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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 / 39회] 이시영은 환국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다

등록 2020.08.15 17:40수정 2020.08.1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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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임정 환국 환영준비위원회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奉迎會)’ 식장에서 백범 김구가 연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임정은 뜻을 펴지 못했다. ⓒ 권기봉

 
해방정국에서 이시영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신분이었으나 미국이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요구하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선장군'이 되지 못한 채 쓸쓸하게 환국하였다.

이시영이 맞은 해방정국과 정부수립 그리고 이승만 정권기에 겪은 영욕은 따지고 보면 임시정부가 부인되면서 비롯되었다. 형제들과 함께 망명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법무총장으로 참여한 이래 일제 패망때까지 27년 동안 임시정부를 지켜온 그에게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일 뿐 아니라 생애의 모든 자산이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런 저런 사유로 임시정부를 떠날 때도 그는 법무총장→국무위원 겸 법무위원→한국독립당 감사→재무부장→의정원의원→국무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시종일관하여 임시정부를 지켰다.

월남 이상재는 이시영 일가의 서간도 이주와 신흥무관학교 설립 그리고 독립운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할 때, 망명한 충의의사가 비백비천(非百非千)이지만, 형제가족 40여 인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일제히 거국(去國)한 사실은 예전에도 지금도 없는 일이다. 그 의거를 두고 볼 때… 진실로 6인의 절의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되고 우리 동포의 절호의 모범이 되리라 믿는다. (주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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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피살되기 2달 전의 모습이다.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임시정부가 미국에 의해 부인되고 여운형의 전국동맹도 인정받지 못한 해방공간은 백화제방의 혼란상을 보여주었다. 미군정이 유일하게 권력의 실체로 등장한 가운데 해방정국은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 이승만 중심의 미주세력, 여운형 중심의 건준세력, 박헌영 중심의 좌익세력, 송진우 중심의 한민당 세력이 혼거한 상태였다. 정치적으로는 반탁과 찬탁, 이념적으로는 우익과 좌익, 외교상으로는 친미와 친소로 갈리거나 대립상이었다.

이시영은 환국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다. 경교장에서 환국 후 처음으로 열린 임시정부 국무회의에도 참석하고, 임정요인 환영 국민대회 등에도 참여하면서 새나라를 세우기 위한 여러 가지 방책을 구상하였다.

1945년 9월 16일 송진우ㆍ김성수 등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우익 세력이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면서 이승만ㆍ김구와 더불어 이시영을 영수로 추대했으나 그는 이들의 과거 행적을 이유로 취임을 거부하였다.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6년 1월 28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이 반만 년 내로 공통한 말과 글과 풍토와 주권과 문화를 가지고 공통한 민족정의를 길러온 우리 끼리로서 형상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조직임"을 선포한 이 강령은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 이시영ㆍ조성환ㆍ조완구ㆍ조소앙ㆍ박찬익ㆍ차리석이 차례로 연서하였다.

이시영은 1946년 3월 5일 하지 중장이 워싱턴에서 반탁, 단정수립 반대 등 임시정부측의 움직임에 강경성명을 발표하자, 김구ㆍ조완구ㆍ유림 등과 브라운 소장을 만나 이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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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하지 중장 사이에 낀 김구. 이승만과 미국 사이에 낀 김구의 처지를 보여주는 사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의 이화장(이승만 사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시영은 이에 앞서 1946년 2월 8일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탁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통합하면서 이 단체의 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최고정무위원에는 임정출신으로 이승만ㆍ김구ㆍ김규식 등과 한민당의 백남훈, 신한민족당의 권동진, 국민당의 안재홍, 인민당의 여운형, 무소속의 오세창, 기독교계의 함태영, 천주교의 장면, 불교의 김법린 등 각 정치세력을 두루 안배한 28명이 선임되었다. '국민회의' 선전정보부장 엄항섭은 "최고정무위원회는 과도정권 수립의 산파역을 임무로 하여 임시정부는 과도정권이 수립되기 전에는 해체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하지만 국민회는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2월 14일 미군정의 최고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으로 변모되어 이승만을 의장, 김구ㆍ김규식을 부의장으로 하는 '민주의원'으로 바뀌었다. 4월 10일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의회 제1회 전국도부군지부장회의가 지부장 88명, 초청객 5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서울 YMCA에서 이틀간에 열렸다.

미ㆍ소 공위, 식량대책, 지방조직강화문제 등을 토의하고, 이승만과 김구를 총재로, 이시영을 회장으로 하는 부서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이 단체가 분열을 거듭하면서 이시영은 여기서 손을 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시정부 요인 가운데에도 주의 주장이 서로 맞지 않아 고소 사건이 일어나는 등 불미스런 사태가 벌어지자, 선생은 도의적 견지에서 위원장의 임무를 인책 고사하였다. (주석 3)


주석
2> 이정규ㆍ이관직, 『우당 이회영전』, 183쪽, 을유문고, 1985.
3> 박창하, 앞의 책, 8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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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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