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군산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군산에서 50년 넘게 살고 있는 주민이 본 배지영 작가의 '군산'

등록 2020.08.05 10:34수정 2020.08.05 11:30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장항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군산으로 이사 온 나는 탄생지의 여섯 해보다 몇 곱절 많은 세월을 군산에서 살고 있다. 옥구군 옥산면 생가에서 군산을 지키고 계시는 문효치 시인은 고향이 어디냐고 묻다가 "군산 사람이고 만" 했다. 그랬다. 나는 군산사람이다.


결혼하고 남편에게 넌지시 전주나 대전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 그냥 마음만 달래곤 했었다. 군산이란 작은 도시, 어린 시절부터 골골이 쏘다녔기에 작은 골목 길조차 너무 잘 알아서 조금은 지루했기에 새로운 도시에서 살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일곱 살,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했던 나는 한산으로 모시를 사러가는 엄마의 치마폭을 잡고 늘어졌다. 그런 막내딸이 안쓰러워 이고 진 짐과 함께 딸 잃을세라 손을 거머잡은 엄마와 나는 군산 장항 간 도선장 부잔교를 건널 때면 나무 사이로 발이 빠질 가봐 덜덜 떨면서 건너며 오갔다. 까만 밤, 불 빛 사이로 비춰지는 궁궐처럼 서 있는 건물이 군산세관이었다.

방학 때면 아버지 점심 도시락을 갖다 주러 오고가던 째보 선창 앞 중동에서 대한통운 사무실까지 용돈벌이 심부름을 즐겨했다. 아버지가 점심을 드시는 동안 그 시절에도 냉방시설이 되어있던 한일은행(옛 조선은행)에서 잠시 앉아서 더위를 식혔다. 선풍기도 귀했던 시절이다. 그것도 지루하면 동네 한 바퀴 돌아 빨간 등이 달려있던 짜장면 냄새의 유혹 따라 빈해원도 기웃거리곤 했다.
 

월명공원 산책로 시내 근접한 곳에 호수같은 저수지를 품고 산책할 수 있는 월명공원은 사계절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 이복희

 
오십년 넘게 살아온 군산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한순간 부끄러워지게 하는 책을 만났다. '대한민국 도슨트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No 7' 배지영 작가의 <군산>이다. 
 
"군산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도시가 아닌 지난 시간들을 지키고 쌓아온 도시다. 비옥한 땅, 금강과 서해가 만나 많은 것이 풍요로웠던 곳, 그래서 늘 약탈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던 곳, 군사적 요충지로서, 세곡을 모아 운반하는 조창으로서, 다양한 문물이 오가던 포구로서,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품으며 지켜온 포용의 도시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약탈자로부터 내 것을 지키기 위한 항거도 겁내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서서 새 성장을 일궈가고 있는 군산은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수백 년 뒤에 전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한 개의 지역을 한 권의 책으로!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 21세기북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덜컹하는 울림이 왔다. 작은 도시지만 뼈아픈 역사를 품을 줄 알았던 조상들의 혼이 담긴 군산 이야기는 먹먹한 가슴을 쓸어 담게 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은 식상했다. 사다 놓고 며칠이 지났다. 그런데도 자꾸 <군산>이란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읽어야 할 책이 산재해 있었지만 책을 폈다.

시간여행에서 시작된 군산 명물의 거리, 장소, 건물, 맛집 그리고 관광을 아우르는 고군산반도의 섬과 육지의 변화가 보였다. 인간의 노역으로 빚어진 옥산저수지를 품은 청암산 줄기에서 바라보는 넓은 옥구 들녘과 세계에 오직 하나뿐인 나포 십자 뜰의 철새군무를 소개한 글에서는 천수답을 꿈꾸며 흘린 조상들의 눈물이 머금고 피워낸 순수한 자연을 만났다.

연꽃과 벚꽃으로 피어나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곳 별빛다리, 그리고 하늘을 닮아 인간의 사랑으로 맺어주는 물빛다리를 건너다보면 설렘을 주체하지 못하고 은빛물결로 출렁이며 빛나는 은파호수공원까지 28개 주제로 꾸며진 글이다.
 

은파호수공원 물빛다리와 별빛다리 주변 수변로를 돌다보면 만나는 자연바람을 품고 걷는 산책길은 군산시민의 건강을 지켜주는 곳이다 ⓒ 이복희

 
읽다보니 현재의 내가 사라지고 과거를 살아온 나의 생애가 책과 함께 고스란히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웃다가 울다가 화가 나기도 하고 모든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째보선창, 서해포구, 오산상회, 빈해원, 이성당, 대야시장에서 부모님을 만나고 나포 십자 뜰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선유도에서 다양한 추억들과 뒹굴었다. 그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유도 선유도 초입 신시도에서 썰물에 들어난 갯벌 사이 바지락과 굴을따는 가족과 관광객, 멀리 보이는 서해 하늘이 날개를 폈다. ⓒ 이복희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과 흘러온 역사의 증언들, 삶으로 살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을 남기고 전하는 작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알고 살아온 것보다 더 깊고 넓고 애틋한 역사적 사연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부끄러웠고 창피했다.


죽기 전에 다리가 움직이고 무릎이 괜찮다고 할 때 돌아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일곱 살부터 살아 온 군산을 좀 더 넓고 크게 담아내기 위해 여행하듯 떠나야 할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시간여행부터 시작이다.

내가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지역에 대한 기본 도리의 애향심이지 않을까 해서다. 그리고 군산을 알리고 싶었다. 애향심은 아는 만큼 커지는 것 같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이 다인 것처럼 큰소리 치지 않고 겸허하게 역사 속으로 스며들 듯 겸손해지라고 세 아이들에게도 <군산> 책을 전했다.

작은 도시의 큰 역사를 너무도 쉽고 자연스럽게 사람 사는 이야기처럼, 사랑방에 모인 아낙네들의 도란도란 속삭임처럼 들려주는 군산 이야기는 손끝에서 빠져나갈 줄 모르고 단숨에 읽어 내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아프고 슬픈 역사, 땅과 산과 물의 변천사를 배작가는 발품 팔아 만나면서 산 증인들의 생생한 체험을 듣고 나누며 쓴 책, 역사가들의 기록을 참고삼아 과거를 현재로 끌어낸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슴에 따뜻함이 충만하게 남는 참으로 멋진 군산이야기였다.

"군산의 시간은 꿈틀거린다. 근대가 남긴 이 도시의 유산들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변화를 포용할 줄 하는 열정의 도시"가 내가 살아온 군산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죽는 날까지 이사 가는 일이 없을 것 같다. 

군산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배지영 (지은이),
21세기북스, 2020


#군산애향심 #서해안 금강 선유도 #은파호수공원 #월명산 #여행하고 싶은 군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