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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기나긴 독립전쟁도 없었다

[새로 쓰는 독립군사 ⑤] 독립군의 군사 훈련 2

등록 2020.07.31 15:59수정 2020.07.3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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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국망(國亡)이 거의 확실해지자 신민회는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해 집단 망명을 추진했다. 계획에 따라 이회영, 이시영 등 6형제 일가, 이상룡, 김동삼 등 혁신유림 들이 많은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서 만주로 망명했다. 그리고 군사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미개척의 산골짜기인 유하현 추가가(鄒家街)에서 시작된 신흥강습소는 만주로 이민해 오는 동포가 늘면서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병사를 구축하고 신흥(중)학교로 확대되었다.

신흥강습소 시절에는 일반교육 과정의 본과와 1년 속성 과정의 특과로 분리되어 있었다. 본과는 청소년의 일반 교육과 기초훈련을 담당했다. 윤기섭, 장도순, 이규봉 등이 교사였다. 특과는 전문적인 군인 양성 과정으로 이관직, 이장녕 등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장교가 교관이었다. 특과는 당시 만주에 군사교육을 담당할 교관이 부족하므로 중학 과정을 마친 청년과 성인에게 군사 훈련을 받게 하여, 지휘관, 교관, 또는 기초 군사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사로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이를테면 특과 졸업생 변영태는 국내에서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만주로 망명했기 때문에 본과 과정이 없이 특과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신흥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또 성주식도 특과 졸업 후 신흥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12년 말에 배출된 11명의 특과 졸업생이 만주 군사교육의 효시라고(주1) 하는 것도, 이들을 통해 본과 과정의 생도에게 군사 교육을 할 수 있는 재생산구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특과는 1기를 끝으로 마감되었다. 이후 중학과정(명칭도 신흥중학교)의 본과 3년 뒤에 1년의 집중 군사훈련 과정을 두어 신흥무관학교의 4년제 교육 체계가 완성되었다.

원병상이 소학교를 마친 뒤 1913년에 신흥중학교에 입학해서 4년제 과정을 마치고, 같은 해 입학했던 문상직도 4년제 과정을 마쳤으므로('문상직 피의자소행조서') 신흥중학교는 3년의 중학 과정에 1년의 집중 군사교육 과정이 추가된 체계였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1년은 '군사과'로 부르기도 했는데(<매일신보> 1920.2.28), 본과 3년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3년의 연장선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채찬(蔡燦) 같은 의병 출신은 본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군사과에 입교하기도 했다.

4년 과정은 1919년 3.1혁명 전까지 유지되었다. 3.1혁명 후 만주 독립진영은 준전시상태로 들어갔다. 홍범도는 해산했던 항일부대를 다시 편제했다. 곳곳에서 결사대가 조직되었다. 국내에서 망명한 청년들은 항일 전사가 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찾았다. 4년제 과정으로는 그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전시 상태와 같은 교육 과정으로 전환해야 했다.

따라서 속성 군사교육 과정을 수립해서 많은 청년들을 입교시켰다. 고산자(孤山子)에 병영을 세워 대규모 연병장을 만들고 본교를 이전했다. 합니하 학교는 지교(支校)가 되었다.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만들어 세 곳에서 동시에 군인을 양성했다. 중학 과정의 본과는 폐지되었다.

훈련 기간은 6개월, 또는 3개월이었다. 당시 교관이던 김승빈(金承彬)은 '6개월간 속성군사교육'이라 회고했고(<중령(중국령)에서 진행된 조선해방운동>). 졸업생 김전(金銓)도 '고산자 서로군정서 무관학교 속성과(速成科)'를 6개월 만에 졸업했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24.2.5.). 또 합니하 신흥학교 과정도 '속성반'이라 했다(<독립신문> 1919.10.25.). 3.1혁명 전에 다니던 학생들은 본교 고산자로 옮겨가 학년별로 새로 1-3기가 되어 6개월간 집중 군사훈련을 받고 졸업했다. 지교와 분교에서는 상황에 따라 3개월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고산자진 대두자 신흥무관학교 터 옥수수밭으로 변했고 뒤로 인가들이 있다.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11> ⓒ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신흥무관학교는 사관학교, 부사관학교, 사병훈련소의 3단계 근대적 군인양성 체계를 갖추었다. 곧 고산자는 사관학교, 합니하는 부사관학교, 쾌대무자는 사병훈련소 과정이었고 입학생도 그에 맞추어 모집했다. 군대는 장교-부사관-사병의 지휘체계가 있고 그에 맞추어 훈련도 진행된다. 대한제국기에 육군무관학교가 존재했지만 별도의 부사관/사병 훈련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3.1혁명 후 신흥무관학교의 3단계 과정은 대한제국기보다 진일보된 군인양성 체계였다.


채근식(<무장독립운동비사>)은 1개월의 특별훈련 과정(일반사병), 3개월의 부사관 과정, 6개월의 장교 과정이라고 했다. 김승학(<한국독립사>)은 3개월의 일반 훈련, 6개월의 간부 훈련(이상 초등군사반), 2년의 고급간부 양성 훈련(고등군사반)이 있었다고 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2년 과정은 없지만 3단계 과정이었음은 확실하다. 고산자 장교 과정은 중학 졸업 이상이 입학했고, 합니하 지교 부사관 과정은 중학 과정을 마치지 않은 학생이 입학했다. 이를테면 평양 숭실전문대학을 다니던 김훈(양명으로 불리던 김훈과 동명이인)은 고산자에 입학했고 서울 배재학교를 다니던 김형일은 합니하에 입학했다.(주2) 입학시험도 있었다. 쾌대무자는 사병의 기초 군사훈련 과정이었다.

졸업생도 3단계로 구분했다. 이상룡은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안도산께 드리다>)에서 3.1혁명 후 신흥학교 졸업생을 '우등, 2등, 3등 자격'으로 말했다. 장교, 부사관, 사병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용으로는 항일부대의 지휘 체계를 고려한 구분이었다.

당시 일제 문서로도 고산자, 합니하, 쾌대무자의 훈련 과정은 차이가 있다. 1919년 12월 16일의 일본군 관동군참모부 기록('관참모제688호')은 고산자를 대학교, 합니하를 중학교라고 했다. 소학교도 따로 언급했다('관참첩제704호'). 며칠 뒤의 기록('관참첩제704호')은 신흥중학교를 사관학교로 부른다고 하며 별도로 신흥소학교가 있다고 했다. 신흥중학교는 고산자와 합니하를 통칭하는 것이다. 또 1920년 초의 문서('관참첩제24호')에는 고산자와 합니하에 대학교라 칭하는 무관학교가 있고 쾌대무자에는 중학교가 있다고 했다. 합니하를 중학이라는 경우도 있고 대학이라는 경우도 있지만, 전체로 보아 대학-중학교-소학교의 3단계 과정이 있으며 대학 과정을 사관학교라 했다.
  

관동군참모부 문서 관참첩제688호 보통보 제21호 고산자 신흥무관학교를 대학교로 적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그리고 가장 높은 군사 과정으로 교성대가 있었다. 성적이 뛰어난 졸업생을 뽑아서 '독립군 사관으로 배속'시키기 위한 고급 군사교육 과정이었다.(주3) 곧 실제 '간부 사관'으로 임관시키기 위한 훈련 과정이다. 이 과정은 1920년 2월부터 개설되었다. 이병철은 1919년 10월 합니하 지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에 복무하다가 1920년 2월 교성대에 편입되어 4월까지 '특별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서로군정서 '의용대 내무반장, 간부'가 되었다(<동아일보> 1921.11.17). 후술하듯이 일제의 압박으로 졸업생을 교성대로 편제해서 안도현으로 근거지를 이동했는데 일제는 졸업생을 각 방면의 독립군 사관으로 배속시킨다고 파악하고 있었다.

군사 교재 편찬과 소부대 전술, 산악 행군의 실전 훈련

신흥무관학교 생도는 내무생활을 하면서 학과와 술과(術科)를 교육받았다. 3.1혁명 전에는 3년 과정의 본과에서 '국문, 역사, 지리, 수학, 수신, 외국어, 창가, 박물학, 물리학, 화학, 도화, 체조' 등을 가르쳤는데(주4) 3.1혁명 후 속성 사관 과정에서는 중학 과정을 졸업한 학생(고산자), 중학 과정에 있던 학생(합니하)을 교육시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반 학과 교육은 많이 축소되거나 없어졌다.

김산은 합니하 지교에 입학하기 위해 '지리, 수학, 국어, 국사, 신체검사'의 시험을 치렀는데, 이들 과목은 군사 교육을 위한 기초라 할 수 있다. 또 입학 후 '조선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주의 깊게 연구'했다는데(김산, <아리랑>) 학과 교육이 군사작전과 직접 연관된 분야에 집중되었음을 알 수 있다.

3.1혁명 전의 신흥무관학교 군사교육은 이관직, 이장녕, 김창환 등 대한제국 장교 출신들이 담당했다. 교육 내용도 대한제국 무관학교와 비슷했다. 비교하면 이렇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주5)
학과 : 전술학, 군제학(軍制學),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 외국어학
술과 : 각개 교련, 중대 교련 및 야외 연습, 자기 전공과 이외의 병기 용법 연습
기술 : 체조, 검술, 마술(馬術)
신흥학교(주6)
학과 : 보(步)·기(騎)·포(砲)·공(工)·치(輜)의 각 조전(操典), 내무령(內務令), 측도학(測圖學), 훈련교범(訓練敎範), 위수복무령(衛戍服務令), 육군징벌령(陸軍懲罰令), 육군형법(陸軍刑法), 구급의료(救急醫療), 총검술(銃劍術), 유술(柔術), 격검(擊劍), 전략(戰略)·전술(戰術), 축성학(築城學), 편제학(編制學)
술과 : 각개 교련과 기초 훈련, 야외 연습
체육 : 강행군, 운동, 축구, 목판, 철봉

신흥무관학교에서 가르치던 내무령, 위수복무령, 육군징벌령, 육군형법, 편제학은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군제학에 포함되는 것이며, 신흥무관학교의 총검술, 유술, 격검은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술과에 포함된다. 분류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교육 내용은 비슷하다. 다만 병기학, 병기 용법 연습이 신흥학교에 없는 것은 3.1혁명 전에 무기 구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제 무기를 중점적으로 다룰 수 없었기 때문에 목총의 총검술 훈련을 중심으로 실시했다.

3.1혁명 후에는 '최신식의 군사 기술을 소유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지청천, 김경천이 '최신 병서와 군용 지도'를 가지고 망명하여 신흥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중국 운남무관학교[雲南講武堂]을 졸업한 이범석, 배천택도 신흥학교 교관이 되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중국 무관학교 출신이 교관이 된 후 신흥무관학교는 "최신식의 군사 기술에 의한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당시 교관이던 김승빈은 회고(<중령(중국령)에서 진행된 조선해방운동>)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중심의 교육과정에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성해진 일본 육군의 군사교육 과정과 중국의 군사교육 과정이 추가되어 신흥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더욱 충실할 수 있었다.

3.1혁명 전의 교육 과정은 일제 정보문서나 중국의 공문서, 원병상의 회고 등으로 자세히 전해지지만 3.1혁명 후의 교육 과정 전체를 알려주는 기록은 없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보면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군사교재의 편찬이다. 1920년 6월 일제경찰은 삼원포 소재 최승무(崔承武)의 집을 급습하고 많은 서류와 교재를 탈취했다. 그곳은 신흥무관학교(서로군정서)의 교재, 서류를 인쇄하거나 배포하는 기관으로 판단된다. 일경은, '초급 야외근무부' '척후 보초 근무부' 등의 부대 서류, '신흥학교 경리 수지 원장' '신흥학교 경리 일기장' 등의 신흥무관학교 서류, '임시정부 헌법', '선언서' 등과 함께 다음 같은 군사학 교재를 탈취했다('기밀공제70호').

소부대전술 48본(本), 병학초계 육군대부호(兵學初階 陸軍隊符號), 병학초계 측량학적요(兵學初階 測量學摘要), 병식체조, 지형학.

근무부 등의 서류처럼 군사 교재도 남은 부수가 같지 않은데 이는 교육 현장에 배부하고 남은 여유분이기 때문이다. 또 '초계[초급단계]'라는 이름으로 육군대부호, 측량학 교재가 편찬되었으므로, 위 교재 외에 다른 분야의 교재도 제작되고, 또 교육 대상의 단계에 따라 군사 교재가 편찬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 교재 편찬이 학과와 교육 대상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었다.
  

일제문서 기밀공제70호 일경이 삼원포 최승무 집을 급습해서 압수한 목록의 일부로 소부대전술 48본이 눈에 띈다. ⓒ 국사편찬위원회

 
'소부대전술', '병학초계'라는 이름의 군사학 교재는 대한제국 시기에 사용되지 않았다. 사실 3.1혁명 전에 신흥학교에서는 군사 교재를 편찬하지 않았다. 3.1혁명 전의 중학 과정 본과에서 <유년필독> <대한신지지> 등의 대한제국기 교과서를 사용했는데 신흥무관학교 실정에 맞추어 군사 교재를 편찬·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신흥학우단 회보인 <신흥학우보>도 군사 교재 편찬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 없다. 3.1혁명 후 세 곳에서 교육 과정이 다른 수백 명의 생도를 교육시키는 데 그에 맞춘 교재 편찬은 필수적이었다.

군사학 교재를 편찬·제작해서 사관 교육에 활용하는 것은 중요한 뜻이 있다. 교재는 생도가 집중해서 교육받고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군사지식을 깨우칠 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군사 활동의 통일을 가능케 하는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3.1혁명 후에 사관 양성은 늘 군사 교재 편찬과 함께 언급된다. 교재 편찬은 사관학교 설립의 기본 조건으로 인식되었다. 철혈광복단은 15만 원으로 사관학교 설립을 계획하면서 '사관 책자'(훈련 교재) 출판을 논의했다.(주8) 김경천이 1923년 구로지코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는 데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과서를 번역해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하면서 학과 교재로 <보병조전> 등을 편찬하려 했다. 신흥무관학교 교장이던 윤기섭이 임시정부에 참여해서 편집부위원장을 맡아 교재를 편찬했다. 그 군사 교재를 실제 1923년부터 상해 노병회(勞兵會)에서 교육에 활용했다.
 

일제문서 고경제1878호 1920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병조전 등의 군사 서적이 인쇄된 사실을 일본군이 파악하고 경계하였다. ⓒ 국사편찬위원회

 
둘째, 소부대 전투를 중시하는 실전적 교육이다. 신흥무관학교는 3.1혁명 후 편제되는 독립군 부대의 장교·부사관을 육성했다.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단은 여러 연대·여단을 편제하는 전략을 수립하기도 했지만, 중대·소대를 지휘할 독립군 장교는 전체 전략보다 중대·소대 단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전술이 우선 긴요했다. <소부대전술>은 그를 위한 교육 교재였다. 

실제 경신대참변 후 독립 근거지가 일시 파괴되어 대부대 편제는 어렵게 되었다. 소부대 단위로 국내에 진입해서 왜적에게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항일전쟁의 전술 전환이 있었고, 이 때 소부대전술은 효과를 극대화했다. 독립군의 전술에 당황한 일제 관헌이 훈련받은 독립군 병력이라고 적극 평가할 정도였다.

셋째, 산악 지대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게 하는 행군 훈련이다. 합니하 지교를 졸업한 김산은 산악 훈련을 이렇게 회고(<아리랑>)했다.
 
우리들은 군대 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였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 게릴라 전술. … 우리는 등에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산악 훈련은 '부대 전술' 차원에서 중시되었다. 김산은 '게릴라 전술'이라고 표현했지만 신흥무관학교의 교육 전체가 게릴라전을 목표로 한 것이라기보다 산악 지역을 이용한 국내진공전, 또는 적은 독립군 병력으로 많은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는 전술 훈련의 하나로 보아야 하겠다.

산악 지대에서 빨리 행군할 수 있는 훈련은 3.1혁명 전의 훈련에는 없었다. 원병상의 회고(<신흥무관학교>)는 3.1혁명 전 신흥무관학교의 교육 내용을 상세히 전하고 있는데 '야간 파저강(婆猪江) 70리 강행군'을 언급하고 있지만 체육, 신체단련 연마로 설명하였다. 곧 실전 전술차원의 산악 행군과 차이가 있다.

몸을 무겁게 해서 행군하는 훈련은,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3.1혁명 후 여러 독립군단에서 실행했다. 국민회 부대는 6관(6貫=22.5kg) 정도의 흙을 담은 부대를 등에 지고 산야를 행군하는 훈련을 했다(고경제15246호). 광복군총영은 '모래주머니를 바짓가랑이에 넣고' 산을 타는 훈련을 했다.(주9) 돌, 흙, 모래를 지거나 담고 산악지역을 행군하는 훈련은 3.1혁명 후 독립군 훈련의 기본이었다. 산악 행군 훈련을 기반으로 독립군은 실제 작전에서 산악 지대를 빨리 행군하며 일제 군경을 제압했다.

3000여 명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신흥무관학교는 목총으로만 훈련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총 훈련도 했다. 생도 모두에게 지급할 실총이 없어서 목총으로 총검술 훈련한 것은 사실이다. 서로군정서는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데 많은 재정을 써서 무기 구입 자금이 충분하지 않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1920년 초까지 무기 구입 경로가 구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령에서 1차대전의 패잔병이 버리는 무기를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은 1920년 봄부터였다. 북로군정서 등 북만주 독립군단들은 이 경로를 따라 많은 무기를 구입해서 1920년 7-8월에는 무장을 강화했다. 서로군정서(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가을부터 무기 구입을 위해 교관 김경천을 노령으로, 신팔균을 길림으로 파견했지만, 당시만 해도 길림은 물론이고 노령에서도 무기 구입이 어려웠다.

1920년 1월 일제 관동군은 신흥학교에 노령에서 구입한 소총 300정이 있다는 소문을 추적했는데 실제 구입하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관참첩제24호'). 앞서 노령에 무기 구입을 위해 갔던 사실이 동포사회에는 신흥무관학교에 이미 노령의 무기가 도착해있다는 소문으로 확산된 결과였다.

각개전투나 총검술 같은 집총 훈련은 목총으로도 가능하다. 실제 총기 조작과 사격 훈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수백 명에 이르는 세 곳의 학교 생도 모두가 무장할 수는 없었지만 신흥무관학교에 총기가 있었다. 1919년 10월 현재 삼원포와 대두자에 '독일식 8연발과 중국 총을 합해 약 50정'이 있다는 일제 정보문서('기밀공제14호')가 있다. 삼원포는 신흥학교 합니하 지교, 대두자는 고산자 본교를 뜻한다.

일제 정보문서가 모두 정확하진 않지만 실총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300정의 소총 구입이 사실이 아니라고 일본군에게 밀고한 변절자(독립단 출신)는, 1920년 1월에 '삼원포 학교'에서 소총 3정을 보았고 권총은 비교적 다수였다고 밝혔다('관참첩제24호'). '삼원포 학교'는 쾌대무자나 합니하의 지교이다. 따라서 고등군사반인 고산자 본교에는 실총이 '합니하 학교'보다 많았다. 이를 통해 실총 훈련이 이루어졌다. 실총 조작과 사격 등의 훈련은 중국과 일제 관헌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밤에 비밀리에 했다('기밀공제14호'). 무장이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실총 훈련이 실행되었으므로 목총만으로 훈련했다는 통설은 재고되어야 한다.

생도들은 모두 내무생활을 했으며, 보초 근무, 비상 훈련 등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엄정한 군기를 유지했다. 민간인이 독립군 전사가 되는 첫 과정은 힘이 들었다. 3.1혁명의 단련은 받은 청년들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점차 항일 전사로 성장해갔다. 독립과 자유의 희망을 훈련을 통해 키워갔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주력으로 선봉에 섰다. 우선 졸업생 수에서 연대·여단 편제가 가능하게 되었고, 나아가 이들 장교·부사관을 지휘관으로 하여 그 이상의 대부대 편제를 전망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다. 1920년 초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은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안도산께 드리다>)에서 '새로운 학교(新校)'에서 양성한 사람이 1,200-1,400명이며 새로 모집해서 훈련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고 밝혔다. '새 학교'는 집중된 군사교육을 실시한 3.1혁명 후의 학교를 뜻한다. 신흥무관학교 현황을 정확히 파악했을 서로군정서 독판의 서한이므로 이 숫자는 확실하다. 
 

석주유고 원문 1920년 초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수가 기록되어 있다. ⓒ 고려대학교출판부

 
<독립신문>(1919.11.8)에 따르면 1919년 11월 현재 통북 본교 100명 이상, 유동 신흥학교 신입생 44명, 통동 신흥학교 속성반 50여 명이 수업 중이었다. 세 곳을 합쳐 200명 정도의 생도가 훈련을 받았다. 또 <한족신보>는 2건의 졸업식 기사(<독립신문> 1919.10.25, '공제23호')를 전하는데 1919년 10월 15일 합니하 속성반에서 65명이 졸업했고, 1919년 12월 30일에 지역 미상의 졸업생이 75명이다. 한 곳에 60-70명 정도이니, 입학과 졸업의 시기는 다르지만, 1919년 말에 세 곳에서 동시에 훈련받은 생도가 역시 200명 정도다.

1937년에 작성된 '신흥학교 회고'에 따르면, 3.1혁명 후 1기 6개월로 고산자, 합니하에 각 약 200명, 쾌당무자에 약 100명을 훈련시켰다고 한다.(주10) 시기에 따라 입학생 수에 변동이 있겠지만, 최대 500명 정도가 함께 훈련받았다. 해방 후 원병상(<신흥무관학교>)도 3.1혁명 후 전성기 때 600여 명이 동시에 입학해 훈련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훈련받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당시 기록으로는 200명 정도, 후일 회고로는 500-600명 정도가 함께 훈련받았다. 1200-1400명의 졸업생이 있었던 1920년 초의 상황은 동시에 200명 정도, 또는 500-600명 정도가 6개월, 또는 3개월 과정으로 몇 기(期)가 졸업한 결과였다. 여기에 교성대를 편제해서 안도현으로 이동할 때까지 새로 훈련 받은 생도를 감안하면 2,000명 정도가 3.1혁명 후에 졸업했다 하겠다. 1937년의 기록(<간도 신흥학교 회억(10)>)에 3.1혁명 전까지 1,000명 정도를 훈련시켰다 했으므로, 3.1혁명 전후를 합하면 3,000명 정도가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마쳤다.

이들 졸업생은 우선 서로군정서 부대 편제의 기반이었다. 1919년 말에 졸업생 이병철이 2연대 2대대 4중대 소속이었으므로 2개 연대가 편제되어 있었다. 또 1920년 초에 이상룡이 안창호에게 보낸 서한에 2개 여단의 편제가 확인된다.(주11) 비록 대규모 무장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여단 편제를 실행하려 한 것은 많은 졸업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립군 전사 집단의 핵심적 전투 역량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의 유지를 어렵게 하는 외부 상황이 닥쳤다. 일제는 남만주 독립군단의 강화를 저지하고자 중국 경찰에 압력을 넣어 '합동 수색대'를 편성했다. 1920년 5월부터 남만주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수색대의 공격에 독립단과 한족회 지도부는 운동 역량의 보존을 위해 일시 피신을 결정했다. 신흥무관학교도 졸업생을 교성대로 편제하여 안도현 내두산(奶頭山)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백두산 기슭의 삼림지대로 1919년 가을 이상룡이 강남호를 파견해 새 군영지로 적합한지 확인하도록 했었다.(주12) 길림성과 봉천성의 경계지역으로 중국과 일본의 군경이 관할 구역을 넘지 못하는 특성을 활용하면 적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또 백두산 자락으로 장차 국내 진공에 유리했다.

내두산으로의 이동은 신흥무관학교의 역량을 보존하면서 아울러 적의 공격을 방어하고 장차 국내로 진공하기 위한 근거지를 확보한다는 여러 전술적 뜻이 있었다. 부족한 군사력을 지리 환경을 이용해 보완하여 적에게 대처하는 곳이었다. 실제 신흥무관학교의 이동 이후에 홍범도부대와 북로군정서 등이 안도현으로 이동해서 함께 활동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안도현은 독립군의 군사적 새 근거지로 부각되었다.

1920년 6월에 서로군정서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이동이 결정되자 곧 안도현으로 이전했다. 1919년 9월부터 이미 답사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내두산에서 훈련하던 중 청산리전투를 치른 홍범도부대가 계획대로 안도현으로 이동해서 교성대와 합대하여 대한의용군을 편제했다.

이로써 신흥무관학교의 이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특히 교성대는 서로군정서뿐 아니라 각 독립군단에 배속할 계획으로 사관을 훈련시켰으므로, 이 때의 통합은 사관 훈련 시대가 끝나고 실제 독립군 전사가 되어 활동하는 시대로 전환됨을 뜻했다. 이후 대한의용군은 노령 국경지대로 향해 북정(北征)하며 다른 독립군과 통합하여 계속 무장대오를 확대해갔다.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독립군 전사를 양성하고 이름을 내렸지만, 그 뜻은 남북만주와 노령 곳곳에서 독립군의 항일전투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대개 독립군, 곧 독립전쟁의 전사가 되었다. 3.1혁명 전에는 백서농장 외에 신흥 출신이 활동할 수 있는 부대가 없었으므로 많은 졸업생이 동포사회의 민족학교 교사로 학생들에게 기초 군사훈련과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3.1혁명 후에는 서로군정서 의용대가 편제되어, 많은 졸업생이 '일선 독립군에 참여하는 원칙'(원병상, <신흥무관학교>)에 따라 서로군정서 군인이 되었다.

아울러 남북만주 각지에서 편제되던 여러 독립군부대에도 신흥 졸업생이 지휘관으로 참가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서로군정서뿐 아니라 전체 만주 지역의 독립군 편제를 전망하며 항일전쟁의 군인을 양성했다. 대한독립단과 대한청년단연합회 등 다른 독립군단에서 망명 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로 보내 훈련받게 했다. 졸업 후 자대로 귀환하여 지휘관이 되게 할 목적이었다. 신흥 출신 조경호는 군비단 장교로 복무하였다.

임시정부에서 초급 장교를 양성할 목적으로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는데 새로 설립하지 않고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을 그대로 인정하여 지원하려 한 것도(주13) 신흥무관학교가 서로군정서 군인만 아니라 독립군단의 통합을 전제로 각 지역 독립군의 장교로 활동할 군사 인재를 양성했기 때문이다. 실제 합니하 신흥학교의 교육생에 대하여 장차 '홍범대 유격대'와 호응하여 국내로 진입할 계획이라는 일제 정보문서('관참모제5673호 보통보제2호')는, 신흥 졸업생이 다른 독립군의 지휘관으로 활동한다는 독립진영의 계획과 연관된다. 특히 교성대를 편제해 안도현으로 이동한 뒤에는 졸업생을 '독립군 사관으로 각 방면에 배속'시킬 계획이었다('기밀제283호'). 신흥 출신은 남북만주와 노령 곳곳에서 이후 여러 독립군의 소부대 지휘관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많이 희생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은 다른 독립군단의 사관 양성을 지원한 것이다. 북만주에는 1920년 초까지 무관학교가 없었다. 빨리 군대를 편제하여 독립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북만주에서 군인을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북로군정서는 무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신흥학교에 교관 파견을 요청했다. 서로군정서 지도부와 군사령부,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교관을 선발하여 북로군정서로 보냈다. 이장녕을 비롯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졸업생이 북로군정서로 가서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의 교육을 기본으로 3.1혁명 후 새 군사지식이 보강된 신흥무관학교의 집중 속성훈련이 사관연성소에서도 실시되었다.

생도였던 강근은 훈련 내용을 이렇게 회고(<나의 회상기 일편>)했다.
 
그 때에 과목은 20여 가지 군사학과 전술과 전략에 대한 실지 훈련으로 체조와 운동, 사격술, 승마 등 기타 여러 가지 훈련이었는데, 오전에는 강당에서 군사학을 수업하고 오후에는 서대포촌(西大浦村) 전야에 가서 실지 연습을 하였다. 그래서 1920년 3월부터 시작하여 8월에 6개월간 속성과로 졸업하였다.
 
  
일제 정보문서에 따르면 사관연성소의 훈련은 '구한국군식 방법에 의거'했다.(주14) 사관연성소가 독군부에 <보병조전> <야외요무령(野外要務令)> 등 대한제국 시기의 군사교본을 주기도 했다. 그 외에 이우석이 운반해 간 최신 병서도 사관연성소 군사 교재로 활용되었다. 3.1혁명 이후 교육받은 김훈 등의 교관을 통해 최신 훈련 내용이 적용되었다.

사관연성소의 졸업생은 약 300명이었다. 그 가운데 150명이 연성대로 편제되어 북로군정서 본대와 함께 근거지를 이동하던 중 청산리에서 일본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신흥무관학교는 항일전쟁의 전사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였으며 남북만주, 노령 곳곳의 항일전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졸업생들은 온몸을 바쳐 분투하였고 많이 희생되었다. 그들은 망국 이후 독립 근거지에서 탄생한 첫 전사였다. 3.1혁명의 세례를 받아 나라를 독립하고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는 핵심적 전투 역량이었다. 경신참변 후 외형적 학교는 사라졌지만 훈련과 정신은 몸에 각인되고 가슴 속에 살아남아 고난에 찬 기나긴 독립전쟁의 기반이 되었다.


1)이정규, <우당 이회영 약전>, <<우당 이회영 약전>>, 을유문화사, 1987, 49쪽.
2)김경하,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108-109쪽.
3)김승빈, <중령(중국령)에서 진행된 조선해방운동>.
4)당시 중국 당국이 조사한 것이다.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1, 120쪽.
5)차문섭,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아세아문화 제50호>>, 1973, 193-199쪽.
6)원병상, <신흥무관학교>, <<독립운동사자료집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23-24쪽.
7)최계립, <간도 십오만원 사건에 대한 사십주년을 맞으면서>, <<독립군의 수기󰡕, 국가보훈처, 1995, 300쪽.
8)한철수, <<나의 길>>, 송산출판사, 1984, 26쪽.
9)<간도 신흥학교 회억(10)>, <<앞길>> 제13호, 1937년 5월 24일.
10)이상룡, <안도산께 드리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석주유고 상>>, 경인문화사, 2008, 419쪽.
11)서중석, 위의 책, 200쪽.
12)<군무부 제57호 공함>,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42>>, 국사편찬위원회, 2006, 559쪽.
13)<<현대사자료 27>>, 349쪽; 신용하, <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의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9, 222쪽에서 재인용.
14)이정, <사령부일지>, 장지연 외, 김영호 옮김, <<항일운동가의 일기>>, 서문당, 1986, 347쪽. <야외요무령>은 1899년 육군무관학교에서 간행한 교본이다.
덧붙이는 글 '새로 쓰는 독립군사'는 주중에 연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참의부 독립군 이일권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입니다.
#신흥무관학교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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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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