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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자로 6년... "우리에게 오해만 생기더라"

[세월호 6년, 생존자 인터뷰 ⑧] 일반인 생존자 강○○씨

등록 2020.08.15 17:34수정 2020.08.15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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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세월호 생존자 24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월호의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고 매일같이 안정제와 수면제로 잠을 청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배를 타고, 화물차를 끌며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이들은 오늘도 세월호의 악몽을 꾸며 살아갑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6년, 아직도 그날의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제주 시내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강○○씨. 인터뷰 자체가 고통스런 기억을 꺼낸 것이라며 인터뷰 내내 힘들어 했다. ⓒ 변상철


강○○씨는 85년생으로 매우 젊은 화물 기사였다. 제주시에 사는 그는, 사고 이후로 화물 운전을 하지 않고 가족과 떨어져 홀로 거주지 근처에서 쑥 농사를 짓고 있다. 인터뷰는 제주 시내 카페에서 했다.

- 약은 여전히 드시고 계세요?
"약은 먹고 있어요. 오래 먹었으니 이 정도 되면 중독이죠."

- 같은 약을 계속 드시나요?
"아뇨. 면역력이 생겨서 계속 바꿔요. 그렇게 계속 바꾸니 점점 약이 세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은 일부러 바꾸지 않고 같은 약을 먹고 있어요. 근본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을 끊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네요."

- 약을 드시지 않을 때는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크겠어요.
"약을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가 확실히 차이가 나요. 안 먹을 때는 진짜 잠에서 쉽게 깨요. 조금만 소리가 들려도 깨요. 얕은 잠이라고 하죠. 그런 잠은 안 자는 것만도 못해요. 그렇게 자면 다음날 생활이 너무 힘드니까 약에 의존하게 돼요. 그렇게 습관이 된 거죠. 심리적일 수도 있고요. 약이 가끔 떨어져서 못 먹을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병원에 가서는 이야기를 못 해요. 더 강한 약을 줄까봐."(웃음)

- 제주에서 화물 기사로 생활한 지 얼마나 되셨어요?
"군대에 다녀온 기간 빼고는 20살 때부터 세월호 사고 날 때까지 트럭 운전을 했어요. 세월호 사고 날 때 제 나이가 30살이었어요. 제가 싣고 다녔던 화물은 주로 농산물이었어요."

"야, 큰일 났다, 짐 다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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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가 입수한 세월호 적재 차량 블랙박스 영상. ⓒ 뉴스타파

 
- 세월호에 탔던 다른 화물 기사 분들과 전부터 알고 계셨겠네요?
"배를 자주 타면서 얼굴만 알았던 분도 있고, 알고 지냈던 분도 있고, 사고 나면서 알게 된 분도 있어요."

- 평소 인천에서 배를 이용하셨어요?
"원래 제가 주로 이용하는 배는 목포 배였어요. 인천 배를 예약하는 것 자체가 치열하기도 하지만, 사무실에서 인천 배는 나이 드신 분들 위주로 배정하고, 저처럼 젊은 사람은 목포로 배정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날따라 사무실에서 인천 배를 타라는 거예요. 얼마나 신나던지 '아, 인천 배 타라고요? 알겠습니다' 하면서 기분 좋게 타러 갔어요. 마침 물건도 인천 근처에서 싣기도 했었거든요. 그날따라 희한하게 타게 된 거죠. 원래 타지 않던 배였는데.


다른 기사들도 이야기 했지만 세월호 출항 당일 안개가 심해서 출항을 못할 줄 알고 차를 빼려고 했어요. 그런데 다시 출항한다기에 그냥 배를 타게 된 거죠. 출항할 때 아, 출항하는구나 생각했지 사고 날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

- 출항 뒤에 상황을 이야기 해주세요.
"출항 뒤에 배에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장기자랑을 했던 기억이 나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걸 구경하다 기사 방에 들어가서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다가 잠들었어요. 2층 침대의 1층에서 자고 있었는데 배가 기울고 몸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쿵 소리에 깼어요. 사고 직후에 전날 영화를 보느라 핸드폰이 꺼져서 전화를 할 수 없었어요. 나중에 부모님, 주변 사람들이 전화가 안 돼서 많이 걱정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사고 나고 나서 웅성대는 소리에 밖으로 나가 봤어요. 구명조끼 입고 대기하라는 방송이 들려서 같은 방에 있던 아주머니한테 구명조끼 드리고 나 하나 챙겨서 방안에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아주머니께 '저는 일단 밖에 나가 볼게요' 하고 나왔어요. 밖으로 나가보니 난리가 난 거예요. 다른 기사 분들도 나와 있고 컨테이너는 둥둥 떠다니고 있고 난리가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그때까지 배가 뒤집힐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짐 걱정부터 했죠. 다른 기사들하고 배에서 무조건 배상해줘야 할 텐데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 한동안은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였나 봐요.
" 예, 한동안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배가 기울었어요. 그러다 누군가 '야 이거 점점 더 기우는 것 같다' 하는 거예요. 화장실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진다고, 더 기울고 있다고. 그래서 내려가 볼까 하고도 생각했었어요. 차 세워둔 곳에. 그때 전날 차에서 잤던 사람이 올라와서는 '야, 큰일 났다. 짐 다 넘어가고 차들끼리 부딪치고 난리가 났다'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트럭 밑으로 기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아차 싶을 정도까지 넘어갔어요.

그렇게 기사들이랑 얘기하다가 배가 더 이상 안 되겠다 할 정도까지 기우니까, 진짜 큰일났다 했어요. 그래서 방에 있던 아주머니를 데리러 가려는데 문을 열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때 마침 구조대원이 들어왔길래 아주머니 한 분이 이 방에 있다고 말했죠. 나중에 구조대원에게 확인하니까 방에 아주머니는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주머니도 나왔구나 생각했죠. 그 후로도 그 분이 살아 나오셨나 궁금해서 제가 몇 번이나 구조대 쪽으로 전화해서 확인해봤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아주머니가 나오지 못하시고 그 방 안에서 발견됐다고 하더라고요. 제일 늦게 발견됐다고 해요. 그때를 많이 후회해요. 같이 나올 걸, 조금 더 기울었을 때 다시 방에 가볼 걸. 너무 늦었었던 거죠."

- 그때 당시에 학생들은 보셨어요?
"난간에 몇몇 학생들이 있더라고요. 이 정도 기울었으면 상식적으로 안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학생들은 선생님과 다 대피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배에서 나와 항구에 갔을 때 사람들이 전원 구출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거의 마지막에 구조대원들과 헬기 타고 나왔는데 그때 배를 보니 배가 완전히 뒤집혀 프로펠러가 보이더라고요. 전원 구출되었다고 하니까 다들 그렇게 구출된 줄 알았죠."

"전원 구출된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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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타는 실종자 가족 '기다림 밖에는...' 16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 가족들이 여객선 침몰지 방향을 바라보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 이희훈


 - 팽목항에 도착하셔서 어디로 가셨어요?
"핸드폰 충전하러 갔어요. 충전해서 켜니까 부재중 전화가 많이 와 있더라고요.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니까 팽목항으로 오신다고 하기에 오시지 말라고 하고는 사고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뉴스에 나오고 난리 났다고. 그때 아, 뉴스가 나왔구나 하고 알았던 거죠."

- 많은 학생들이 나오지 못했다는 것은 언제 아셨어요?
"핸드폰 충전하고 나와서 다른 화물 기사 분들과 어디로 갈지 이야기 하다가 진도체육관으로 가자 해서 그곳으로 갔더니 부모님들이 울면서 초상집 분위기더라고요.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거죠.

체육관에 있는데 관계자 누구도 화물 기사들 어떻게 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는 동안 부모님들은 아이들 소식에 여기저기서 우시는데 사람이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저희같이 살아나온 사람은 갑자기 죄인인 것 같고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요. 그곳 관계자들에게 우리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보니 그제야 가셔도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화물 기사 다 같이 체육관을 나왔죠."

- 세월호 사고 이후 운전을 계속하셨나요?
"몇 번 운전을 시도해 봤는데 포기했어요. 일단 기사들은 배에서 잠을 자야 고속도로 운전할 때 졸지 않는데 배에서 아예 잠을 못 자요. 어머님도 많이 불안해 하시고,"

- 배·보상은 어떻게 되셨나요?
"사고 이후에 아무 일도 못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도청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어느 부서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합의금 나왔다며 종이를 내밀었어요. 그 합의금 수준이 중고 시세에도 못 미치는 차량 보상가격이라고 했더니 그 사람들은 증빙자료를 제출하래요. 그런데 증빙자료가 어디 있어요. 하루 일당에 관한 증빙자료는 또 어떻게 준비해요. 이 합의금이 맞지 않다 생각하면 나라를 상대로 항소를 하라는 거예요.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변호사를 본인이 직접 불러서 개인으로 나라를 상대로 항소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데 합의를 어떻게 안  해요. 제가 당장 죽어나갈 판인데... 그런데 그 계약서 중에 이 보상 받고 다시는 보상에 관하여 문제를 제기 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었어요. 그걸 사인하라고 하는 거예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기억이 강하게 남아요."

- 그런 답답한 상황을 다른 생존자들과 이야기해 보신 적 없으세요?
"솔직히 우리가 소리를 크게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살아서 나온 생존자잖아요. 우리보다 더 마음고생 하신 분들이 있는데 우리도 피해자라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면서 기다려온 건데... 그래도 오히려 우리에게 오해만 생기더라고요. 인터넷에 세월호 탄 사람들 로또 맞았다 뭐 이런 소리를 하니 화가 나는 거죠. 스트레스였어요. 생존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주변에서도 너무 많이 들으니까 돌아버리는 거죠. 그래서 시간이 지나서는 세월호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세월호에 탔다는 말도 안 하게 됐어요. 그래서 세월호 관련된 이야기는 앞으로 얘기하지 말아야지 다짐도 했지요.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 거잖아요. 불편하거든요. 자꾸 생각나고. 기분이 좋지 않아요. 우울하죠."

-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제주세월호생존자와그들을지지하는 모임'(제생지)이나 시민들, 언론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기사에 댓글 달린 거 보고 너무 보기 싫어서 이후로 기사는 잘 보지 않아요. 우리 생존자를 너무 안 좋게 볼 게 뻔 하니까요. 제발 우리를 오해하지 말고 진실하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제주세월호생존자와그들을지지하는모임의 회원이 되어주세요.
https://bit.ly/3fGn17o
#제생지 #수상한집 #세월호 #기억공간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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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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