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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피해자는 왜 하필 기자를 찾았을까

[取중眞담] '성추행 피해자 해고' 전남대, 6개월 간 수많은 문제해결 기회 있었다

등록 2020.08.10 08:09수정 2020.08.10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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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광주 북구의 한 노래방 CCTV에 담긴 2019년 12월 26일 전남대학교 산학협력단 송년회 모습. 오후 11시 10분 B직원이 노래방 복도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제보자

 
지난 7월 30일 전남대 관계자와 통화하며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전남대가 성추행 신고 직원을 해고해 이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관련기사 : 성추행 피해자 해고하고, 증언한 직원 채용 취소한 국립대 http://omn.kr/1ogm6)

"지금 (피해자가) 소송을 걸었잖아요. 본인이 억울하다면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법기관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소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 좋은 절차를 두고 왜 언론에 이야기하고 이러는지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그러게 말이다. '기레기'란 말이 유행처럼 도는 시대에 피해자는 왜 굳이 기자를 찾았을까.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를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사회에서 왜 자신이 겪은 일을 만천하에 공개하려 했을까. 그래서 꼼꼼히 따져봤다. 피해자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사건은 2019년 12월 26일 전남대 산학협력단 송년회식 중 노래방에서 벌어졌다. 당시 상황을 담은 CCTV엔 A과장(남)이 B직원(여)을 상대로 불필요한 신체접촉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뿐만 아니라 C직원(여)이 두 사람을 떨어뜨리려는 모습, B직원이 노래방 복도에서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 몇몇 직원이 B직원을 위로하자 이를 A과장이 쳐다보는 모습 등도 CCTV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해를 신고한 B직원에게 '해고', 조사 과정에서 증언한 C직원에게 '정직 3개월' 처분이 내려졌다. 수습 기간이었던 C직원은 이로 인해 채용이 취소됐으니 해고와 다를 바 없었다.

바뀌지 않고, 악화돼 갔다

사건 발생 11일 후인 2020년 1월 6일 B직원은 A과장을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다. 조직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자신을 다른 부서로 옮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1월 10일 B직원은 조직의 대표인 김재국 산학협력단장(교수)을 찾아갔다. 역시 인사이동을 요구했다. B직원은 김 단장으로부터 '사회규범을 너무 엄격히 적용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김 단장은 "면담의 주된 내용은 사실관계 파악이었고 인사이동 요구는 사실관계 확인이 우선이라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해명). 역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같은 날 A과장이 B직원을 불렀다. 문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B직원은 자신이 아닌 A과장의 인사이동을 요구했다. 역시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1월 14일 B직원은 이 사건을 전남대 인권센터에 신고했다. 가해자가 제출한 '휴대폰으로 촬영한 4배속 CCTV 영상'을 토대로 조사를 진행한 인권센터는 성추행은 없었고, B직원이 허위신고를 했다고 판단했다.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2월 초 'B직원을 징계하라'는 내용의 인권센터 보고서가 정병석 전남대 총장에게 올라갔고 결재가 떨어졌다.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2월 18일 산학협력단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B직원은 자신이 직접 구한 '1배속 CCTV 영상 원본'을 제출했다. 징계위원회가 인권센터에 재조사를 요구했다. 이 사건 모든 과정 중 있었던 유일한 '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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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에 위치한 전남대. ⓒ 소중한

 
3월 26일 인권센터 재조사가 진행됐다. '성추행은 없었다'에서 '신체접촉은 있었으나 불쾌감을 느낄 성적 언동은 아니다'로 뉘앙스가 바뀌었다. 하지만 B직원이 허위신고를 했단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5월 22일 다시 산학협력단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직원대표 위원과 변호사 외부위원이 B직원의 징계에 반대했다. 하지만 산학협력단 고위직으로 채워진 다수 징계위원의 의견에 따라 B직원에게 해고, C직원에게 정직 3개월 처분이 내려졌다.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6월 8일 B직원은 징계위원회에 재심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6월 18일 징계위원회는 재심 신청을 기각했고 6월 25일 징계가 확정됐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때문에 B직원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와 함께 기자를 찾았다.

수많은 '~했다면'

이 글에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는 문장이 4번,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는 문장이 4번 쓰였다. 전남대는 8번이나 상황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친 셈이다.

최초 B직원의 인사이동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면, 산학협력단장이 문제 해결에 관심을 보였다면, 인권센터가 원본 CCTV 영상을 구해 면밀히 검토했다면, 인권센터가 B직원을 허위신고자로 몰지 않았다면, 총장이 결재 과정에서 제동을 걸었다면, 징계위원회의 결정이 좀 더 신중했더라면.

이 수많은 '~했다면'의 상황에서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처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관련기사]
'메모지' 속 2차 가해 단어들 http://omn.kr/1ogwh
인권 없는 전남대 인권센터 http://omn.kr/1oh82
"전남대 즉각 복직시켜라" http://omn.kr/1oj8a
교육부, 전남대 조사한다 http://omn.kr/1ojcc
 

성추행 신고한 직원, 되레 해고한 국립대 위 영상은 지난 2019년 전남대 산학협력단의 송년 회식 장면이 담긴 노래방 CCTV 화면. ⓒ 홍성민

#전남대 #성추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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