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포악한 일제 형무소장 상대로 '사죄' 받아 낸 독립지사들

[새로 쓰는 독립군사 12] 독립군의 피체와 옥중 투쟁, 그리고 순국 ②

등록 2020.08.11 11:24수정 2020.08.11 11:25
0
원고료로 응원
신문투쟁을 끝낸 독립군은 새 투쟁에 들어갔다. '새로운 옥중 생애'(1933.6.30.), 곧 옥중 투쟁이 전개되는 것이다. 독립군을 포함해 정치범은 잡범과 분리되었는데 정치범 방에는 '수양회'가 있었다. 새로 들어온 이가 있으면 환영회/환영사, 출감하는 이가 있으면 송별회/송별사가 있고, 항일노래 「상봉가」 「이별가」를 때에 따라 부르며 회포를 풀었다. 주일에는 예배, 오락, 체육 등의 활동도 했다. 동포 간수들은 정치범을 예우해서 신문을 넣어주기도 하고 통신 연락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한철수, <나의 길>).

그러나 그곳은 일제 감옥이다. 생활이 순탄할 리 만무했다. 일제 간수의 포악한 행동이 늘 존재했다. 그 실정을 항일노래 「평양감옥가」은 이렇게 표현했다(계기화 편, <새배달노래>).
 
5.머리엔 벼락같은 곤봉 세례요 / 허리엔 무정한 발길질이라
죽음 힘을 다하여 일어나며는 / 허리에 찬 쇠사슬은 천근 무게라

6.곤봉에 몽롱해진 망막 속에는 / 황천의 염라대왕 얼신거린다
이것이 피치못할 나의 신세면 / 차라리 북망산천 편하리로다

7.어제는 이 친구께 가죽조끼요 / 오늘은 저 친구께 중영창이라
양과 같이 온순한 이 형제에게 / 가죽조끼 중영창이 웬말이냐

8.오늘도 인간백정 도살군들이 / 검은 집에 내 친구 끌고갔는데
가증한 왜중놈의 교회사 소리 / 멀리서 제 육감에 들려오누나

9.죽이는 놈 죽는 자 한 지붕 아래 / 이러한 부자연이 또 있을소냐
하느님 이 겨레가 무슨 죄있소 / 원수에게 저주를 나리옵소서

'곤봉 세례, 발길질, 쇠사슬, 가죽조끼, 중영창'이 일상으로 난무한 가운데 독립지사들은 '죽음'을 직면하며 지내야 했다. 고문과 죽음이 드리운 감옥에서 지사들은 원수 일제를 저주한다. 노래는 일제 감옥에서 고난당하는 독립지사의 실정을 사실대로 형상하고 있다.

포악한 일제 감옥


죽을 정도로 포악한 곳이 일제 감옥이었다. 지사들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옥중 투쟁은 첫째, 항일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지사들이 자체적으로 하는 활동과 둘째, 간수의 학대에 대한 항거가 있다. 항일의식 고양은 독립군가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활동 규모를 크게 해서 항일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한철수의 회고(<나의 길>)는 이렇다. 감옥 5방의 정치범 일동이 밤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소재로 항일 연극을 했다. 연극에 필요한 물건은 사역하는 공장에서 구해 왔다. 일제 간수장이 이를 알고 주모자를 색출하려 했지만 모두가 힘을 모아 강경하게 대처했다. 결국 5방의 지사들은 여러 감방에 분산 수용되었다.

옥중 항거는 개인이 하기도 하고 집단으로 하기도 했다. 1922년 경성감옥에는 수백 명의 정치범이 있었다. 그 가운데 대한독립단 독립군으로 국내 작전 중 피체된 김세순이 있었다. 경성감옥은 학대가 일상이었는데 그는 학대에 항거해 간수와 언쟁을 했고 그 결과 독방에 구금되었다. 그는 강한 전사였다. 감옥의 일제 교회사(敎誨師)가 석방 후 할 일을 물으면 "이미 뜻을 결단하고 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상 어디까지든지 그 운동을 위하여 목숨을 마치겠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하지만 독방 형벌은 그를 무너지게 했고 출옥 6개월을 앞두고 자결 순국했다(1922.8.30.).

평양감옥의 미결수 한철수(<나의 길>)는 간수에게 구타당하자 모든 지시에 반대하고 항거했다. 감옥 규칙을 어기고 소란을 일으켰다. 간수들이 난타해도 수갑 찬 손으로 반격을 했다. 일제 간수도 어쩌지 못하고 결국 감방에서의 자유행동을 허용했다. 이후 독립군가와 애국가를 부르기도 하며 작은 공간이지만 마음대로 생활했다. 사형될지도 모르는 미결수여서 가질 수 있는 작은 자유였다 하겠다.

이승은 청진감옥에 수감되었다. 한 간수가 흉악하여 무작정 욕하고 때리곤 했다. 이승은 먼저 공격하고 곧 감방에 갇혔다. 하지만 교회사에게 간수가 뇌물을 요구하며 탈옥시켜주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 후 간수의 욕은 사라졌다(<백절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

경성감옥의 '정치범' 200여 명은 '대우 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결행하기도 했다. 일제는 포악한 간수를 동원하여 그들을 전부 결박해 천정에 매달고 혹독하게 매질을 해댔다. 기절하면 풀어놓아 주사를 놓고 소생하면 다시 매달아 난타를 했다. 비명을 듣고 감옥 밖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몰려들어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결국 감옥 당국이 굴복했다. 교도소 관리(典獄)가 좌천되고 새 담당자가 부임해 왔다(한철수, <나의 길>). 옥중 투쟁의 승리였다.
 

평양감옥 1922년 증축 설계도 일부 일제는 1922년에 평양감옥을 증축했다. 3.1혁명과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 사회운동의 발전, 강화에 피체되는 운동가들이 증가했다. 평양감옥의 증축은 이를 반영했다. 이후 평양감옥의 중축 설계도는 없고, 1939년 가서야 부속시설을 조금 증축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 국가기록원


일제 간수의 포악에 대항하여 집단으로 단식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1935년 7월의 서대문형무소 투쟁은 규모도 컸고 악랄한 간수들을 징역에 처하게 할 만큼 영향이 컸다. 김철수(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 따르면 형무소 공장에서 정치범 4명을 '악형 도구(惡刑具)'로 죽였다. 이에 1000여 명의 수형인들이 고함을 치고 만세를 부르며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감방 문을 쳤다.(주1)

'사상수'들은 더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섰다. 곧 '대우개선, 사형집행 반대'를 내걸고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20명으로 시작된 단식은 30명이 더 참가해서 50명으로 늘었다(1935.8.8). 정치범 대표로 김동삼, 김철수 등이 나서서 형무소 측에 항의했다. 결국 형무소 측은 가장 악랄했던 간수에게 8년, 기타 8명에게 몇 달~3년의 징역을 살게 했다.(주2) 옥중 투쟁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런 집단 옥중 투쟁의 중심에 늘 서로군정서 참모장, 정의부 중앙집행위원장이던 김동삼이 있었다. 정치범이 외부와 연락하다가 혹독한 징벌을 당하면 김동삼을 중심으로 집단 단식 투쟁에 나섰다. 결국 형무소장이 투쟁의 지도자 김동삼에게 사죄를 해야 단식이 끝났다고 한다.(주3)

독립군이 다른 감옥을 옮겨갈 때는 '독립만세'를 외쳐 길에 있는 동포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1922년에 평양감옥의 15명이 경성감옥으로 이동했다. 남대문역에서 마포행 전차를 타는 순간 갑자기 한 사람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어 모두 함께 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주변의 많은 동포들은 독립만세 소리에 호응해서 장쾌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한철수, <나의 길>). 무기는 없지만 애국지사들이 함께 외치는 '함성의 전투'였고, '옥중 투쟁'이었다. 15명은 경성감옥에 도착해서 6일 동안 감식을 당했다.

독립운동을 포기한다는 조건의 가출옥 공작을 거부하는 것도 옥중 투쟁의 하나였다. 대한독립단 민양기가 친일파 은율군수를 처단하는 일을 도왔던 장덕보는 평양감옥에서 복역했다. 감옥 관리가 '죄를 뉘우치면' 가출옥시켜주겠다며 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그는 "내가 조선 사람으로서…일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원하는바 조선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바 조선 독립의 희망을 지워버리겠소?"하며 거부했다. 도장을 찍지 않았음에도 형기만료 100일을 남기고 가출옥시키자, 그는 도장을 안 찍었으니 가출옥될 리 없다며 다시 감옥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1922.7.11.). 징역이 좋아서가 아니라 독립운동 포기를 조건으로 한 가출옥을 반대한 것이다.

투쟁의 정점, '탈옥'

옥중 투쟁의 정점은 탈옥이었다. 서로군정서 특파원 정찬도(鄭贊道. 본명 鄭贊朝. 주4)는 동지들과 평양부청(平壤府廳)을 폭파하려다가 일경에게 탐지되어 피체되었다. 경찰서에서 고문당하며 취조 받다가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 칼을 맞으면서도 담을 넘는 데 성공했지만 수백 명의 일경이 포위해서 다시 피체되었다. 그의 옷은 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1925.8.8.-9.). 당시 평양 동포들에게 정찬도의 탈출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

국경과 가까운 청진형무소에서는 탈옥 투쟁이 두 차례 있었다. 1922년 8월의 파옥 투쟁. 이승은 친일파 처단 후 피체되었다가 탈출에 성공한 유상돈의 이야기를 꺼내며 파옥 동지를 구했다. 김영복, 이성우, 김재봉 등이 동조했다. 25일 밤에 감방에 일이 생긴 것처럼 꾸며 간수를 끌어들여 주먹으로 쓰러뜨리고 탈출했다. 이승, 김재봉은 빠르게 밖으로 내달렸지만 이성우, 김용복은 간수에게 다시 붙잡혔다. 탈출한 두 사람은 삼림지대로 들어가 8주 뒤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다시 망명했다(<백불굴하던 전우 이홍파의 회상담>; 1928.3.9.)

다음은 1923년 7월의 탈옥 투쟁. '조선독립사건'으로 선고를 받은 14명이 7월 8일 무리 지어 간수들을 맹렬하게 공격한 뒤 탈옥했다. 그 자리에서 2명은 다시 피체되었다. 12명은 탈출했다가 일경과 간수대의 포위망에 대항하여 격투를 벌였다. 4명이 총살당하고 5명은 피체되었다. 3명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에 성공했다(1923.7.12.).

탈출 현장에는 수천 명의 동포들이 모여 독립군의 탈옥 투쟁을 지켜보았다. 14명 가운데 이름이 확인되는 전일(全一)은 노령 대한국민회의 선전부장으로 일본군 내에 선전 활동을 하다가 피체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다. 탈옥 시도로 4년이 가형되었고 1927년에 만기 출옥했다. 탈출에 성공한 황용운은 대한군정서 모연대장으로 국내 작전 중 피체되었다. 탈출해 성공한 그는 다시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도 탈옥이 있었다. 1921년 8월에 영사관 부속 경찰서 감옥에 갇혔던 항일운동가 3명이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1명은 곧 다시 피체되었는데 2명은 탈출에 성공했다(1921.8.30.).

독립군은 투옥을 투쟁의 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감옥은 새로운 투쟁의 현장이었고, 독립 의지도 더욱 다졌다. 오직 소원은 다시 총을 잡고 항일전선에 나서는 것이었고 목숨을 걸고 탈옥하기도 했다.

출옥과 순국

독립군이 감옥 생활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살아남아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한철수도 다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자백하지 않고 고문을 견뎌내 사형을 면했다. 1925년 출옥하자 고향에서 환영회를 열었는데 많은 이들이 환영과 위로의 말을 했다. 그는 "초지를 관철하라는 격려의 뜻"으로 생각했다. 이후 노령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청진에서 일경에게 발각되어 고향으로 압송되었다.

1925년까지도 석방된 독립군이 다시 망명하려 했고, 실제 망명을 돕는 조직도 있었다. 한철수도, 주비단원으로 4년 옥고를 치렀던 오병섭의 도움을 받았다(한철수, <나의 길>). 군자금을 모집하다 일경과 교전했던 김병칠은 1921년 피체되어 1929년에 출옥했다. 그는 출옥 소감으로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고 가족이 있는 노령으로 가겠다고 하였다(1929.6.19.). 말없이 노령으로 가겠다는 것은 독립 의지를 꺾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중·후반에 다시 망명해서 항일전에 나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독립운동 상황이 전과 다르고, 일경의 감시도 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명하기 어려운 상황을 수용하여 항일전 대신에 사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길을 걷기도 했다.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졸업한 장두관은 국내로 진입해 진주노동공제회에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아 만주로 가려 했다. 하지만 일경에게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피체되었고 석방 이후 다시 만주로 가지 못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뜻을 꺾지 않고 진주노동청년회, 진주신간회 등의 주역으로 사회운동에 전념했다. 1926년 진주청년회 창립기념식에서 장두관은 만주에서 널리 부르던 독립군가 「기전가(祈戰歌)」(「기전사가(祈戰死歌)」)를 불렀다(1926.11.15.). 독립군 정신이 그의 사회운동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사회운동이 힘들 때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생존을 위해 생활해야 했다. 'OO군 의용대원'으로 평남에 진입해서 활동하다 피체된 김봉섭은 1928년에 출옥한 후 어려운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 광부로 일했다. 시간 있을 때 마을에서 아동교육에 힘썼던 사실로 보아 그가 운동의 뜻을 꺾지는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운동의 대열에 다시 나서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데 탄광이 무너져 참사 당한 것은 더욱 비극이다(1932.3.5.). 죽는 순간 왜적을 향한 총이 손에 있길 소망한 독립군이었지만 그의 손에는 생계를 위한 곡괭이가 있었다.

감옥에서 순국하는 지사도 많았다. 피체 후의 고문과 투옥 후의 학대로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순국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김성로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5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에 있다가 신장염 치료를 받지 못하고 1922년 4월에 옥중 순국했다(1922.5.4.). 1910년 망국 직후 독립의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는 안동 유림(이상룡, 김동삼, 김대락 등)의 대열에 함께 했던 그는 12년 뒤에 옥중 순국해서 아들의 손으로 고향 안동을 찾았다.

참의부 군사위원장 이종혁은 1928년에 피체되어 7년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늑막염과 신경쇠약에 걸렸다. 1934년 4월에 위중한 상태로 출옥해서 1935년 12월 선천의 한 여관에서 병사했다. 감옥에서의 병고(病苦)로 인한 순국이었다. 임시 장례를 치렀다가 1936년 4월에 그의 형이 고향 당진으로 이장하려 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이장이 어려울 정도였다(1936.4.11.).

대한독립단 구월산대가 은율군수를 처단할 때 도왔던 전춘식은 10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복막염으로 위독한 상태가 되어 집행정지로 출옥했다. 병원에서는 전염병이라고 입원을 거절했고 '돈 한 푼 없이' 시내 '상밥집'에 병든 몸을 의탁해 생명을 간신히 이어갔다(1926.5.21.).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곧 순국했다.

의성단 단장 편강렬은 옥중에서 고문의 후유증인 척추염으로 위중해졌다. 고문과 영양실조로 결핵이 온몸을 침범했다. 1926년 9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선천 미동병원(美東病院. 미국인 경영)에 입원했다. 병이 낫지 않자 주위에서 시설이 좋은 일본인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했지만 편강렬은 "죽어도 왜놈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안동적십자병원으로 옮겼으나 1929년 1월 순국했다(1929.1.20., 주5)

김동삼은 피체 직후부터 고문을 당했고 형무소에서도 간수의 탄압에 감옥 동지들과 함께 단식으로 맞섰다. 옥중 단식 투쟁의 중심이었다. 결국 고문의 후유증을 회복하지 못하고 1937년 4월 옥중에서 순국했다. 장례를 치르려는데 '아무도 돌볼 용기가 없을 때'였다(김병익, <문단 반세기>). 한용운이 나서서 그의 거처 심우장으로 시신을 모셔 5일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내가 조국에 끼친 바 없으니 죽은 뒤 유해나마 적 치하에 매장치 말고 화장하여 강산에 뿌려 달라"는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고 재를 한강에 뿌렸다.(주6)

교수대에서도 당당했던 지사들

피체 후 왜적에게 사형당해 순국한 지사도 많았다. 한철수는 미결수로 있던 평양형무소에서 6개월간 24명의 사형을 보았는데 대부분 '정치범'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치범을 모두 독립군이라 할 수 없지만, 왜적을 토벌하고 교전하는 (준)군사 활동 외에 사형을 받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그 때 사형당한 정치범은 대개 독립군이었다. 그들은 "누구나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태연히 사형을 당했고, 신자는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린 후 의젓하게 사형을 당하였다."(한철수, <나의 길>)

곧 독립 의지를 확고히 표시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가 없었다. 독립군의 사형 집행 기사를 보면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를테면 3.1혁명 전에 광복회를 조직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친일파를 처단했던 박상진은 기사가 간략하지만 "교수대에서도 매우 태연하였다."(1921.8.13.) 서로군정서원으로 친일파 후창군수 계응규(桂應奎)를 처단했던 이창덕도 '조용자약'했다(1921.4.25.).

그들이 사형당하는 날이면 전체 '정치범'이 모두 단식하고 묵념을 했다. 순국한 동지의 뜻을 이어 독립전쟁을 통해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는 다짐의 추도였다.

일제에게 사형 당해 순국한 독립군의 몇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경 1명과 친일파 은율군수를 처단한 대한독립단 민양기는 사형 판결을 받고 1922년 2월 25일 순국했다. 사형장으로 가면서 그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대한독립만세"를 여러 번 외쳤다. 교수대에서 머리 숙여 기도한 뒤 간수에게 "나의 어린 자식과 아내와 집안일에 관한 일을 나의 백부에게 부탁하여 잘 보호하기를 말하라"고 전하고 20분 만에 절명했다(1922.3.30.). 군인의 몸으로 적에게 희생되는 순간에 마지막으로 가족의 뒷날을 걱정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압록강 대안에서 조선총독 사이토 일행을 공격했던 참의부 소대장 이의준은 1929년 1월 25일 사형 당해 순국했다. 순국 모습을 전한 기록은 없지만 판결 이후 "사바의 미련을 단념하고 교수대에 오를 날을 기다린다"고 했다(1928.11.13.). 군인으로서 두려움 없이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그의 순국은 뜻있는 인사의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 그 해 8월 기자 오기영은 총독 공격 지점을 찾아가서 "교수대의 이슬이 된 그들이 일직이 이 깊은 산을 내 집 삼아 다니던 광경이 눈앞에 선히 나타난다"고 하며 이의준을 추모했다(1929.8.20.).

광복군총영의 국내 진입부대와 함께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파괴하고 광복군총영의 격문을 살포했던 박치의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집행 며칠 전 면회 온 아내에게 어린 딸을 잘 양육하라고 부탁했다. 사형 집행 때 슬퍼하지 않고 '나는 다만 조선을 위하여 죽을 따름'이라고 말했다. 교수대에서 성경을 외고 찬송가를 부른 뒤에 "가장 소리를 높이 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1921.10.6.) 국민회 모연대장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밀정을 처단한 채경옥은 사형 당할 때 유언으로 "양심에 아무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다. 유족이 없어 서대문형무소에 가매장했다(1923.12.28.).

광복군사령부 제6대장으로 국내에 진입해 벽창의용단(碧昌義勇團)을 조직하고 일경과 밀정을 토벌했던 양승우는 장춘(長春)에서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사형을 언도받고 1926년 2월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가족도 모르게 집행되었고 유언이 있었지만 일제당국은 비밀에 부쳤다. 왜적이 반드시 망하고 독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겠다.

양승우는 어머니와 딸이 있었는데 가난한 살림에도 옥바라지를 정성껏 했다. 손수 밥을 지어 매일 식사를 차입했다. 집행 며칠 전 어머니가 면회를 갔는데 양승우는 음력 정월 초하루라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는데 잘 오셨다고 하며 "내가 죽는 것은 조금도 염려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옷을 입은 지 오래되었으니 고쳐달라고 부탁하며 입던 옷을 벗어서 건네 드렸다. 이 때 양승우는 며칠 뒤의 집행 사실을 알고 유언으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시지 말라 하고 입던 옷을 유품으로 건네 드린 것으로 짐작된다.

18일 오전 11시 28분에 순국했는데 12시에 어머니가 옷을 가지고 면회를 가자 형리는 사실을 숨기고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딸이 저녁에 식사를 가지고 갔는데 그 때도 형리는 사실을 숨겼다. 19일에도 식사를 가지고 갔는데 딸을 불쌍하게 여긴 조선인 간수가 사실을 알려주었다. 딸은 그릇을 땅에 떨어트리고 눈물을 흘리며 형무소 안을 향해 "아버지! 아버지!"를 목메어 부르고 "이 밥을 가지고 어떻게 할머니 앞에 돌아가나" 하고 통곡했다(1926.2.21.).

벽창의용대 의용대장 양승우 사형 순국 기사 양승우는 광복군사령부의 지휘 아래 국내에서 벽창의용대를 편제하여 주재소 공격 등 많은 작전을 펼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어 순국했다. ⓒ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국내에 진입해 일경 주재소를 공격했던 참의부 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 이수흥은 피체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는 최후를 각오하고 공소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미리 유언을 쓰고,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에게 하는 간곡한 부탁과 자신의 감회·희망을 담은 공개장도 작성했다. 매일 감상록을 써서 수백 쪽이 되었다. 1929년 2월 27일 순국했는데 그 날 아침 감상록에 최후로 세상에 남기는 한시(漢詩)를 썼다. 교수대에 오르기 전에 민족주의 연설을 열렬히 하고 태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수흥의 동지 유택수(柳澤秀)도 '태연자약한 태도'로 교수대에 올라 순국했다(1928.8.25., 28.) 유택수의 아머지 유창규는 며칠 전 아들에게 "너는 그 같은 죽음을 쾌쾌히 당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유택수는 아버지가, 이수흥은 매부가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는데 일경은 이들의 장례를 감시했다. 이수흥을 안성으로 운구하는데 동대문 경찰서 형사부장이 감시하며 따랐고 장례 때는 안성경찰서에서 삼엄하게 경계를 했다.

독립군의 바람은 적과 싸워 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만일 죽는 상황이 온다면 적을 무찌르다가 순결하게 전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왜적에게 체포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 부대 작전이 아니라 개별 활동 중일 때, 특히 비무장상태일 때 체포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피체는 독립군 항전의 끝이 아니었다. 피체되자마자, 독립군 정보를 지키고 살아남아 항전하기 위해 고문을 이겨내는 신문투쟁을 전개했다.

고문으로 많은 독립군이 희생되었고 이를 이겨낸 독립군은 다시 옥중투쟁에 들어갔다. 비인간적 학대가 자행되는 옥중에서 많은 이들이 또 순국하였다. 설령 석방되더라도 옥중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하기도 했다. 다행히 건강을 크게 잃지 않고 석방된 이들은 다시 만주로 가서 항전하기를 바랐지만 운동 상황의 변화와 일경의 감시로 이를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국내 사회운동을 통해 독립군의 정신을 실현하고자 했다. 또는 생계를 위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 하기도 했다.

피체 후 왜적에게 사형 당해 순국하는 독립군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국독립의 의지를 밝혔고 최후의 순간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피체 후 신문, 투옥, 석방, 순국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독립군은 항전 정신으로 싸워 이겨냈다. 피체는 전투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전투의 시작이었고, 그 전투에서도 독립군은 끝내 이겼다.

(주)
1)<<지운 김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1999, 28쪽.
2)위와 같음
3)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1, 422쪽.
4)3.1혁명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서로군정서 특파원으로 국내에 진입해 부모님과 부인에게 '나는 이미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몸'이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이근수, 백기환 등 7명의 동지와 함께 일제 침략기관인 평양부청을 폭파하려 했다.
5)강용권,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장산, 1996, 24쪽.
6)서중석, 위의 책, 423쪽.
덧붙이는 글 '새로 쓰는 독립군사'는 주중에 연재합니다. 다음 연재는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됨이’ - 독립군 전사(戰士)의 전사(戰死)"입니다.
#독립군 #평양감옥 #양승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AD

AD

AD

인기기사

  1. 1 '특혜 의심' 해병대 전 사단장, 사령관으로 영전하나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4. 4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