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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간을 저질렀습니다" 보통 남자의 고백이 중요한 이유

[책줍일기] 신간 '강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

등록 2020.08.03 08:30수정 2020.12.0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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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강간 생존자('우리가 입을 여는 순간 더이상 피해자가 아니다'라는 소하일라의 견해에 따라, 이 글에서는 '피해자'를 '생존자'로 표기함을 밝힙니다. - 기자말)가 오랜 기간 자신이 트라우마에 시달렸다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낸다면, 가해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동안 우리가 흔히 봐왔던 가해자의 모습으로 짐작해본다면, 세 가지다. 회피하거나, 부정하거나, 위협하거나. 하지만 토르디스 엘바와 톰 스트레인저의 사례는 조금 달랐다.

토르디스는 열여섯 살 때 자신이 사는 아이슬란드에 교환학생으로 온 톰 스트레인저와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곧 파국을 맞는다. 토르디스가 정신을 잃은 사이, 톰이 데이트 강간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토르디스는 강간 피해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9년 만에 톰에게 메일을 보낸다. '가해자'인 톰은, 예상과 달리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도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왔다며 답장을 보냈다.


그들이 각각 상처를 치유하고, 피해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 택한 방법은 '말하기'였다. 토르디스와 톰은 본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고, 테드 강연장에 섰다. 둘은 자신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용서'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피해자에게 향하는 시선을 가해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행보는 논쟁을 불러왔다. 메시지를 떠나, '강간범을 인간 대접하고 심지어 마이크를 쥐어주는 것이 옳으냐'는 비판이었다. 실제 강연이 열리는 곳 밖에서는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둘의 활동이 "성폭력 생존자를 모욕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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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강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 ⓒ 샘앤파커스

 
<강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의 저자인 소하일라 압둘알리는 위 책에서 이 사례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톰에게 '조금의 연민'도 느끼지 않고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는 것도 공감하지만, 항의시위는 적절치 않다고. "강간범들이 자신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이 끔찍한 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평범한 남자가 '나는 강간을 저질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을 보니 두렵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합니다. 두려운 이유는 가해자를 '별개의' 존재로 간주하는 강간의 '괴물' 이론이 뿌리째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중략) 난폭한 괴물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보통 소년들이었습니다. 보통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겁이 납니다. 한편으로 흥분되기도 하는 것은, 그 괴물이 평범한 인간이라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240쪽)

소하일라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되돌아보고 인정하는 톰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물론, 톰과 토르디스의 행보를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다. 성폭력 가해자의 인정과 사과가 곧 피해의 회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니까.

토르디스는 '원인 제공자'와 대면하고 그와 함께 말하는 것을 택했지만, 성폭력 생존자마다 상처의 폭도 치유의 방법도 다르다. 다만, 둘의 사례는 성폭력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직면했을 때, 도망치거나 부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강간 생존자가 30년 전 일에 대해 말한 이유
 

저자는 말한다. "강간범들이 자신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이 끔찍한 범죄를 막을 수 있다고. ⓒ Pixabay

 
책 <강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그 제목에서 말하듯, '우리가 강간에 대해 논할 때 상상해보지 못한' 여러 논점을 던진다. 가해자의 책임과 생존자를 가두는 통념에 대해, 동의와 합의의 문제에 대해, 강간과 섹스의 관계에 대해 폭넓은 이야기를 풀어낸다.

책을 쓴 저자인 소하일라 압둘알리는 집단 강간의 생존자이자, 활동가이기도 하다. 1980년, 미국에 살던 열일곱 소하일라는 휴가 차 방문한 인도 뭄바이에서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던 중 한 남성 무리와 마주친다. 이 네 명의 남자들은 저자와 남자친구를 흉기로 위협해 산으로 유인한 후, 구타를 한다. 심지어는 저자의 남자친구를 거세하겠다고 협박하다가 그녀를 강간한다. 


소하일라에 따르면, 사건이 벌어진 인도는 "강단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믿음이 깊게 깔린 나라"다. 심지어 강간 당한 여자를 일컫는 말은 '진다 라시', 살아있는 시체다. 실제 그녀가 사건 이후 경찰서에 찾아갔을 때, 경찰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진술서엔 '그날 밤 아무일도 없었다'고 기록됐다. 그나마 남성 목격자인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녀에게 벌어진 일이 '망상'이 아니라는 걸 입증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저자는 죄책감과 공포, 트라우마에 시달릴지언정 수치심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는 피해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지지하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강간 생존자인 딸을 집안의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또, 강간에 대해 논하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았다. 소하일라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대학 졸업 논문 주제로 인도의 강간을 다루고, 첫 직장으로 보스턴강간피해자센터를 택한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후 강간 생존자이자 소설가, 그리고 아내와 엄마로 살아가던 그녀가 뜻하지 않게 자신의 사건을 다시 마주하게 된 건 약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였다. 소하일라는 강간을 당한 이후 인도의 유일한 잡지인 <마누시>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담은 기고문을 보낸 바 있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데 그쳤던 그 글은, 2016년 상상도 못할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해 12월 16일, 인도 뉴델리에서 조티 싱이라는 대학생이 남자친구와 저녁을 먹기 위해 외출했다가 한 남성 무리에게 구타와 윤간을 당한 후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30년 전 그녀가 <마누시>에 기고한 글은 '인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간 피해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시 회자되기 시작한다.

소셜미디어에서 그녀의 글이 공유됐고, 온갖 언론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혼란을 겪던 소하일라는 결국 다시 '강간 생존자'의 위치에서 <뉴욕타임즈>의 웹채널 인터뷰에 응한다. 30년 전 강간은 분명 일어났고 그 사실을 지울 순 없지만, 그건 "나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로 만든 사건들 중 하나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고 "산속에서 나를 강간한 남자들에게 결코 나 자신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그녀에게 수많은 메일, 연락이 쏟아진다. 비슷한 경험을 품고 있는 여성들의 증언이 터져나온 것이다. 소하일라는 자신, 그리고 자신과 닮은 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써냈다. 그녀는 강조한다. "내가 정신을 잃지 않았던 것은 계속 말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나는 지금도 말을 하고 있"다고.
 
"당신이 폭로하는 순간,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순간, 당신이 입을 여는 그 순간, 당신은 더 이상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통제력을 되찾습니다. 그것은 피해자다움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이에요." (44쪽)

폐허 속에 머물 것인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인가

'말하는 생존자'의 위치에 선 소하일라는 강간에 대한 통념을 거부한다. "강간은 언제나 재앙"이지만, 동시에 "강간이 언제나 재앙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강간은 다른 범죄와 비슷"하지만, "강간은 다른 어떤 범죄와도 비슷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강간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범죄라는 기본적 진실 외에는 어느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과정을 통해, 강간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그래서 소하일라는 강조한다. "여성들이 두려움에 떨기보다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면 사회는 더욱 생산적이고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사회가 피해자에게 따지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의 '선택'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우리는 피해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동의한 방식, 그로 인해 취한 이익, 수상쩍은 침묵, 강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벌떡 일어나 남자를 밀치고, 드러난 가슴을 가리기 위해 옷을 여미고 도망치지 않았으니 그들이 동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중략) 우리는 여성 혐오를 벗어나기 위해 아니면 단순히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서로 비난하는 동안 다른 한 사람,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맙니다. 그 남자가 먼저 인간적인 예의와 동물적 본능 사이에서 제대로 된 선택을 했어야 했다는 사실 말이죠." (79쪽)

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초의 3선 서울시장이자 인권변호사였던 그는 여성 비서를 성추행한 혐의로 고소당한 상태였다. 망자가 죽음을 결심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의 사망 이후 소위 말하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집중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또한 생존자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느끼며 자신의 이야기를 온전히 전달하기가 힘들어졌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마지막이 여러 측면에서 참담함을 남긴 이유다.

만약, 그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여성들의 친구'였다던 그가, 자신을 향해 제기된 의혹을 죽음이 아닌 방식으로 풀어갔다면 어땠을까. 모든 논의장을 폐허로 만든 지금보다는 나았으리라 생각한다. 적어도 생존자에게 모든 질문과 의심과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또다른 방법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그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선택은 다시 우리 몫으로 돌아왔다. 생존자의 말이 남았고, 한국 사회는 응답해야 한다. 이 폐허 속에 머물 것인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인가. 소하일라의 말을 곱씹는다. 
 
"... 강간은 선택입니다. 강간범들은 강간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어떻게 행동할지 선택하면 됩니다. 내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처럼 보인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강간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288쪽)

"... 그럼에도 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다정함, 관대함, 동정심, 존경심이 있습니다. 물론 비열함, 잔인함, 이기심, 형편없는 나약함도 존재합니다. 나는 인간의 모든 면을 낱낱이 들여다보았기에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는 서로 어떻게 대할지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선택이 너무나 자주 타인을 침해하고 파괴해서 일어서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강간은 본능적인 것일까요? 사회화 과정에서 싹트는 필수 불가결한 부산물일까요? 우리는 함께 그 답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서로 대화하지 않으면 그 답을 영원히 찾지 못할 것입니다."  (291쪽)

강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

소하일라 압둘알리 (지은이), 김성순 (옮긴이),
쌤앤파커스, 2020


#성폭력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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