 한국위원회를 발족,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10월 10일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대표에게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12월 1일에는 다시 〈군축회의에서 드리는 한국의 호소〉를 발표하는 등 노력했으나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워싱턴회의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이승만은 1922년 2월 호놀룰루로 귀환하였다. 상하이에 이어 워싱턴의 활동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이것은 이승만이 하와이에 정착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1923년 6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는 걸맞지 않는 행사를 하여 교포 사회에 물의를 빚었다.

이승만은 1923년 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의 남학생 12명, 여학생 8명으로 '하와이학생 고국방문단'을 구성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 건축비 조달을 목적으로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관과 교섭하여, 이 학생들이 일본 여권을 갖고 한국을 방문케 하였다.

이승만이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상하이임시정부는 한때 구심을 잃고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다. 의정원은 탄핵 발의에 앞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수습을 요청했으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승만은 의정원의 사태수습 요구를 외면하고 결국 더 이상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에게 중국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는 우선 신변의 불안감을 느끼게 하였고, 무엇보다 일제와 싸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로 인식되었다. 그의 국제감각은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의 타도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었다.

임시정부의정원은 1922년 6월 10일 이승만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일주일 간의 토의 끝에 6월 17일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하였다. 정부수립 3년여 만에 임시 대통령 불신임안이 채택된 것이다. 다음은 5개항의 '불신임'의 이유다.

① 임시 대통령 피선 6년에 인민의 불신임이 현저하여 각지에서 반대가 날마다 증가되며 그 영향이 임시정부에 미치는데 민중을 융화하지 못하고 감정으로만 민중여론을 배척하는 까닭에 분규와 파쟁이 조장되고 독립운동이 침체상태에 빠져 있다.

②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빙자하며 미주에서 동포들이 상납하는 재정을 수합하여 임의 사용하였고 정부 재정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국제연맹과 열강회의를 대상으로 하던 구미위원부 외교사무가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헛된 선전으로 동포를 유혹하여 외교용 모집을 계속하여 그 재정으로 자기의 동조자를 매수하고 있다.

③ 국무위원이 총사직을 제출하였으나 임시 대통령이 그 사직청원서를 처리하지 못하고 몽매한 처사로 여러번 국무총리를 임명하였는데 당사자가 알지 못하게 단독적 행사를 하여 혼란을 계속할 뿐이고 아직도 정부를 정돈하지 못하고 있다.

④ 국무위원은 총사직을 발표한 다음 아직도 거취를 작정하지 못하고, 다만 임시 대통령의 처사를 기다린다고 하여 곤란한 시국에 대책 없이 앉아서 감정적 행동으로 정부위신을 타락시키고 있다.

⑤ 이상의 사실이 임시 대통령과 국무원 불신임안 제출의 이유다.

임시의정원의 '불신임' 결의에도 이승만은 대안의 불구경하듯 하였다. 무책임ㆍ독선ㆍ아집의 극치였다. 그는 구미위원부의 사업을 빙자하여 임시정부의 허락도 없이 독립공채를 팔아 자신과 측근들의 활동비에 충당하였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곽헌ㆍ최석순ㆍ문일민ㆍ고준택ㆍ강창제ㆍ강경신ㆍ나창헌ㆍ김현구ㆍ임득신ㆍ채운개의 명의로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고, 임시 대통령심판위원장 나창헌, 심판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이 선임되었다. 심판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임시 의정원에서 〈임시 대통령 이승만 심판서〉를 의결하고 주문(主文)으로 "임시 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한다"고 공표하였다. 

이시영은 이승만이 탄핵된 후 편지를 썼다. 모든 것이 그의 오만과 독선의 결과이지만, 국무위원의 위치에서 책임의 일단을 자책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신에서 이승만은 "자신이 탄핵에 이른것은 이동녕의 책임이고, 자신을 탄핵한 임시의정원을 해산하고 내각을 새로 조직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니나, 인심의 추이를 살펴 단행할 계획임을 밝혔다." (주석 2) 이승만의 편지에는 본인의 책임이나 실정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이시영은 5년을 넘게 재무총장으로 대통령을 옹호하고 임시정부를 유지해왔지만 이승만이 면직되고 새 내각이 들어서면서 상해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시영은 1925년 2월 25일자로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상해에 기거하기도 이제는 극히 어려우니 장차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허물을 뉘우치며 자취를 감추고 숨어 살 계획"이라고 거취를 밝혔다. (주석 3)

이시영이 상해를 떠난 후 1929년 말까지 중국 관내에서 유일당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지만, 이 시기 이시영의 움직임은 자료상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주석 4)


주석
2> 「이승만이 이시영에게 보낸 1925년 4월 22일자 편지」, 국사편찬위원회『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2:서한집1』, 278~279쪽.
3> 「이시영이 이승만에게 보낸 1925년 2월 25일자 편지」, 국사편찬위원회,『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2:서한집1』, 267쪽.
4> 이재호,「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시영」, 성재 이시영 선생 학술발표회 논문, 2011.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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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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