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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고문, 아내는 성폭행" 스님의 기막힌 사연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납북귀환어부 이상철 간첩조작사건

등록 2020.08.15 20:42수정 2020.08.1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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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과 19살에 각각 부모를 여읜 이상철(1950년생)은 14살 때부터 세 동생들을 돌보며 소년 가장으로 어부가 됐다. 1971년 9월 26일 동해바다에서 동료 선원 19명과 함께 오징어잡이 중 태풍을 만나 북한 경비정에 피랍되었다. 그는 1년간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1972년 9월 7일 귀환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이상철은 수산업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1973년 4월 12일 인천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74년 출감한 이상철은 자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부모도 없이 자란 16세 여동생은 시집 갔고, 밑의 남동생은 주문진 항구의 가게 점원으로, 막내 남동생은 남의 집 양자로 들어간 것을 알게됐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77년 거제도에 정착한 그는 결혼해 1녀 1남을 두었고 페인트 가게를 열었다. 1983년 봄 이상철은 경남 거제군 대우조선소에 시설관리부 반장으로 취업했다. 1983년 11월 15일 그가 일하고 있던 대우조선소 공사 현장에 건장한 보안부대 수사관 4명이 나타났다. 군수사관들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영장도 없이 민간인인 이상철을 강제 연행해 갔다.

법령상 국군보안사령부에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다. 그런데도 당시 보안부대 수사관은 민간인 이상철을 강제 연행해 가혹한 고문수사를 자행했고 나중에는 수사기록도 위조했다.

성불구자가 되다

필자가 한때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 보고서에는 당시 보안사에 불법으로 강제 연행된 뒤 수사관들에게 가혹한 고문조사를 받던 이상철의 진술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수사관들이 나의 옷을 다 벗겨 놓고 무릎을 꿇게 해 조사를 했다. 수사관들이 전기고문을 할 때는 양쪽으로 4명, 앞뒤에 1명씩 서 있었고 물에 젖은 가마니를 바닥에 쭉 깔아놓았으며, 그 추운 겨울에 발가벗겨 의자에 앉혀 놓고 손과 발을 묶고, 나의 성기에다 전기선을 감아 전기 고문을 했고, 또 봉을 만들어서 전기 스파크가 생기면 나의 앞가슴을 쳤다. 그 충격에 의해서 내가 쓰러지면, 수사관들이 의자와 나를 함께 잡아서 다시 똑바로 앉혀서 전기 고문을 반복했다. 수사관들이 내가 전기고문을 받다가 기절을 하면, 바케스(양동이)에 물을 갖다놓고 내 온 몸에 부었다.

수사관들이 물고문을 할 때는 나의 양손을 발 사이로 해가지고 봉을 끼워 매달아 놓고(돼지 멱 딸 때처럼 거꾸로 매달아 가지고), 물탱크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수사관들이 물을 실컷 먹고 기절해 버린 나를 끄집어내어 발로 밟아 물을 토하게 했다.

수사관들이 옷을 주었는데 나에게 런닝이나 팬티는 주지 않고, 군복 윗도리와 바지만 입게 했다. 잠을 하루에 2시간 밖에 못 자게 했고, 2시간 재우는 것도 군용 야전침대에 군용 담요를 하나 주어 잠을 자게 했다. 하지만 군용 야전침대에 누워서 고개나 몸을 옆으로 좀 돌리려고 하면 수사관들이 바로 눕게 했고, 추워서 담요를 어깨 이상으로 올리면 다시 내렸다.

고문을 받다가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생겼지만 자살 시도는 다 실패했다. 화장실에 가서 대변을 볼 때도 문을 열어놓고 하고 조금이라도 이동할 때면 옆에서 팔짱을 끼고 앞뒤로 수사관들이 서 있었다.

전기고문과 물고문도 그렇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수사관들이 나를 발가벗겨 벽에 세워놓고, 나의 성기에다 고무줄을 묶어서... 그 고통이 컸다. 그리고 조사받을 때 나의 머리는 장발에 가까웠다. 수사관들이 나에게 졸지 말라고 발뒤꿈치가 들리게끔 천장에다 내 머리를 묶어서 매달아 놓고, 내가 조금이라도 껌뻑 거리면 머리카락이 빠졌다. 참 인간으로 상상하지 못할 고통이다. 머리카락이 빠져도 잠이 와서 껌뻑 거리면 각목이나 몽둥이를 가지고 옆구리고 등짝이고 배때기고 볼 것 없이 사정없이 때리고, 봉을 허벅지 사이에다 끼워놓고 수사관들이 붕 떠가지고 나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 당시 고문으로 나는 성불구자가 되었고 현재도 오른쪽 귀가 안 들린다. 

   

보안사에 불법으로 강제 연행된 뒤 이상철은 수사관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사진은 영화 <남영동 1985>의 한 장면 ⓒ 아우라픽처스

   
어느 날에는 수사관들이 나를 사흘인가 굶기더니 내 앞에서 불고기를 앞에다 놓고 술을 먹기까지 했다. 그 불고기 냄새 때문에 내가 미칠 지경이었다. 수사관들이 나에게 '지장을 찍고 고기를 먹으라'고 했다.

어느 날에는 수사관들이 나하고 함께 납북되었던 김 아무개가 전국을 돌며 간첩 활동을 하다가 잡혀 왔다고 했다. 수사관들이 '만난 적이 있냐'라고 물어 나는 '만난 적도 없고 귀환해서 지금까지 모르고 산다'라고 말했다. 김 아무개가 실제로 간첩 활동을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옆방에서 비명 소리가 밤새도록 들렸다. 수사관들이 나에게 '옆방에 니 동생과 처가 와서 고문을 받는다며 들어봐라'라고 했다."


동생과 처가 고문받는 소리에 무너져

결국 동생과 처가 고문 받는 소리에 이상철은 철저히 무너졌다. 그는 "처와 동생이 고문받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차라리 나 하나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밤낮 없는 가혹한 고문 37일 만에 그는 마침내 수사관들에게 자신이 간첩이라고 거짓 자백했다.

그 뒤 이상철은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검사실에 보안사 수사관들 4명이 버티고 있어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당시 검사가 수사관한테 허리를 굽히고, 검찰청에 아가씨도 있는데, 검사가 직접 차를 수사관들에게 가져다 주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이상철은 마산지방검찰청의 기소로 1984년 5월 2일 마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7년, 자격정지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84년 6월 26일 대구고등법원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에 이상철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창원시에 있는 육군 제502보안대 수사관들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했으며, 그 당시 악몽 같은 고문의 흔적이 7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팔목에 있고 손과 발은 아직도 감각이 둔화된 상태이며 생식기도 이따금 통증이 오기도 한다. 이와 같은 고문 등을 하면서 확실한 증거가 없자 보안대 수사관들이 이러이러하게 행동했을 것이고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는 식으로 조서를 먼저 작성해 그것을 보고 자필해 진술서를 쓰게 했다.

그리고 보안대 수사관들이 '이것을 인정해 국가로부터 선처'를 받아야 된다. 선처로는 공소 보류도 있고 또 국가에서 베푸는 은사 조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국가의 혜택이 많으니까 모든 것을 조서와 같이 시인하고 동정을 받으라고 획책해서 어리석게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시인하게 되었다. 이후 검찰 조사와 1심 법정에서도 시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3개월 후인 1984년 9월 14일 작성된 이상철의 대구고등법원 1차 공판조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검사: 1심 법정까지 자백을 한 것은 맞는가?
이상철: 맞으나 보안대에서 35일간의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했다.
검사: 수사기관에서 자백한 것은 고문에 못 이겨 그랬다 하고 1심 법정에서 자백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상철: 수사기관에서 공소보류를 해 준다고 해서 그것을 믿고 모든 생을 포기한 상태에서 허위자백을 한 것이다.


"이렇게 맞다가는 우리가 죽게 생겼다"

국군보안사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조사를 받은 민간인은 이상철뿐이 아니었다. 그의 직장 동료와 동생들도 불법으로 강제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다. 당시 대우조선소 토목기사 강아무개는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지하1층 조사실에서 새빨간 가죽 잠바를 입은 수사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 수사관이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옆구리를 때리고, 허벅지와 정강이를 구둣발로 차는 등의 구타를 했다. 새벽이 되어 졸음이 와서 졸면 수사관이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머리와 얼굴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새벽쯤 되어서 (직장동료) 심아무개를 내가 있는 방으로 데리고 왔다. 심아무개는 잘 걷지를 못하고 절뚝거리면서 들어왔다. 나와 심아무개가 함께 조사를 받았는데 심 아무개도 '이상철에게 대우조선의 시설물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니 수사관들이 손과 주먹 그리고 발길질로 나와 심아무개의 온몸을 때렸다.

수사관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면서 어떤 사람이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정말 이상철인지 몰랐다. 이상철은 상고 머리였는데 머리를 빡빡 깎여 있었으며 걸음도 잘 걷지 못했고 얼굴에 멍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심하게 부어 있었다. 수사관이 나에게 '이상철이 알아, 몰라'라고 말하자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수사관이 심아무개에게 '너도 몰라'라고 물었는데 심아무개도 '모른다'고 하니까 수사관이 '이 새끼들 이상철이를 왜 몰라' 하면서 두들겨 팼다. 그리고 이상철을 데리고 나갔다.

이상철이 나가고 나서 '너희들끼리 이야기를 해봐라'면서 수사관들이 조사실에서 모두 나갔다. 내가 심아무개에게 '이렇게 맞다가는 우리가 죽게 생겼다. 이상철처럼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니냐, 수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하자'라고 합의를 했다. 그러고 나서 좀 있다가 수사관이 들어와 '잘 이야기 했냐'라고 물어보아 내가 '잘 이야기를 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나와 심아무개가 받아 적었고, 지장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수사관이 팬티만 남기고 옷을 다 벗으라고 해 우리들의 몸에 대한 신체 검사를 했다. 그러면서 '어디 아픈 데 있냐'라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일찍 협조를 해주었으면 고통을 받지 않았을 것인데 때려서 미안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수사관이 '여기서 조사받은 내용에 대해서 발설하게 되면 국가 기밀을 누설하게 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소리 내어 읽게 했으며, 서명하고 지장을 찍도록 했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보안대 수사관이 검사가 묻거든 검사 앞에서 무조건 '예'라고 대답해라, 만약 '아니오'라고 대답하면 다시 조사받으러 가야 한다고 협박했다. 그 수사관이 검찰에 제출하는 서류에 '중사'라는 계급이 쓰여있는 것을 보았다. 검사가 수사서류를 보더니 우리에게 '이것이 맞냐'라고 물어보았고, 우리는 무조건 '예', '예' 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고 나왔다."


이상철의 직장 동료이자 대우조선소 토목기사였던 심아무개도 지난 2009년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수사관들이 뺨을 때렸고 잠이 오는데 잠도 못 자게 하면서 계속 조사를 했다. 수사관이 '같은 직원들이 다 인정을 했는데 너는 왜 인정을 안 하느냐'며 또 때렸다.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갔는데 강아무개 등이 있었다. 나와 강아무개 등이 계속 모른다고 하면 수사관이 뺨을 때리고 회유와 협박을 했다. 강아무개는 학교 다닐 때 데모했던 경력이 나와서 더 많이 맞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시인하게 되었다.

수사관이 자술서를 쓰라고 시나리오를 종이에 적어가지고 왔다. 수사관이 시나리오를 주면서 '같은 회사 직원들이 다르게 쓰면 안 되니 이것을 보고 비슷비슷하게 적어라'고 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했고 이후 보안대에서 조사받은 것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석방되었고, 검찰에서도 보안대에서 인정한 대로 다 시인했다."


"지휘관이 더 나서서 괴롭혀"

이상철과 함께 지난 1971년 납북되었던 동료 선원 김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창원보안대 수사관들이 나에게 군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리고 욕조와 책상이 있는 지하조사실로 데려갔다. 수사관들이 나에게 '북한에서 무슨 교육을 받지 않았냐, 무슨 지령을 받았냐, 국가기밀을 탐지했지' 등을 물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몽둥이를 가지고 와서 때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정말 발바닥을 많이 맞았다. 너무 많이 맞아서 발바닥이 부어올랐고 걸을 때마다 풍선을 밟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의자에 다리를 묶어 놓고, 엄지손가락에 전기선을 묶고 전기고문을 했다. 나중에는 엄지손가락에 딱지가 생길 정도였다. 또 어느 날에는 손목과 발목을 각각 묶었고, 무릎을 손으로 감싸게 하더니 오금 사이로 나무 막대기를 넣었다. 그리고 수사관 2명이 내 몸과 나무 막대기를 함께 들어서 책상과 책상 사이에 걸쳐 놓았다. 그러니 마치 통닭처럼 몸이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내 얼굴에 물을 부었다. 또 오금 사이로 각목을 끼워 넣고, 무릎을 꿇게 하더니, 무릎 위로 수사관이 구둣발로 밟고 올라가 짓눌렀다. 그래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북한에서 지령을 받았고, 국가 기밀을 탐지했다는 내용으로 다 시인을 했고, 서류에 손도장까지 다 찍었다.

고문은 주로 이아무개 중사와 지아무개 하사가 했다. 그리고 목 과장(중령으로 추정)이라는 사람이 나의 무릎 위에 올라가서 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아랫사람들이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하면 지휘관이 못하게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목 과장은 더 나서서 나를 괴롭혔다. 이 아무개 중사는 나에게 '너 동중(마산동중학교) 나왔지, 나도 그곳을 나왔다. 너를 때리면서도 안타깝다'라는 말을 했다.

다 시인을 하자 그때부터는 수사관들이 잘해주었다. 발바닥이 많이 부어 있었는데, 조그마한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발바닥을 문지르게 했고, 연고를 갖다 주면서 발바닥에 바르라고 했다... (중략)... 창원보안대에서 서울보안대로 가기 전에 이상철에 관한 조사를 받았다. 내가 간첩행위를 했다고 시인한 후였기 때문에 이상철에 대해서도 수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다 시인을 했다. 창원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이상철을 본 적이 없다. 다만, 내가 그렇게 고문, 가혹행위를 당했는데, 이상철은 오죽했겠는가, 나보다 더 당했으면 당했을 것이다."
 

당시 대우조선소 토목소장 문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보안대 수사관들이 이상철은 간첩이라고 해, 무서웠기에 수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적었으며 조서도 읽어보지 않고 지장을 찍었다"고 진술했다.

당시 옥포기업 목수반장 한 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보안대 수사관 최 과장이 이상철은 간첩이며, 대우조선에 침투해서 250여 명을 포섭했고, 그중 나를 포섭하려다 실패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상철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으며, 최 과장이 글을 써주어서 그대로 베껴 썼다"고 진술했다.

당시 경북 영덕군 건업사 직원 김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보안대 수사관이 이상철을 간첩이라고 하면서, 문장 몇 개를 만들어가지고 오더니 '이상철이가 북한을 찬양하는 이런 저런 말을 했다고 해라'고 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옆방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김아무개가 맞는 소리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수사관은 나를 강간한 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이상철의 당시 처(후에 이혼) 김아무개는 진실위에서 그때 남편이 보안사에 구금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보안사 수사관에게 당한 고통을 이렇게 증언했다.

"조사가 끝나자 나를 조사했던 사람이 배가 끊겼으니 근처에서 자고 다음날 일찍 집에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수사관에게 여관에 데려주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조사받은 건물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갔다. 그 수사관이 여관비를 냈고, 그 여관 1층에 있는 방으로 함께 들어갔다. 나는 여관방 침대에 걸쳐 앉아 있었고, 그 수사관은 '여기서 잘 자고, 내일 아침에 집에 잘 가이소'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가더니 다시 들어왔다. 그 수사관이 무조건 나의 옷을 벗기더니 강간을 했다.

그때 나는 아무 반항도 하지 못했다. 나를 강간한 사람은 수사관이었기 때문이다. 그 수사관은 나를 강간한 후 '말하지 말아라' 하고 여관방을 나갔다. 내 키가 155cm정도인데 그 사람은 나보다 컸는데 아주 큰 키는 아니었고, 아주 작은 키도 아니었다. 머리카락이 짧은 스포츠머리였고,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고 경상도 말투였다."


이상철의 동생 이아무개는 진실위에서 출소 후의 형 이상철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큰 형님 이상철이 출소 후에 나에게 이야기해준 것은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을 때 고문을 많이 받았으며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고 했다. 또 전처 김아무개도 보안대에서 조사를 받은 후 성추행을 당했다고 했다. 둘째 형님 이아무개도 보안대에 참고인으로 소환되어 폭행 등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둘째 형님 이아무개는 큰형님이 구속되자 괴로워서 술만 마시다가 1986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한편 1984년 5월 2일 마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7년을 선고받은 이상철은 고등법원과 대법원에 항소 및 상고했다. 그러나 각각 기각되어 1985년 1월 22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그는 6살 된 딸과 4살 된 아들을 둔 가장이었다. 그 후 이상철은 약 15년간 수감생활을 한 후 지난 1998년 8월 15일 출소했다. 
 

보광 스님 ⓒ 진실위 자료

 
하지만 이상철은 출소 후에도 전혀 아들과 딸을 만나지 못했고 아내와는 이혼했다. 평생 억울하게 '빨갱이 자식'이란 놀림과 냉대 그리고 비난을 받았던 자녀에게 다시 아픔을 주는 '간첩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출소한 이상철은 곧 출가해 보광이란 법명의 승려가 됐다. 이상철은 딸의 결혼식에도 딸에게 누가될 것 같아서 참석하지 않았다. 아니 먼발치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아이의 얼굴을 남몰래 바라보고는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며 쓸쓸히 돌아서야 했다.

지난 2006년 10월 18일 이상철, 아니 보광 스님은 1984년 전두환 정권기 보안부대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자신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며 진실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하지만 진실규명을 신청한 지 4개월 만인 지난 2007년 2월 25일 심장마비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야"

출소 후 무려 23년간 아버지를 만나지 않은 아들(당시 28세)은 뒤늦게 아버지의 차가운 시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뜨겁게 오열했다. 아들은 아버지 생전에 호적을 정리하려고까지 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운명하기 한 달 전인 지난 2007년 1월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만나기를 거부했다. 이상철은 그런 아들을 그리워하며 유언과 같이 아들 핸드폰에 마지막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실이 밝혀질 테니 하나 하나 풀어나가자. 아들아, 아버지는 간첩이 아니야."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0년 1월 진실위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제502보안부대가 납북귀환어부 이상철을 영장 없이 연행해 구금하고 고문, 가혹 행위를 가하는 등 불법적인 수사를 해 허위 자백을 받아낸 후, 거제경찰서에서 이상철을 1976. 9.~1983. 11. '접선 공작'을 위해 협조망으로 운영한 사실을 은폐해 간첩 행위를 한 것으로 왜곡하고, 국가안전기획부가 수사한 것처럼 수사서류를 작성함으로써 결국 기소와 판결을 통해 장기간 징역형을 살게 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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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보광 스님의 영정 사진. 위패는 27일 전북 금산사에 모셨다. 2007.2.27 ⓒ 한지연

 
그리고 위와 같은 진실위의 진실규명 결정을 근거로 이상철의 자녀들은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 2011년 11월 20일 27년 만에 이상철은 사후에나마 간첩 누명을 벗었다. 이날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했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군기관이 이씨를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받은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 과거 법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해 그동안 커다란 고통을 받은 피고인과 그 유족들에게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부디 이 판결이 피고인과 유족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재심 청구인, 고생하셨습니다."

보광 스님, 이 세속에서 너무나 고생하셨습니다. 극락 세계가 있다면 그곳에서라도 편히 쉬소서!
#이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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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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