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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과 의용군, 그 이름의 뿌리를 찾다

[새로 쓰는 독립군사(史) ②] 민주공화국을 위한 항일무장부대 명칭의 탄생

등록 2020.07.28 14:47수정 2020.07.2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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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노령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쳐 싸운 전사를 독립군, 의용군, 혁명군, 빨치산, 게릴라 등으로 불렀다. 독립전쟁 때 이름은 독립군, 의용군, 혁명군이고, 빨치산, 게릴라는 후일의 회고이거나 전술적 표현으로 썼다.

독립전쟁 주체인 무장대오 이름은 3.1혁명 정신이 올곧이 반영돼 있다. 조선, 또는 대한제국을 지키기 위한 무장대오는 의병이었다. 3.1혁명 후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천명했으므로, 독립전쟁의 무장대오 이름은 더 이상 의병일 수 없었다. 곧 민주와 공화를 실현하기 위한 군대로서 독립군, 의용군, 혁명군이 되었다.

독립군이란 이름의 사용은 세 단계를 거쳤다. 첫째, 구국계몽기에 애국심을 고취하는 일반명사로 사용했다. <대한매일신보>(1909년 7월 24일)에 실린 애국창가 <소년남자가>는 '독립군의 팔다리 민활하도다'고 하여 '소년 남자'의 애국심을 고양하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실제 항일무장대오를 가리키지는 않았다.

'독립군' 이름 사용의 유래

둘째, 3.1혁명 전후에 무장투쟁 주체로서 독립군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독립군아 일어나 대오를 정비하라. 기(起)하라 독립군아, 제(齊)하라 독립군아"라고 하며 독립군 궐기를 강하게 요구했다. 이 선언서는 만주에서 발표됐는데 항일 근거지에서 고조되는 무장투쟁의 분위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하지만 실제 무장대오 편제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기에 전민항전(全民抗戰)을 상징하는 표현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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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 만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고 있다. ⓒ 독립기념관

 
<독립신문>(1919년 8월 26일)이 3.1혁명의 만세시위에 나선 지도부와 민중을 모두 '독립군'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비폭력 평화시위를 내세웠지만 일,제의 잔학한 무력진압 과정에서 민중은 때로 일제 군경에 거세게 맞서 싸웠다. 무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무장대오 편제의 단초가 형성되었고 따라서 시위운동도 '전투'의 개념으로 형상했다.

이를테면 정주(定州)에서는 3월 31일 2만여 명이 모여 정주성의 여러 문을 짓쳐 들어갔는데,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그날에만 92명이 학살되었다. <독립신문>(1919년 10월 11일)은 '정주 독립군'이란 제목 아래 '정주성을 공격하는…전투'라고 그 상황을 전했다. 하지만 3.1혁명 때 실제 무장대오는 편제되지 않았다. 독립신문은 전민항전을 촉구하기 위해 독립군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전민항전으로서의 독립군이란 표현이 실제 무장대오 편제를 전제로 한 전사(戰士)로서의 독립군이란 표현으로 바뀌는 과도적 단계에서 결사대, 또는 감사대(敢死隊)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 3.1혁명 전에 발표되었다는 <대한독립선언서>에서 이미 독립군이란 표현을 사용했지만 3.1혁명 직후 만주에서는 독립군이란 표현 대신 결사대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일제 정보문서에는 만주·노령의 결사대가 국내로 진공한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테면 1919년 4월 2일 문서('기밀공신제6호 조선독립운동정보 송부의 건')는 노령 결사대 3만 명, 왕청현 수분대전자의 결사대 5백 명, 포조 신한촌의 결사대 7천 명, 훈춘의 결사대 등을 적고 있다. 인원이 과장되고 무장했다는 내용도 사실과 다르다. 하지만 항일 근거지에서 무장대오를 목표로 한 결사대의 존재가 '풍설'로 전파되고 있던 점은 중요하다. 전민항전으로서의 '독립군'이란 표현과 무장대오를 지향한 '결사대'라는 표현이 결합하여, 항전 주체로서의 전사를 형상한 '독립군'이란 이름이 나올 기반이 생겼다.

셋째, 만주의 독립군단이 실제 무장대오를 편제하면서 독립군은 항일전쟁 전사(집단)를 형상하는 표현으로 구체화되었다. 관건은 항일전쟁을 전개할 부대 편제와 무장이었다. 만주·노령의 항일 근거지에 항일전쟁론이 확산되고, 또 3.1혁명의 세례를 받은 청년들이 집결하면서 실제 무장대오가 편제되기 시작했다. 남만주의 서로군정서, 독립군비단, 대한독립단, 광복군총영 등과 북만주의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 신민단 등 대소 독립군단이 실제 부대를 편제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무장대오의 전사를 독립군으로 불렀다. 아울러 각 무장대오는 대호(隊號: 부대 이름)를 갖기도 했다.

실제 무장대오 편제로서의 독립군·의용군이란 이름은 1919년 4월부터 이미 보인다. 일제정보문서에 화전현 두도하자에서 독립군을 모집한다는 내용이 있고, 또 국민회 훈춘지부 총회에서 의용군 모집을 결정했다는 내용도 있다.(주1) '모집'은 무장대오 편제가 실행 단계로 진전됨을 뜻한다.

1919년 말부터는 무장대오로서 독립군·의용군이란 이름이 널리 사용됐다. 10월에 국내에서 독립군을 환영하고 이에 대비해 준비하자는 <대한독립군환영취지서>가 배포되기도 했다(주2). 안창호는 1920년 신년축하회에서 군사 문제를 논하며 독립군이 되어 독립전쟁을 이루자고 연설했다. 만주에서 간행되는 <한족신보>(한족회 기관지. 1920년 1월 11일)는 '일어나라 독립군'이라고 외쳤다. 이때는 독립군이 무장대오로서 실체를 갖추고 있었다.

의용군이란 이름도 널리 썼다. 1920년 1~2월 일제 정보문서는 이동휘가 지도하는 의용군 350명이 왕청현 등에 있고, 이명순과 황병길이 의용군을 모집하고 있으며, 삼차구 지역에 의용군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전한다.(주3) 일제 정보문서의 불확실성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만주에서 의용군이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던 것은 확실하다.

항일무장부대의 목표를 나타낸 독립군, 성격을 나타낸 의용군

무장대오 편제를 마친 독립군단은 대호를 갖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홍범도부대라 일컫는 대한독립군과 서로군정서의 의용대가 있다. 항일무장부대의 이름은 목표와 성격을 제시한다. '독립'군은 부대의 목표를 대호로 삼았고, '의용'대는 부대의 성격을 대호로 삼았다. 또 임시정부는 '군무부포고 제1호'에서 대한민국 군대 이름을 '광복군'이라고 밝혔다.

실제 남만주에서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무장대오로 광복군사령부(·총영)가 편제되었다. 1920년 10월의 경신참변 전에 남북만주에서 수십여 개의 독립군단이 조직되었지만 항일부대가 대호를 가진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 외의 독립군단은 행정조직으로서의 독립군단 명칭을 그대로 무장대오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국민회는 산하 부대를 국민회군(국민군)이라 했다.

무장부대가 대호를 갖는 것은 근대적 군사 편제와 연관된다. 각 독립군단이 무장대오를 편제했지만 행정조직과 부대 편제를 구분하는 확실한 방법이 바로 대호를 갖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항일부대의 독자성이 담보되고 또 당시 독립전쟁 전략에서 가장 중요했던 무장대오의 통합도 진전될 수 있었다. 실제 홍범도부대는 대한독립군이란 대호를 사용한 이래 다른 무장대오와 통합하면서 정일군(征日軍), 대한의용군 등으로 계속 대호를 바꾸어나갔다.

의용군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민간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민병(民兵)'이다. 만주의 각 독립군단이 임시정부의 실제 지원을 받지 못한 점에서 각 독립군단의 무장부대는 기본적으로 의용군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만주의 의용군은 비정규군으로서의 민병과는 구분된다. 우선 동포사회의 행정조직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군사적 의미에서 비정규군은 무질서나 영웅주의 같은 단점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만주 의용군은 민간 무장대오이지만 군사훈련을 통해 정규군이 되었다.(주4)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등이 그 역할을 했고 국민회군, 군비단, 광복군사령부 등도 자체 군사훈련 과정을 갖추고 있었다.

대호로서 의용군은 서로군정서에서 처음 사용했다. 서로군정서는 산하 부대를 '의용대'라 했는데, 독립전쟁 군사전략을 바탕으로 한 군인 양성 계획이 의용대 편제로 구현되었다. 서로군정서는 청장년 모두 군인이 될 의무가 있다고 천명했다. 모두가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에 평시엔 생산 활동을 하고, 필요할 때 군인이 돼 왜적과 전투한다. 훈련받은 모두가 잠재적 독립군이고 상시 무장부대는 이들과 구별해 의용대라는 대호를 갖는다. 말하자면 재향군인과 구별되는 현역군인이 의용대였다. 정의부는 '현역 군인'이 '의용군'이라고 뚜렷하게 밝혔다. 남만주 무장대오는 서로군정서 전통에 따라 그 이후 통합군단으로 조직된 통의부·정의부·참의부의 부대도 의용군이란 대호를 가졌다. 결국 남만주 독립군은 의용군이란 대호로 통일되었다.

정의부 말기에는 대호를 조선혁명군으로 바꾸었다. 삼부통합운동의 결과 남만주에서 탄생한 국민부 무장대오도 조선혁명군이라 했다. 무장대오 성격을 표방한 대호에서 목표를 표방한 대호로 바뀌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만주에서 공산주의운동이 점차 확산되며 민족주의운동과 대립했지만 운동 전망에서는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이 결합되었으며 혁명을 표방했다.

조선혁명군은 '선언'에서 '조선 혁명의 군사적 임무(역할)'를 수행한다고 했다. 여기서 혁명이 '공산'혁명은 아니다. 조선혁명군은 초기에 공산주의 세력과 무력투쟁을 했기 때문에 반공 무장대오로 인식되기도 했다.(주5) '선언'에서 혁명은 조선의 '노력 대중' 모두가 나서서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 민족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뜻이었다. 일제에 피체되었던 조선혁명군 군인(김동보)도 그 사명이 '조선국 독립'이라고 단언했다. 곧 독립군 목표를 바꾼 것이 아니고, 독립을 혁명으로 연계하는 선언이었다.

결국 남만주에서 독립군 대호는 의용대·의용군-혁명군으로 이어졌다. 북만주에서는 경신참변 이후 고려혁명군이란 대호를 가진 독립군이 조직되기도 했지만 동포사회의 행정조직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고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24년에 북만주의 독립군이 연합하여 의용군을 조직하기로 했다는 기사(<동아일보>1924년 4월 21일)도 있지만 실제 통합부대로서의 의용군이 편제되지는 않았다.

북만주는 각 독립군단 통합 조직으로 신민부를 결성했다. 하지만 산하 부대를 의용군이라 하지 않고 '보안대'라 했다. 보병대를 편제한 대호가 아니고 관할지역 위수(衛戍)의 뜻이 강했다. 이는 동포사회 행정기관의 모병을 바탕으로 한 의용군 제도가 북만주에서 공고히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정의부도 보안대가 있었지만 중앙의 정규 의용군이 아니고 각지 청장년으로 지역을 지키기 위해 편성한 부대였다. 무장을 갖추고 지역을 지키며 정규 의용군을 돕는 역할을 했다.(주6) 무장을 갖춘 재향군인이라 할 수 있다.

신민부 부대를 보안대라 한 것은 의용군과 재향군인의 분리가 제도로 정착되지 않아서 국내 진입 작전 등을 수행하는 보병대로서의 의용군보다 관할 지역을 지키는 보안대의 성격이 뚜렷하기 때문이었다. 북만주의 항일무장대오는 경신참변의 영향으로 세력이 남만주보다 약화되어 있었고, 신민부를 이어 조직된 한족자치연합회는 무장부대를 편제하지 않았다.

다만 한족자치연합회 한국독립당은 당 조직과 함께 재향 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해 항일전에 대비했고 만주사변 후 재향군인 소집령을 내려 한국독립군을 편제했다. 남만주의 조선혁명군과 북만주의 한국독립군이 대호를 가지고 활동한 마지막 독립군이었다.

빨치산과 게릴라

빨치산이란 이름은 노령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러시아말로 당시의 사전적 뜻은 '적의 좌우익이나 뒤로 음습하는 경쾌한 독립지대'로서 독립해 활동하는 비정규군, 소규모 별동대를 뜻했다. 노령 독립군의 활동으로 보면, 적군(赤軍)을 도와 적 점령지역에서 일본군과 백군에게 타격을 주는 비정규군이었다.

코민테른은 만주 독립군도 빨치산이라고 표현했지만,(주7) 노령의 독립군은 노령 항일부대를 빨치산, 만주 항일부대를 독립군으로 구분했다. 김경천의 당시 일기에도 만주 소식을 전할 때는 독립군이란 표현을 쓰고 노령에서 자신이 지휘한 항일부대는 빨치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노령 빨치산도 독립에 목표를 두었다. 내전이 끝나고 빨치산의 무장해제가 있자, 노령 빨치산에게도 독립군이란 표현을 썼다.

곧 '항일'이란 목표로 공동 전투에 참가할 때는 빨치산이라 했지만, 일본군이 철수하고 적군이 한인 빨치산의 무장을 해제하고, 나아가 살해하는 경우까지 생기자 빨치산이란 명칭을 철회하고 노령 항일부대가 독립군임을 밝힌 것이다.(주8) 하지만 해방 이후 러시아에 사는 독립군들은 회고에서 만주 독립군도 거의 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경천아일록 원문 노령에서 한인빨치산의 무장이 해제당한 후 '불쌍한 독립군'이라고 표현했다. ⓒ 김경천, <경천아일록>(학고방, 2012)


게릴라라는 명칭은 만주 독립군의 회고에 나온다. 특정 부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술적 차원에서 언급되었다. 조선혁명군 참모장이었던 김학규는 회고(<백파자서전>)에서 "36년 동안 혈전을 계속해 온 유명한 우리 독립군의 대일 '게릴라'전쟁"이라고 했다. 독립군 전술이 게릴라전이라는 뜻이다. 소규모 단위 전투를 넘는 전역(戰役)도 있으므로 독립군 전투를 일괄해 게릴라전이라 할 수는 없다. 게릴라는 독립군 무장부대의 명칭이 아니라 전술 차원에서 표현되었다. 당시 만주는 물론이고, 국내 언론도 독립군을 게릴라, 또는 빨치산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당시 항일무장부대는 독립군, 의용군(의용대), 혁명군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노령에서는 한때 빨치산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근원은 독립군이었다. 독립군·혁명군은 무장대오의 목표를, 의용군은 무장대오의 성격을 형상했다. 일반명칭으로 부르기도 하고 부대이름으로 쓰기도 했는데, 상호 배타적 명칭이 아니고 보완, 교차의 뜻이 있었다. 홍범도는 대한독립군 의용대장의 명의를 쓰기도 했다

독립군, 3.1혁명을 완수하는 무장부대의 존재

독립군과 의용군이란 이름은 국내 언론에 거의 매일 전해졌다. 3.1혁명의 뜻을 완성하기 위한 항일무장부대가 존재하고, 나아가 일제에게 타격을 주고 있음이, 곧 독립의 희망이 더욱 거세지고 있음이 독립군·의용군이란 이름을 통해 알려지고 있었다. 검열이란 제한 속에서도 기자들은 독립군 소식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3.1혁명 후 만주에서 독립군단이 편제되고 무장을 갖추기 시작할 무렵 한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북방 만주로부터는 독립군이 쳐들어온다, 이러한 소문이 작년 이래로 거의 끊일 사이 없이 우리의 귀를 울린다. … 이러한 것을 보도할 자유가 구속되어 있는 까닭에, … 누구든지 궁금하게 지내는 중[이다.]"

그리고 만주 독립군의 실상을 일제 관리의 말을 빌려 같은 지면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주9)

"간도와 국경 지방에는 삼십만의 조선인이 있는데 그중에서 십분의 일을 배일사상을 가진 자라 하면 그 실상 수효가 삼만 명이나 되며 그들은 지금도 오히려 무장을 하고 국경 방면을 협박하는 중인데 그네가 가진 무기는 가장 신식이니 과격파가 뒤를 대는듯하고 그들은 거의 일본말을 잘하는 젊은 사람이므로 모두 일한합병 후에 일본의 교육을 받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요 그들은 통일이 있고 훈련이 있으며 독립운동에 대한 열심은 과연 열락하야 다른 사람에게까지 감화를 주게 되여 국경지방의 조선사람 사상이 점점 험악하여 감은 사실[이다.]"

만주라는 항일 근거지에서 항일 무장부대가 편제되어 무장을 갖추고 군사훈련을 받고 있으며, 그 기세가 더욱 확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주체가 경술국치 후에 교육받은 젊은이들이라고 해, 3.1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청년들이 망명해서 군사교육을 받고 독립군이 되는 정황을 국내 동포들에게 알리고 있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17일 기사 독립군 소식을 전할 자유가 억압되어 있다고 하면서 일제 관리의 말을 빌려 독립군 소식을 싣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1920년대 전반기 국내 언론에 거의 매일 실린 독립군 소식은 동포들에게 3.1혁명의 목표가 독립군을 통해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었다. 독립군 소식은 그에 대해 알고자 하는 국내 동포들의 바람을 반영했다.

결국 일제는 독립군 소식이 전파되는 경로를 막으려고 검열을 강화했다. 곧 무장대오로서의 독립군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1925년 이후에는 일반명사로서의 독립군이란 표현도 쓰지 못하게 했다. 나아가 '독립단'이란 표현도 사용할 수 없게 했다. 검열을 통해 '독립'이란 글자를 아예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 실정을 다룬 한 기자는 "'독립단'이란 문구를 '무장단'으로, 'ㅇㅇ단'으로 고쳐 쓰는 이유까지 질문하였으면 우리의 가슴은 막히다 못하여 터질 것이다"고 토로했다.(주10)

단독립군→독립단→무장단→OO단으로, 점차 기사에서 독립군의 흔적을 지우려는 검열 강화 앞에서, 기자들은 가슴 아프게 분노하고 있었다. 독립군 표현에 대한 일제의 검열 강화는 역설적으로 독립군이란 이름의 '존재' 자체가 일제에게 타격을 주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독립군·의용군·혁명군이란 이름은 일제의 폭압에도 겨레의 얼이 꺾이지 않고 살아 있고 일제의 무력에 당당히 맞서 싸우는, 그리하여 끝내 조국을 독립시킬 무장대오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힘이었다.

(주)
1)「소밀제747호. 독립운동에 관한 건. 1919년 4월 24일」; 「소밀공신제51호. 결사대 및 신국민회 지부에 관한 건. 1919년 4월 30일」.
2)『독립신문』 1919년 10월 28일. 이 문건은 임시정부 군사부를 언급하고 있다.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항일무장대오를 독립군이라 부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기밀공신제10호. 의용군 모집과 기부금 강요에 관한 건. 1920년 1월 23일」; 「고경제2969호. 1920년 2월 5일. 국외정보」.
4)소비에트 적군을 창시한 트로츠키는 게릴라전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정규군과 같은 군사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김남 편역, 『군사론』, 녹두, 1985, 193쪽. 경신참변 전 만주 독립군은 각지에서 다발적으로 조직된 비정규군이었지만 군사훈련을 통해 정규군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고 비정규군의 특성인 무질서 등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5)장세윤, 「조선혁명군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집, 1990, 325-326쪽, 335쪽.
6)채영국, 『한민족의 만주독립운동과 정의부』, 국학자료원, 2000, 213-214쪽.
7)안공근이 코민테른에 전한 임시정부 활동 내용에 만주 독립군은 모두 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안공근의 표현이 아니라 독립군을 빨치산으로 번역한 것이라 하겠다.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에 관한 안공근의 추가구도보고」.
8)김경천, 『경천아일록』, 학고방, 2012, 149, 150, 154쪽.
9)『동아일보』 1920년 6월 17일.
10)『동아일보』 1926년 7월 5일.
덧붙이는 글 '새로 쓰는 독립군사' 연재는 주중에 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독립군 되기 - 망명'입니다.
#독립군 #의용군 #혁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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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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