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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계란처럼 깨져" 외국인도 놀란 이승만 학살 현장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공주형무소 재소자 학살사건

등록 2020.08.23 20:22수정 2020.08.2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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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에 학살지로 연행되어가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 ⓒ 진실위 자료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충청남도 공주시 교동에 위치한 공주형무소에는 재소자 1000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형무소 수용인원은 1948년 여순사건 이후 급증했다. 보도연맹원과 여순사건 관련자들 수백여 명이 수감되어 포화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형무소는 재소자를 다 감방에 수용할 수 없어서 공장들을 감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재소자들은 이불이 없어서 가마니를 깔고 덮으며 생활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용되었다. 또 재소자들은 열악한 수용시설과 식량 및 의약품의 심각한 부족으로 아사나 병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재소자들은 형무소에 수감되기 전 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건강이 악화되었다. 열악한 형무소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또한 위생상태가 엉망인 형무소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재소자가 사망했고, 형무관조차 전염병으로 고생했다.

관제기관인 보도연맹원 모집은 원래는 주로 좌익경험이 있는 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승만 정권의 할당제가 있어서 면장이나 통장들이 농민들에게 쌀이나 비료를 주면서 가입을 유도했다. 그래서 순전히 식량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농민들도 많았다. 또한 면장 등에게 다른 일로 도장을 빌려줬다가 자기도 모르게 가입된 이들도 있었다.

한편 한국전쟁 발발 후 공주CIC(방첩대)는 공주형무소에 상주하면서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했다. 당시 공주형무소 형무관 김아무개는 "CIC는 군복을 입었는데 계급도 없었다. 이들이 날 뛰는데, 형무소 소장도 꼼짝 못했다"라며 지난 2009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은 군경에게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학살명령을 내렸다.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 신아무개는 "좌익과 보도연맹의 처리는 위에서 내려왔다. 명령이 내려오지 않으면 못한다"라고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학살지로 연행되어 가는 재소자들 ⓒ 진실위 자료

 
그래서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 새벽 사이 형무소 재소자들은 50여 명씩 2~3대의 트럭에 실렸다. 이들은 트럭에 실리자마자 학살 현장으로 가는 동안 머리를 숙여 양 무릎 사이에 넣은 상태로 앉아 있어야 했다. 머리를 들면 트럭 네 귀퉁이에 지키고 서 있는 이송 담당자들에게 총 개머리판으로 맞아 머리가 깨져서 큰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즉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머리판에 맞아 머리가 계란처럼 으깨졌다

당시 유엔한국위원단의 일원으로 유엔과 한국군의 연락장교로 복무하던 2명의 호주군 장교 피치 소령과 랜킨 중령은 이송 중 학살을 목격했다. 진실위는 조사결과 피치 소령이 당시를 이렇게 증언한 기록을 발견했다.
 
"바로 내 눈 앞에서 2~3명이 즉사하는 것을 봤다. 그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머리가 계란처럼 으깨졌다."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은 학살지인 왕촌 살구쟁이까지 이송되었다. 그리고 공주형무소 재소자들은 미리 구덩이가 파진 학살 장소에서 오전 10시경부터 해질녘까지 공주CIC의 지휘 하에 공주파견헌병대, 공주경찰서에 의해 총살되었다.


당시 마을주민 이아무개는 "오전 10시경 따발총 소리를 시작으로, 1시간 간격으로 트럭 소리와 총소리가 해질녘까지 들렸다"고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회상했다. 또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 한아무개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을 앉혀놓고 뒤에서 총을 쏴서 죽였다. 특히, 왕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공주CIC분견대와 공주파견헌병대에 의해 동원된 청년방위대는 구덩이들을 미리 파놓았다가 이후 시신들을 매장했다. 그러나 수많은 시신으로 미리 파놓은 구덩이가 모자랐다. 그러자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에게 스스로 자기가 죽을 자리인 구덩이를 파게하고 그들이 파놓은 구덩이 앞에서 학살했다.

그럼 그날 그렇게 스스로 무덤을 파고 학살당한 400여 명의 희생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그들은 어떻게 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어야 할" 자국의 군경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날 이승만 정권에게 학살당한 대한민국 국민인 희생자들의 일부 면모를 살펴보자.
  

진실위가 발굴한 유골 ⓒ 진실위 자료

 
언쟁했던 경찰이 좌익집안이라고 모함

김주현은 해방 후 군 복무 중 신원조회에 걸려 체포되었다. 그는 군복무 중 고향 안동에 휴가 나왔다가, 안동경찰서 경찰과 언쟁이 있었다. 그 후 군에서 신원조회를 할 때, 김주현과 언쟁을 했던 경찰이 김주현의 집안을 좌익집안이라고 모함했고 이로 인해 김주현은 체포되었다. 김주현은 1949년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집에 편지를 보냈고, 그의 모친이 면회를 다녀왔다. 그 후 김주현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주 왕촌에서 학살됐다.

윤상순은 1949년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집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공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윤상순은 당시 정산국민학교 교원으로 좌익인사에게 학교에서 사용하던 등사기를 빌려주었는데, 이 등사기가 삐라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 후 윤상순은 1949년 3월 4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에서 포고령 제2호 등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받고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그는 위 학살지에서 총살되었다.

정두환은 1948년 5월 21일 포고령 제2호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복역한 후 출소한 후 정부권고로 보도연맹원에 가입했다. 정두환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주시 유구면 집에서 연행되어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공주시내에 살던 정두환의 사촌이 1950년 7월 5일 그를 면회했다. 그리고 그는 곧 공주 왕촌에서 학살되었다.

김윤선은 여순사건 후 여수종산국민학교에서 경찰에 연행되었다. 당시 김윤선의 식구들은 여순시내의 화재로 인해 종산국민학교에 피신 중이었다. 김윤선은 누군가에 지목되어 연행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 후 김윤선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김윤선의 처는 그를 면회했다. 하지만 김윤선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 위의 장소에서 학살당했다.
  

부식된 유골 ⓒ 진실위 자료

 
최정태는 여순사건 당시인 1948년 11월 진압군에 의해 마을회관에 소집되었다가 마을청년들과 함께 연행되어, 여수 중앙국민학교에 구금되었다. 최정태의 동생은 당시 14연대 군인으로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겁이 나 고향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최정태와 그의 부친이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 마을 구장의 집 방화사건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최정태는 여수중앙국민학교에서 조사를 받고 형을 선고받았다. 최정태는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부친이 자주 면회를 다녔다. 최정태의 부친은 마을주민의 서명을 받은 탄원서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최정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손용암은 여순사건 진압과정에서 마을사람들과 같이 체포되어 여수종산국민학교에 구금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손용암의 먼 친척이 좌익 활동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손용암의 이름을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손용암은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손용암의 모친이 면회를 갔었다. 손용암은 한국전쟁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그의 모친은 손용암의 머리카락과 부러진 이를 나중에 유물로 받았다고 한다.

정선영은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도망 다니다가 경찰서에 자수했다. 그 후 정선영은 대전형무소를 거쳐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정선영의 처 등 가족들이 면회를 왔다. 그리고 정선영은 한국전쟁 발발한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당시 가족들은 정선영이 곧 출소할 때가 다 되었다며 새옷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인원은 여순사건 후 거주지인 여천군 삼산면에서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박인원은 여순사건 당시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에게 배를 빌려줘서 연행되었다. 연행 당시 박인원은 집에 숨어 있다가 자수하면 용서해준다고 해서 자수했던 것이다. 박인원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그의 모친이 면회를 갔었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마을의 중학생들은 다 연행
 

김태근은 여순사건 이후 고흥군 두원면 집에서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김태근은 당시 고흥읍의 명륜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마을의 중학생들은 다 연행되었다. 김태근은 경찰서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고 공산주의자들을 도와줬다는 허위진술을 했다. 그 후 그는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김태근은 공주형무소에서 엽서를 보냈고 이에 그의 부친이 면회를 다녀왔다. 그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위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김귀삼은 여순사건 이후 경찰이 반란군 동조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경찰서에 죄가 없다면서 자수했다. 그 후 김귀삼은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의 처가 딸을 데리고 면회를 갔었다. 김귀삼은 한국전쟁 발발 후 위의 장소에서 총살당했다.

이렇게 학살된 공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의 일부 유족들은 학살 후 시신이나마 수습하기 위해 학살지인 왕촌 살구쟁이에 왔었다. 그러나 유족들은 학살현장의 시신들이 줄줄이 묶인 채 너무 많이 부패되어 있어서 결국은 시신수습을 할 수 없었다.

진실위는 지난 2009년 6월 12일부터 7월 20일까지 충남 공주시 상왕동 29-19번지 (왕촌 살구쟁이)에서 유해발굴을 실시한 결과, 모두 3개의 구덩이에서 약 31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 발굴에서는 민간인을 사살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M1 탄피 527개와 카빈 탄피 107개, M1 탄두 82개, 카빈 탄두 4개 등을 발굴했다. 하지만 진실위는 시간 및 예산상의 이유로 나머지 3개의 구덩이는 발굴하지 못 했다. 따라서 발굴하지 못한 나머지 구덩이 3개까지 고려하면 700여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진실위는 추정했다.

한편 발굴 당시 유해 대부분은 구덩이 양쪽 벽을 향해 두 줄로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손이 뒤로 묶여 있거나 일부는 목뒤로 깍지를 낀 자세로 발굴되었다. 이는 희생자들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사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진실위는 유골의 감식결과 학살 희생자는 모두 남성이었으며 나이는 대부분 20대 이상으로 판단했다.
  

진실위가 세운 학살지 안내판 ⓒ 진실위 자료

 
오전 10시부터 해질녘까지 1시간 간격 총살 집행

왕촌 살구쟁이 너머의 중동골 주민 이아무개는 당시 "오전 10시부터 해질녘까지 1시간 간격으로 총살이 집행되었고, 700명이 희생되었다는 말이 돌았다"고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1950년 7월 외신에는 공주형무소 재소자들이 2대에 트럭에 실려 왕촌 살구쟁이로 이송되는 사진이 실렸다. 이 사진에서 재소자들은 한 트럭에 50여 명씩 실려 있었다. 그러므로 진실위는 한 번에 100여 명의 재소자가 이송되었다고 추정했다. 당시 중동골 주민 이아무개의 증언대로 오전 10시부터 해질녘인 오후 7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총살이 진행되었다면, 학살 희생자 규모는 700명 이상도 가능 하다고 진실위는 판단했다.

당시 공주경찰서 경찰들은 헌병대와 함께 왕촌에서 공주형무소 재소자를 총살하는 데 동원되었다. 공주형무소 형무관 김아무개도 "특별경비대는 이송만 했지, 총살은 CIC가 했다"라며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위와 같은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2010년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결정을 내렸다.
 
"공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9일경 최소 400명 이상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공주CIC분견대, 공주파견헌병대, 공주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공주 왕촌 살구쟁이에서 집단살해되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살해한 것으로서 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국가가 좌익사범이라는 이유로 수감된 재소자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처형한 행위는 정치적 살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참고로 당시 공주형무소 형무관들은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한국전쟁 발발 당시 공주형무소에는 사형수가 한 명도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아, 국가란 무엇인가!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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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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