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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 옷 훔친 나무꾼에게 형벌을, 이런 통쾌한 동화라니

[서평] 전래동화를 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선녀는 참지 않았다'

등록 2020.07.29 10:25수정 2020.07.2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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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것을 보며 눈과 귀를 의심했다. 나를 포함해 그 어떤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청렴하고, 바른생활 신봉자일 거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했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박원순을 옹호한다는 건 아니다. 피해자를 응원하며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길 바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또 하나 혀를 내두르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담을 넘어 여자 중학생이 사는 방안을 훔쳐본 한 남자가 CCTV에 찍혔다는 것. 그 남자는 남의 집 앞을 오가며 여러 차례 집안을 훔쳐봤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학생을 훔쳐본 것일까?


그러다 문득 이 모든 게 선녀의 옷을 멋대로 훔치고도 선녀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나무꾼 이야기 때문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린 시절 안 읽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 말이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 표지 ⓒ 위즈덤하우스

지금 생각해보면 나무꾼의 행위는 노총각의 로맨스가 아니다. 목욕하던 선녀의 알몸을 훔쳐 본 관음증, 강제로 데려가 아내로 삼으려 한 강요죄에 해당할 것이다. 게다가 나무꾼과 선녀는 두 아이를 낳았다. 

이런 비뚤어진 성 의식을 바로잡는 책이 눈에 띄어 이 글을 쓴다. 바로 <선녀는 참지 않았다>이다. 이 책의 미덕은 '전래동화가 내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성차별주의를 타파'하는 데 있다. 책으로 들어가 보자.  
 
선녀는 옷을 훔친 나무꾼은 물론이고 파렴치한 계략을 꾸며내 나무꾼과 작당한 사슴에게도 벌을 내린다. 나무꾼에게는 맨몸뚱이로 1000일간 투명 옷을 입을 것을, 사슴에게는 1000일간 입이 묶인 채로 생활할 것을 명한다.
 
우리가 흔히 전래동화에 기대하는 '진짜' 권선징악의 결말이다. 이런 <선녀는 참지 않았다>의 전개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원전(原典) <선녀와 나무꾼>을 읽는 일곱 살 소년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예쁘게 생각한 여자들의 알몸을 몰래 엿보고, 옷 훔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구나. 정말 예뻐서,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니까!'

비약이 심하다고? 또 다른 전래동화 <서동과 선화공주>를 보자. 서동이란 작자가 한 짓을 보자.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서동은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고 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이런 내용이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소문 덕분에 대궐에서 쫓겨난 선화공주가 나중에 찾아온 서동과 해피 엔딩을 맺는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는 서동의 몹쓸 짓도 바로 잡는다.
 
'서동'은 선화공주와 언니들에게 발각되어 헛소문을 유포한 죄로 처벌받는다. '공주가 너무 예뻐 흠모하는 마음에 실수를 했을 뿐'이라는 서동의 항변에 "네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모욕하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누가 허락이라도 했단 말이냐?" 꾸짖으며 그의 이마에 '子干'(간, 간통하다라는 글자 奸에서 女대신 子로 바꾼 것)를 쓴 후 신라에서 쫓아낸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에 수록된 10편의 전래동화 중 겨우 2편의 동화를 이야기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동화를 지금의 아이들에게 읽어줘야 할까? '밥 잘 차려주는 여성'이 되기를 권하는 <우렁각시>보다는 성의 고정관념을 깨고 본인이 좋아하는 요리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우렁총각> 이야기가 더 재미있지 않을까?

호랑이 가죽을 받는 대가로 딸을 물건처럼 내주려는 아비가 등장하는 <반쪽이> 이야기보다는, 반쪽이를 피해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가 더 가슴 설레지 않는가?

<선녀는 참지 않는다>는 구오(俱悟, 함께 깨닫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 독서토론모임이 썼다. 이들은 여러 종류의 책을 함께 읽고 토의를 해오면서 여성적 시각이 담긴 콘텐츠의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절실히 느꼈단다. 이러한 생각들이 모여 한국의 전래동화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다시 써보게 됐다는 설명이다.

앞서 언급한 사건들 말고도, 우후죽순처럼 수많은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원전의 나무꾼과 서동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어른들은, 과연 건강한 성인지 감수성을 갖출 수 있을까? 겉으로는 진보주의자에 페미니스트라고 공언하면서 혹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여성의 성을 사물화하지 않았나? 여자들은 밥이나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나? 조금이라도 '나의 무의식'이 의심된다면 지금 당장 이 책을 펼쳐보길 바란다.

더 나아가 모든 학교에서 <선녀는 참지 않았다>를 필독서로 읽고 토론하는 시대가 오길 바란다. 우리 자녀의 손에 있어야 할 전래동화책이 바뀌는 건 시대가 변하는 이야기이기에.
 
"동화는 미래 세대인 어린이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처럼, 여성의 자각과 새로운 시각이 세상을 구할 것이다." - 정희진(여성학자, '페미니즘의 도전' 저자)
#전래동화 #선녀와나무꾼 #선녀는참지않았다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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